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혼자 (못) 산다. 그런데 함께도 못 살겠다.
사랑이 부족한 게 아니다. 사랑하는 마음이 차고 흘러넘치고, 이 사람과 평생 함께 살 수 있겠다는 확신 또한 있지만, 우리 둘이서 오손도손 사는 게 현실 결혼생활의 전부가 아닌 걸 알기 때문이다.
결혼하기 싫은 첫번째 이유는, 누적된 간접경험 데이터로 생성된 '시월드 공포' 때문이다. 강남구 토박이로서, 성인이 된 이후로는 대치동 강사로서, 나는 이 부자동네에서도 최고로 멀쩡해보이며 명예롭고 부유한 집들마저도 얼마나 마음이 가난한지, 불행한 가정사를 숨기며 살아가는지 무수한 사례를 목격해왔다.
말 안 통하는 내 친부 친모도 생각하면 마음이 갑갑해져오는데 남편 부모까지 챙기겠다고 결혼하는 건 미친짓이다. 내 그릇으로는 도저히 못한다. 며느리의 도리니 집안 행사니 뭐니 하는 이유로 결혼한 자식들과 그 배우자들 자꾸 부르는 거 나 같은 INTP인간에겐 최악의 고문이다. 시대가 바뀌어 언젠가 이런 정서와 관습이 완전히 사라진다면 모를까, 이 낡은 대가족 제도의 잔재가 남아있는 한 이번 생에 결혼하긴 글렀다.
세상에서 내가 가장 소중한 건 당연하다. 한번뿐인 인생인데 만나서 즐겁지 않은 사람은 안 만나며 사는 게 맞다. 하다못해 친부모자식 간에도 학대가 있거나 심각하게 안 맞으면 분리만이 해결책인것을.
100세 시대의 부작용인가. 이곳저곳 커뮤 눈팅하다보면 기혼여성들의 하소연을 자주 보게 되는데, 한결같이 비슷비슷한 내용이다. 한줄요약하자면 '노년이 너무 길어지니 자식들이 힘들다'.
안그래도 각자의 이유로 우리는 모두 바쁘고 힘들다. 누구네 연봉이 얼마네, 누구네 대학 어디갔네, 누구네 며느리가 잘한다드라... 이런류의 얘기나 하는 시어머니를 세상 누가 보고 싶어 하겠는가.
결혼을 선택했다고 잔소리와 오지랖에 시달리며 인내할 이유도, 불필요한 의무전화를 숙제처럼 여길 필요도, 종노릇하며 시부모를 받들어 모실 의무도 없다. 가족구성원 내에서조차도 마찬가지로, 모든 관계는 서로 힘들지 않을 만큼 거리를 두는 것이 합리적이다. 우리는 남편 부모 챙기려고, 효도하기 위해서 결혼을 선택하는 게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실에선 막상 처신이 쉽지 않다. '피곤한 시댁+우유부단한 남편+욕 먹기 무서운 나 자신'의 이 환장할 조합에서 무슨 수로 탈출한단 말인가. 최소한의 도리를 잘 하고 기본에 강하면서도, 시댁에 끌려다니지 않고 현명하게 선 그을 줄도 아는, 할 말 똑바로 잘 하는 처신 야무지고 존중받는 며느리로 사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워 보인다. 내가 살아았는 한 불편하고 눈치보는 모임, 연락, 행사는 계속될것이고 고통받는 며느리들은 영원히 고통받겠지.
난 그저 보편타당한, 미풍양속에 크게 반하지 않는 쿨한 관계정립, 마음의 병 없는 결혼생활, 평화롭고 안전한 가정을 이루고 싶을 뿐인데 자신이 없다.
잦은 연락과 모임이 모든 분란의 시작이고 모두를 불행하게 만드는데도 왜 바뀌지 않을까. 동서관계, 고부관계 등 하나같이 자주 만나봤자 좋을 게 없는 관계일 뿐이다. 현명치 못한 부모가 결국 자식에게 잡음까지 고스란히 물려준다.
'그냥' 결혼하고 싶지 않은 게 아니다. 생각해보면 수십 수백가지 이유가 떠올라서 이유를 고를 수 없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