'끝없는 시도' 제작기
‘끝없는 시도’는 음향 중심으로 구성한 '음향 다큐멘터리' Acoustic Documentary입니다. 라디오 프랑스에서 새로운 밀레니엄을 맞이하여 전 세계의 방송사와 프리랜서 연출자들을 대상으로 개최한 ‘소리사냥대회 1999’(Concours Chasseurs de Sons' 1999)의 ‘음향창조’ 부문 최고상 수상작입니다. 2001년 커뮤니케이션 북스 출판사에서 펴낸 본인의 졸저 <라디오 다큐멘터리, 라디오 재미있게 만들기>에 수록한 제작기를 수정해서 옮겨 싣습니다. 사진도 추가했습니다.
1. 기획
프로그램의 아이디어는 연출자의 의식 속에 잠재되어 있다가 어느 순간 구체화된다. 따라서 연출자는 경험을 많이 하고 다양한 사람과 만나야 된다. 10여 년 전 ‘신 한국기행, 고향의 소리’란 프로그램을 제작하고 있었다. 1990년 5월 충청남도 홍성에서 대를 이어가며 옹기를 만드는 사람의 이야기를 취재했을 때다. 옹기장이 옆에서 옹기를 만드는 과정을 지켜보고 있었다. 옹기장이는 가마에서 옹기를 꺼내다 마음에 들지 않은 옹기를 골라냈다. 그리고는 그 옹기들을 아낌없이 집어던져 깨 버렸다. 대단한 흠집이 있는 것도 아닌데 깨버렸다. 아깝긴 하지만 그것을 버림으로써 옹기를 만드는 마음을 새롭게 다지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프로그램 ‘옹기장이’ 편의 시작을 이렇게 만들었다.
효과: 옹기를 집어던져 깨지는 소리
해설: 버린다는 것은 또 하나의 새로운 시작이다....
마음에 들지 않으면 버리고 다시 시작한다는 옹기장이의 강한 고집이 훗날 ‘끝없는 시도’의 기획 동기가 되었다. 만들다 마음에 들지 않으면 깨어버리고 다시 만드는 도공의 장인정신을 음향으로 표현하려고, 주제를 다음과 같이 정했다.
"작품을 만드는 사람에게 완성이란 없다. 무수한 실패를 반복하면서 한 개의 도자기를 만들어 내는 도공의 장인정신을 음향으로 표현한다."
2. 현장녹음
현장녹음은 경기도 이천 도예단지에서 했다. 이천에는 300여 개의 도자기를 만드는 공방이 있다. 이곳에서 도자기 제작의 모든 과정을 소리로 담을 수 있었다. 먼저 ‘조선요’에서는 도자기 흙을 수비水飛하는 과정에서 기계물레질까지의 과정을 소리로 담았다. 녹음은 두 대의 DAT 녹음기를 사용하였다. 사운드엔지니어 서기봉의 제안에 따라 한 대는 스테레오 마이크를 이용하여 스테레오 방식으로 녹음했고, 한 대는 숏건 마이크를 이용하여 모노방식으로 녹음했다. 마이크의 위치를 달리하면서 다양한 소리를 담았다. 좋은 소리를 골라 쓰거나 두 가지의 소리를 적절하게 섞으면 재미있는 표현이 될까 해서다. 도공의 힘겨워하는 호흡이나 흙을 매만지는 손질 소리도 녹음했다. ‘조선요’ 공방의 문은 아주 낡은 밀문이었다. 낡은 문소리가 오래된 공방의 느낌을 표현해 줄 것 같아 문소리도 함께 녹음했다. 도공은 낡은 구두를 신고 작업을 했는데, 발자국 소리가 귀에 거슬렸다. 신을 바꿔 신겨가며 도공의 움직임을 녹음해 두었다. 거듭 강조하지만 발자국 소리는 음향 구성물의 중요한 소재다.
요즘 물레질은 기계물레로 하기 때문에 발물레는 거의 사라졌다. 수소문해서 ‘백광요’에서 보관 중인 발물레를 찾았다. ‘백광요’의 주인은 20여 년 이상 도자기를 만들어 온 사람이다. 그는 흙덩이를 개어 맨발로 수비水飛를 해서 물레질을 했다. 물기 있는 황갈색 흙덩이를 거친 숨을 내쉬며 밟는 모습을 보다 보니 묘한 생각이 들었다. 물에 젖은 흙을 밟는 도공의 모습에서 성적 이미지를 느꼈다. 도자기의 곡선 또한 여인의 곡선으로 연상되었다. 부수적으로 성적 이미지를 상징적으로 나타내보면 어떨까 생각을 했다. '메'를 내리치는 소리, 흙반죽 소리, 도공의 거친 숨소리, 유약통을 휘젓는 소리, 불길이 활활 타오르는 소리. 이 모두가 성적 이미지를 지닌 소리가 아닌가?
도자기의 깨지는 소리는 ‘동해요’ 소리를 활용했다. 모든 도공들은 마음에 들지 않는 도자기를 깨버린다. 도자기를 한껏 던져 버리는 소리를 수 차례 녹음하였다. 그리고 깨어진 도자기 파편 더미에서 도자기가 굴러 떨어지는 소리도 녹음해 보았다.
도자기 전시실에서는 도자기를 두드리는 소리를 잡아내었다. 도자기를 손가락으로 퉁길 때 나는 도자기의 울림은 도자기의 우수함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단다. 하지만 맑은 도자기 소리는 청아한 도자기의 이미지를 떠오르게 한다. 도자기 소리를 녹음하다 보니 악기소리가 연상되었다. 이 소리를 음악적으로 표현하고 싶었다. 녹음 현장에서 여러 개의 도자기를 규칙적으로 두드려 리듬을 만들기도 하고, 크고 작은 도자기를 울려 큰소리 작은 소리로 박자를 만들어 보기도 했다. 탁한 소리를 내는 도자기를 두드려 불협화음을 만들기도 했다.
빙렬소리는 ‘한청요’에서 녹음했다. 빙렬소리란 청자를 가마에서 꺼낼 때 청자의 겉살이 터지며 내는 소리다. 불가마에서 뜨겁게 달구어진 청자가 차가운 공기를 만나면 도자기 표면에 바른 유약 부분이 터지면서 아름다운 소리를 낸다. 터진 흔적은 잔잔한 실금으로 남게 된다. 수백 개의 청자에서 내는 빙렬소리는 팅커벨 연주소리를 연상시킨다. ‘한청요’에서 청자가마를 여는 날 연락이 왔다. ‘한청요’는 차길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다. 공방의 창문을 닫아도 차소리가 새어들었지만 녹음했다. 차소음 때문에 빙렬소리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도자기 여섯 개를 골라내어 상자에 담아 조용한 뒷방에 옮겨서 다시 한번 녹음했다. 그곳도 소음이 완전히 차단되지 않았고, 게다가 몇 개의 도자기에서 울려 나오는 빙렬소리는 안타깝게도 빈약했다.
3. 구성
음향 구성은 뚜렷한 주제와 탄탄한 구성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쉽게 난해 해진다. 작가의 도움을 받기로 하고, 라디오 음향 구성의 경험이 많은 작가 김광수와 의논했다. 김광수와 나는 다큐멘터리와 드라마에서 호흡을 맞춘 적이 많다. 그는 다큐멘터리와 라디오 드라마에 깊은 애정이 있는 작가다. 뛰어난 작가는 연출자가 미처 생각지 못한 부분을 생각해 낸다. 빙렬소리의 아름다움과 도공들이 지내는 의식에 대해 일러주었다. 취재해 온 자료를 검토를 거쳐 다음과 같은 줄거리를 만들어 냈다.
" 도공 박 씨는 자신이 만든 도자기가 마음에 들지 않자 깨버린다.
도자기를 만든다.
도자기는 흙, 물, 불의 3가지 요소로 만들어진다. 흙을 주물러서 공기를 빼내고, 물레에 올려 형태를 빚는다. 빚은 도자기에 유약을 바르고 가마에 넣어 불로 구워낸다. 도자기는 실금 터지는 빙렬소리를 내면서 완성된다.
도공 박 씨는 완성된 작품을 보고 첫눈에는 만족한다. 하지만 도자기를 보면 볼수록 부족한 점이 나타난다. 도공은 다시 도자기를 만들기 위해서 도자기를 아낌없이 깨버린다."
프로그램의 시작과 끝은 도자기를 깨버리는 강렬한 소리로 했다. 도공의 무수한 반복, ‘끝없는 시도’를 상징하기 때문이다. 도입부의 도자기를 깨는 소리에는 매미소리를 삽입했다. 계절감과 장소를 선명하게 그려낼 뿐만이 아니라, 결말의 도자기 깨지는 소리와 달리 표현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현장에서 채록한 낡은 문소리를 넣어 장소의 이동감을 선명하게 헸다. 제상에 술을 올리는 소리는 술잔의 여음을 살렸다. 이어서 흙을 수비하는 소리다. 격정적으로 작업을 하다가 여인의 비웃음이 떠오르자 하던 작업을 내팽개친다. 천둥번개소리와 빗소리는 도공의 고뇌의 세월을 상징한다. 이어지는 정적. 그리고 격렬한 불소리. 불길이 사그라지며 들리는 가을 풀벌레 소리는, 밤이라는 적막감과 도공의 쓸쓸함을 상징적으로 나타내준다. 잠시 후 아름다운 빙렬의 소리가 피어오른다. 빙렬의 소리는 아름다운 도자기의 울림소리로 이어지는데, 이 부분이 작품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면이다. 환희의 순간이라고나 할까. 빙렬소리에 도자기의 맑은 울림이 겹쳐지게 하여 더욱 아름답게 꾸몄다. 환희의 순간이란 파국의 전조다. 이 아름다운 소리는 곧바로 불규칙한 리듬으로 바뀌고 이 소리는 다시 강렬한 도자기 깨버리는 소리로 끝난다. 기쁨이 사라지며 다시금 긴 고민이 시작되는 것이다.
도자기의 제작 과정을 나타내며, 도공의 창작 과정의 고뇌를 상징적으로 표현하도록 구성했다. 소리의 흐름은 완급, 강약, 속도, 아름답고 거침을 고려했다.
4. 스튜디오 제작
현장 녹음은 항상 마지막 기회라는 자세로 임해야 한다. 그런 자세로 녹음하여도 부족한 부분이 있다. 이번 경우에 특히 아쉬웠던 부분은 빙렬소리다. 소음을 제거하기 위하여 컴퓨터 소프트웨어를 이용했다. 소음은 제거되었지만 생생함이 약해져서 아쉬움이 남았다.
장작가마의 소리는 녹음하질 못했다. 장작가마는 거의 다 가스가마로 바뀌었고, 몇 개 남은 장작가마도 1년에 한 두 차례만 사용하기 때문에 기다릴 수가 없었다. 부족한 효과음은 자료테이프를 활용했다. 장작 타는 소리를 합성해서 장작가마의 이미지를 만들었다.
도공의 갈등을 상징적으로 표현하기 위하여 여인이 비웃는 소리와 탄성을 넣었다. 의미 있는 호흡처럼 짧게 표현해야 하는 이 같은 연기는 뛰어난 연기력을 지닌 사람만이 할 수가 있다. 절제되고 정확한 연기력을 보여주는 성우 김은영에게 부탁했다. 그녀는 잠재된 의식을 압축적으로 표현하는 능력이 있다. 의식의 제문은 사실 음향을 찾을 수가 없어서 부득이 성우 임종국에게 부탁했다. 그의 소리에는 전통적인 가락이 배어있다. 축문도 음악적인 요소가 있다.
음악은 단 한번 사용했다. 도공은 자신이 만든 도자기에 대하여 갈등하다가 마침내 깨버린다는 설정을 했는데, 갈등이 고조되는 부분에 불안한 느낌의 음악을 넣었다. 도공의 극도로 예민해진 심리를 강조하기 위해서다. 이 음악은 마지막 장면인 도자기 깨버리는 소리로 이어져, 파열음의 느낌을 한층 강화했다. 파열음이 강해야 긴 여운을 남길 수 있다.
다양한 효과음이 삽입되거나 다양한 소리를 적절하게 녹음하려면 반드시 다채널 녹음을 해야 한다. 이 작품을 만들 때 갑자기 다채널 녹음편집기인 로직원이 고장 났다. 할 수 없이 동시 녹음 작업을 했다. 녹음 전에 모든 효과음을 완벽하게 만들어서, 여러 장의 CD와 테이프에 복사했다. 이를 스튜디오 안의 모든 CD플레이어, 릴 녹음기 등에 장착한 뒤에 동시에 작업한 것이다. 이 방법은 엔지니어와 효과맨, 음악담당자 그리고 연출자가 완벽하게 호흡을 맞추어야만 제대로 해낼 수가 있다. 기술의 서기봉, 효과의 차부안 등 우리 제작팀은 10년 이상 호흡을 맞추어왔다. 여러 차례의 재녹음을 한 끝에 동시작업으로 해냈다. 멀티 녹음장비가 해낼 수 있는 것을 기술력으로 해낸 것이다. 기술이 좋으면 장비의 부족함을 어느 정도는 극복할 수가 있다.
5. 평가
이 프로그램은 과분하게도 두 개의 상을 받았다. 1999년 10월 라디오 프랑스에서 주최한 ‘소리사냥 1999’ (Concours Chasseurs de Sons 1999)에서 소리창조 부문의 최고상인 ’ 프랑스 문화상‘(Prix France Culture)을 받았고, 2000년 2월 28일 한국프로듀서연합회에서 주최한 제12회 한국프로듀서상에서 라디오 부문 최고상인 ‘실험정신상’을 수상했다.
2000년 4월 베를린에서 열린 국제피처회의에서 라디오 프랑스의 Oliver Kaeppelin을 만났다. 그는 이 작품을 가리켜서, ’ 기술적으로 뛰어나고, 이미지가 놀라운 작품이다. 우주의 기본 물질인 흙, 물, 바람의 이미지를 설득력 있게 조화시킨 작품이다.‘라고 칭찬해 주었다.
아쉬운 점이 없지 않다. 뒷날 장작가마의 강한 소리를 들었을 때 아쉬움이 남았었다. 장작가마의 불길 소리를 넣었더라면 훨씬 강한 이미지를 전달할 수가 있었다. 음향만으로 구성하는 순수 음향 다큐멘터리에서 소리의 선택은 좀 더 신중해야 했다. 천둥소리 역시 선명한 그림이 그려지는 그런 소리가 아니었다.
6. 프로그램 자료
1) 첫 방송일시
1999. 10. 2. 오전 8 시대 (MBC 라디오) / 4분 32초
2) 제작진
구성:김광수 / 기술:서기봉 / 음악:이춘화 / 효과:차부안, 엄기혁 / 컴퓨터편집:이승우 / 연출:김승월
3) 방송장비
현장녹음 녹음기:SONY PRO2 DAT, FORSTEX DAT PD4 / 현장녹음 마이크: 제나이저 416 숏건, 제나이저 스테레오마이크 MKE44 P / 스튜디오 AMU / 컴퓨터 프로그램
오디오파일 '끝없는 시도', 길이:4분 30초
7. 원고(구성: 김광수)
‘끝없는 시도’
FX 도자기 깨는 소리
도공 박 씨는 새로 만든 도자기가 마음에 들지 않자 던져서 깨버린다.
FX 매미 울음
FX 공방 문을 열고 닫고
도공 박 씨는 도자기를 만들기 전에 제사를 지내기 위하여 도자기 잔에 정성껏 물을 따라 제상에 올려놓는다
축문
유維 세차歲次 기묘 6월 삭 병인 5일 경오 사기장 박갑동
감感 소고우召告于
도자기 만드는 흙을 메로 친다.
메로 친 흙을 공기를 빼내고 점성을 높이기 위하여 발로 밟고 손으로 주무른다.
흙이 제대로 준비되자 그릇을 빚는다.
모양이 제대로 나오지 않아 조바심이 나는데 언젠가 자신이 만든 도자기를 비웃던 여인의 조롱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다.
여인의 비웃는 소리
순간적으로 화가 치밀자 만들던 도자기를 들어 바닥에 힘껏 내던진다.
FX 번개
박 씨는 다시 마음을 가다듬고 물레를 돌려 그릇을 빚는다.
FX 벼락
FX 소나기
벼락이 치고 비가 오지만 정성껏 물레를 돌려 그릇을 빚는다.
그리고 빚어낸 토기를 유약통에 담근다.
유약을 바른 토기를 가마에 넣고 불을 댕긴다.
FX 장작불
축문
물의 신은 물로 모시고 불의 신은 불로 모시고 흙의 신은 흙으로
모셔다가 미약한 이 정성을 올리오니 천하명품 도자기로 태어나사이다.
깊은 밤이 되자 불이 사위어 간다.
FX 풀벌레 소리
가마에서 달 구워진 도자기를 꺼내자 도자기 표면에 작은 균열이 생기면서
터지는 소리(빙렬소리)가 난다.
신비한 빙렬소리 속에 여인의 간드러진 교성이 들리는 것만 같다.
여인의 웃음
박 씨는 도자기를 조심스럽게 두드려본다.
도자기에서 맑은 울림이 난다.
첫눈에는 도자기의 모습을 보고 흡족해한다.
하지만 보면 볼수록 부족한 점이 나타난다.
박 씨는 도자기의 부족한 점이 점점 많이 나타나자 절망감에 사로잡혀
도자기를 벽에 던져 깨버린다.
음악
FX 도자기 깨는 소리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