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필요한 말을 하지 않으니까
0. 작가가 되고 싶어서
퇴사했다.
올해는 정말로 글을 한 번 제대로 써 보고 싶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어서 글 쓰는 일에 집중해 볼 생각이다.
퇴사는... 글 쓰려고 일부러 퇴사한 건 아니지만 아무튼 타이밍 좋게 퇴사하게 됐다. 집에 돌아와 소설을 쓰든 에세이를 쓰든 하려면 낮 동안에라도 많이 움직일 수 있는 일을 하는 게 좋겠다고 느꼈다. 그래서 육체노동 알바 지원함. 정 안되면 농사지으면서 글 쓰지 뭐.
이걸 작가라고 해도 되나 싶긴 하지만 어쨌든 곧 책이 나오긴 할 예정이다. 나는 #단편소설 을 써서 출간하게 됐는데, 비문학뿐만 아니라 문학 쪽에서도 필력을 인정받은 계기가 되어서 앞으로도 꾸준히 장르를 가리지 않고 쓰고 싶은 글을 써나가려고 한다.
논설문이나 #칼럼, #비평문, #서평 등도 꾸준히 쓰고, 문학도 계속해서 써나갈 예정이다. 내가 더 쓰고 싶고 쓰면서도 즐거워서 좋아하는 글은 소설이지만 (물론 창작의 고통은 배로 괴롭다) 칼럼을 계속 쓰려는 이유는, 세상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는 대신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시각을 잃지 않기 위해서다. 세상이 시키는대로 사는 게 정답이라 여기는 사회 안에서는 체제에 순응하는 삶을 살다 보면 무뎌지기 마련이다. 나는 내 안의 날카롭고 예민한 그 감각을 잃고 싶지 않다. 계속해서 마음속에 자리한 뾰족한 가시를 갈고 닦을 것이다. 고통에 무뎌지지 않을 수 있도록. 그게 나의 고통이든, 타인의 고통이든.
1. 비문학을 쓰는 이유
현대 사회는 살아있는 존재의 고통을 빨아먹으며 유지되는, 난폭한 체제를 기반으로 한다. 자본가는 임금 노동자의 고통을, 유급 노동자는 무급 노동자의 고통을, 도시 생활자는 지방과 제3세계의 고통을, 소비자는 생산자의 고통을 빨며 삶을 영위한다. 믿고 싶지 않아도, 이런 말이 불편해도 그게 사실이다. 좋은 뜻으로 누군가에게 한우를 선물했다면 그건 기후위기와 적색육 섭취로 인한 가속노화와 공장식 축산업에 기여했을 뿐이다. 여기서 좋은 건 마음밖에 없다. 자본주의 연쇄 고리의 현실이 그렇다.
아무리 착한 기업의 제품을 소비하고, 저속노화 도시락을 사 먹으며 건강을 챙기려고 애써 봤자다. 그것들은 우리 사회의 본질적인 문제를 해결해 주진 않는다. 어떻게해도 우리의 삶이 상품의 소비와 생산으로 구성되는 한, 우리는 서로가 서로의 목을 조르며 살아갈 수밖에 없다. 자본주의 사회 구조 안에 편입되어 있는 사람이라면, 여기에 동참하고 싶지 않아도 매 순간 가담하게 된다. 마트에서 구입하는 물건들이 어떤 과정을 거쳐서 내 장바구니에 들어오는지, 세상은 은폐한다. 숨겨진 진실은 드러낼 수 없을 만큼 추악하고 더럽다. 우리가 쉽게 손에 넣을 수 있는 소비재 중, 떳떳하게 만들어진 것들은 거의 보기 드물다. 보이지 않기 때문에, 편안하다고 믿기 때문에, 안락하다고 착각하기 때문에 우리는 무뎌진다. 가진 자의 궁전은 없는 자의 곤궁함으로 세워졌다. 더 많은 소비와 더 높은 구매력은 나를 더 많은 노동의 굴레로 밀어넣을 뿐이다.
자본이라는 新신분제도는, 능력에 따른 보상이라는 헛소리로 불평등을 정당화한다. 대한민국의 능력주의는 사실상 능력보다 운빨과 조건, 주변환경이 더 많은 것을 좌우하는 가짜 능력주의이다. SNS와 인터넷의 발전은 지위 획득의 불평등을 더욱 심화했다. 알고리즘의 신과 운빨, 친목 여부, 사이버 도화살의 유무가 능력이나 실력보다 더 큰 영향을 미친다.
한국 사회에서 허용되는 인생이란, 유독 그 범위가 좁다. 무언가를 도전하는 데에도 나이가 이러쿵저러쿵 해대며 타인이 내 앞길을 가로막기 일쑤며, 무슨 일을 하더라도 내 생계의 주도권을 쥐고 있는 건 내가 아니라 기업(또는 고객)이다. 돈을 쥔 사람이 나를 받아주어야만 먹고 살 것을 허락받는 인생은 주인의 삶이 아니라 노예의 삶이다. 임금 노동과 화폐 경제가 인생의 모든 영역을 지배하는 사회에서는 필수적으로 인간이 무력해질 수밖에 없다. 내 손으로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지구상 그 어떤 시대에서도 이렇게 전적으로 타인의 돈에 자신의 삶을 내맡기며 살았던 역사는 없다. 중세시대 소작농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그런데 아무도 이 사실에 대해서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기후 위기라는 거창한 문제를 차치하고서도, 당장 내 삶이 "남이 주는 돈"에 종속되어 있는데, 이 부자유한 세태를 사람들이 너무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인다. 받아들이는 걸 넘어 이런저런 조건까지 붙여가며 제 숨통을 마구 옥죈다. 신입 나이는 몇살을 넘으면 안 되고, 나이가 몇이면 경력은 어느 정도 있어야 하고, 경력 몇 년차 쯤 되면 연봉은 얼마 정도 되어야 하고... 아주 지랄 뽕짝들을 하고 있다.
노예의 사고를 답습하다 못해 체화시키면서 그걸 디벨롭까지 하고 있는 광경을 보고 있노라면 내가 다 숨이 턱턱 막힐 지경이다. 이따위 사회 안에서 살아가는 동안, 나도 어느 틈엔가 그들의 논리에서 완전하게 벗어나지 못할 것 같다는 두려움이 엄습해 온다. 그러다 보니 조급해진다. 전세계에서 통용되는 나이로 고작 스물 넷밖에 안 됐는데, 한국에선 그마저도 무언가를 시작하기엔 늦은 나이처럼 느껴진다는 거다. 늦긴 지랄 염병 뭐가 늦어. 스물 세살이 되도록 한국인은 제 적성을 찾을 기회조차 얻지 못한 채 학교에서 시키는 붕 뜬 공부만 죽어라 하는 문제집 풀이 기계로 살아야 하는데. 한국인의 인생은 스물 넷부터가 진짜다. 그러니까 나는, 작년에 대학을 졸업했으니 이제 정말로 내 세상을 탐구하기 시작한 지 고작 두 해 남짓밖에 되지 않은 거다. 난 두살이다. 스물 두살은 없는 셈 치고 놓고 다닌다. 진짜다. 응애.
아무튼 두살배기가 이 정신 나간 세상을 보고 있자니, 아무래도 이렇게 사는 건 옳게 된 삶이 아니라는 생각만 드는 거다. 여전히 주목을 받고, 대다수의 사람들이 마구 소리높여 이야기 하는 내용은 부자되는 법, 잘나가는 법, 경쟁에서 살아남는 법, 몸값 높이는 법, 더 많이 사치 부리며 펑펑 쓰고 다니는 인생을 추구하는 법 등등이다. 정말로 우리에게 필요한 이야기는 묻힌다.
예컨대 내면의 소리를 듣는 법, 지구를 파괴하지 않는 법, 자유로운 사회를 만드는 법, 평화롭게 사는 법, 경쟁하지 않는 법, 누구나 존중받을 수 있는 지구 공동체로 나아가는 법 등은 아무도 관심을 주지 않는다. 오죽하면 이런 얘기를 하며 주목받기 위해 브런치에 글을 올릴 때마다 맛있는 음식 얘기인 척 제목으로 낚시를 하겠냐고, 내가.
지금 세상은 기업의 영리활동에 방해된다는 이유로 환경운동가가 잡혀가는 세상이다. 인간이라면 이게 얼마나 이상하고 기괴한 일인지 느껴야만 한다. 나는 이 세상을 계속해서 기괴하다 생각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파괴적인 일과 파괴적인 세계에 물들어 버리고 싶지 않다. 그래서 칼럼을 계속 쓸 생각이다. 주기적으로 내가 나에게라도 말해주지 않으면 나조차 무던해질까 두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