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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슬 Jun 03. 2024

먹어야 사는 존재라는 것

우리는 살기 위해 먹고 있나

1. 먹지 않고는 살 수 없어! 

인간은 종속영양생명체다. 종속영양생명체로 태어난 세상의 모든 존재들은 먹어야 살 수 있다. 식물처럼 독립영양생명체가 아닌 이상 다른 개체를 먹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다. 그 식물또한 어떻게 보면 아예 독립적으로 영양을 흡수하는 생명체는 아니다. 식물조차도 땅의 영양분과 물, 태양의 영양을 흡수해야만 살아갈 수 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먹고 먹이는 관계로 연결되어 있다. 나는 먹인다는 말을 먹힌다는 말보다 좋아한다. 약육강식의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돌봄의 관점으로 세계를 설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먹히는 것은 수동적이나 먹이는 것은 능동적이다. 내가 잘 먹은 만큼, 또 다른 생명의 유지를 위해 기꺼이 먹인다. 세계는 그렇게 이어진다. 


지구는 먹이로 가득 차 있다. 누군가의 먹이가 되고, 먹이를 먹음으로써 세계가 연결되고 유지된다. 자연이라는 신은 세계를 그렇게 설계했다. 먹는다는 자기 돌봄, 먹인다는 타자 돌봄의 상호적 호혜성으로 온 생명이 살아갈 수 있도록. 세상이 유기적인 관계로 이어질 수 있도록. 


그 연결고리에서 인간 또한 예외는 아니다. 인간도 태어날 때부터 평생동안 외부로부터 에너지를 섭취해야만 살아갈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 외부의 에너지란 공동체에서 나오는 정신적인 에너지, 햇빛이나 자연으로부터 얻는 에너지도 포함된다. 하지만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은 역시나 '먹이'다. 우리는 먹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고 무언가를 먹이로 삼음으로써 생명을 이어나갈 수 있다. 즉, 먹는 것은 나를 살리기 위한 행위이다. 먹어야 살 수 있다는 것은 나를 살리기 위해 먹는 것이 세상에 해가 되는 일이 아님을 의미한다. 오히려 자연-신은 먹이를 취하고 먹이가 되어주는 연쇄고리 속에서 다른 존재들과 연결되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알게 해주기 위해 우리를 먹어야 살 수 있는 존재로 만들었다. 


본래 먹는다는 것은 세상을 살리는 행위에 속한다. 생태계는 먹이사슬을 통해 균형을 갖춰나간다. A의 천적인 B를 C가 먹어서 생태계의 평형이 유지된다. 먹고 먹여서 지구 상에 다양한 생명체들이 공존할 수 있게 되었다. 지난 600만년 동안 인간도 그 안에 포함되었다. 인간은 자연으로부터 먹이를 얻었고, 먹이는 기꺼이 인간의 삶을 위해 자신을 내어주었다. 인간은 그에 감사했으며 먹이가 되어준 세상에 무언가 돌려주는 행위로 보답했다. 열매나 겉껍질을 내어준 나무 그늘에 선물을 놓아두거나 동물을 먹을 때는 제사 등의 의식을 치렀다. 죽은 뒤엔 흙으로 돌아갔다. 흙으로 간 인간은 다시 땅의 자양분이 되어 식물의 먹이가 되고 지렁이의 먹이가 되었다. 그렇게 세상의 모든 엔트로피가 이곳에서 저곳으로 옮겨가며 돌고 돈다. 지구는 유한하지만 그 안에서 무한히 순환한다. 


나는 이 연결의 감각을 잊지 않고 사는 것이 중요하다 믿는다. 그래서 먹어야 사는 존재라는 것에 깊은 의미를 부여하고 싶다. 인류는 지금까지 살기 위해 먹어왔고, 먹기 위해 살아왔다. 자연으로부터 필요한 만큼만 먹이를 구했고, 구해온 먹이를 공동체 식구들과 나누며 지내왔다. 인간의 역사는, 어쩌면 생명의 역사는 잘 먹는 법, 굶지 않는 법을 엄마가 자식에게 몸에서 몸으로 전수하며 돌보아 온 역사라고 할 수 있다. 생명체로서 보시의 관계에 있음을 상기한다면 세계를 보는 관점또한 완전히 달라진다. 


산다는 것은 곧 먹는다는 뜻이다. 살린다는 것은 먹인다는 뜻이다. 먹이는 것은 돌봄의 정수다. 어쩌면 지구 역사의 가장 큰 중심축이자 모든 것이 이 '돌봄'으로 귀결된다. 먹이를 구하는 것, 즉 식량 자급과 식구들을 먹이는 돌봄 노동은 온 생명들이 지구를 유지하기 위해 해 온 가장 주된 행위이다. 그런데 오늘날, 인류는 이 가장 중요한 일을 어떻게 여기고, 어떤 방식으로 해나가고 있는 걸까. 살리기 위한 가장 기본적인 일을 정말로 "살기 위해"하고 있는 걸까. 




2. 이렇게 먹어서는 살 수 없어! 

모든 생명체가 그래왔듯이, 인류도 살아남기 위한 방침을 세워나가며 생존해왔다. 그 방침은 서로가 서로의 안전망이 되어 주는 것이었다. 안전한 식량을 얻는 법부터 얻어온 식량을 나누는 법, 부상자가 발생하면 잠시 쉬어가며 치료될 때까지 도와주는 법 등. 인류의 진정한 문명은 피라미드도, 바벨탑도 아니었다. 진짜 문명의 시작은 고대 인류의 골절된 뼈가 다시 붙은 흔적이었다. 이는 부상자를 지키고 돌보았다는 뜻이다. 인류가 전쟁과 폭력, 사냥, 약탈, 착취, 식민화, 독재, 강제 노역 대신, 먹이고 입히고 돌보고 살리는 길을 선택한 시간이 훨씬 길었다. 그게 생존에 유리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우리는 앞으로도 살아가기 위해선 공존하고, 돌보고, 살리는 평화의 길을 선택해야 한다. 이 평화의 길을 여는 가장 큰 움직임은 '무엇을 어떻게 먹을 것인가'의 선택이다. 어떤 식량을 어떻게 얻어서 어떤 방식으로 먹을 것인가의 문제는 가장 근본적인 문제이다. 우리의 존속 여부가 모두 여기에 달려있다. 아까도 말했듯이 우리는 먹어야 사는 존재고, 지구는 먹고 먹이는 관계망으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먹고 먹이는 신성한 행위가 지금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는지 돌아 보면 경악하지 않을 수 없다. 생명을 살리는 근간임에도 신성함은 사라지고 오직 파괴와 약탈, 착취, 강제 노역, 전쟁, 탐욕 등 천박함만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가축들을 좁은 공간에 가두어 놓고 그들을 고기 공장 취급하는 축산업. 식물들을 흙도 햇빛도 없이 LED 조명 밑에 늘어놓고 식량 공장 취급하는 스마트팜. 지력을 착취하다 못해 땅을 황폐하게 만드는 대량생산 단일작물 관행 농업. 본래 전쟁을 위한 살상무기였던 농약과 제초제들. 더 싸게, 더 많이 먹기 위한 각종 몸부림들. 더 많이 팔아 이윤을 남기려는 식품 산업. 제3세계 농가의 노동력을 착취하고, 먹는 인간의 건강을 담보로 삼아 장사하는 기업들. 


현대의 먹거리는 더 이상 먹거리라고 할 수 없을만큼 많은 것들이 오염되었고, 변질되었다. 이게 살자고 먹는 건지, 죽자고 먹는 건지 분간할 수 없을 지경이다. 전 세계적인 식량 생산 방식과 식량 유통 구조, 가공 처리해 판매하는 식품 기업까지 모든 것이 총체적 난국이다. 땅과 자연을 공장으로 대하는 것도 모자라 공장에서 나온 음식을 먹는다. 그 안에 무엇이 들어가있는 줄 알고. 의사들은 건강한 식품 선택을 말하면서 지방이 문제니 탄수화물이 문제니 단백질이 어쩌니 하지만 정작 그 안에 들어간 농약, 항생제, 호르몬제, 화학비료, 식품 첨가물은 지적하지 않는다. 탄단지 비율을 따지기 전에 이것이 진정으로 음식다운 음식인가를 따져 물어야 한다. 


슈퍼마켓에서 기업이 내놓은 상품을 구입하게 되고부터는 부모들이 아이들에게 해주는 음식도 달라졌다. 반찬으로 내놓는 스팸이나 소세지 볶음, 간식으로 주는 핫도그, 치킨너겟. 아침 식사 대신 주는 시리얼. 이게 내 아이를 조금씩 죽이고 있다고 생각하지 못한다. 


인류를 지탱해 온 돌봄 노동과 가사 노동은 가장 귀찮고 구차하고 무가치한 노동이 되었다. 귀찮으니까 배달음식 시켜. 그렇게 해서 배달 된 음식을 과연 음식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그 안에 무엇이 들었는지 알지도 못하고 알려고 하지도 않은 채 점점 더 돌봄과 멀어져간다. 사람들은 이제 자신의 노동 대신 타자의 노동으로 완성된 "완제품"을 사먹는다. 누가누가 더 완제품의 유행에 민감한가 경쟁이라도 하듯, 방송과 광고, 먹방 열풍이 소비를 부추긴다. 마라탕후루 따위의 노래가 유행할 정도로 먹거리는 그저 소비와 유행, 유흥의 대상이 되었다. 야식으로 족발, 간식으로 치킨을 먹으면서 당장은 아프지 않으니 이게 뭐가 문제인지 인식하지 못한다. 그러나 몸은 서서히 죽어간다. 그 음식 안에 담긴 무자비한 죽음들과 함께 말이다. 


우리의 몸은 매일 스스로를 재구성한다. 우리가 먹는 것이 곧 오늘의 내가 된다. 생명체가 자기 자신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외부로부터 얻은 에너지로 몸을 새롭게 만들고 채워 나가야 한다. 그런데 자영업자의 노동, 배달 기사의 노동, 농부의 노동, 제3세계의 노동을 집에서 버튼 하나로 부려먹는 음식을 먹으면서 내가 온전하길 바라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축산 공장과 식물 공장에서 생산되어 공장에서 가공된 식품을 먹고도 생명이길 바라는 것또한 과욕이다. 




3. 죽임의 식탁을 살림의 식탁으로!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할까. 우선은 식탁이 달라져야 한다. 죽임의 밥상을 차리는 대신 나를 살리고 내 식구들을 살리는 음식으로 바꾸어야 한다. 자연 그대로의 재료만을 사용해 간소하게 만든 요리가 그 답이 될 수 있다. 

그냥 간소하게 찐 단호박과 납작하게 눌러 구운 감자다. 간장은 콩과 소금만을 사용한 재래식 간장이다. 이렇게만 먹어도 건강하고 맛있게 먹을 수 있다. 자연 그대로가 차려주는 음식이다. 재료도 가능한 로컬푸드를 이용하면 좋다. 먼 곳에서 생산된 먹거리대신 지역의 생산자가 자기 이름을 걸고 생산하는 먹거리를 이용하면 먹는 사람도 생산하는 사람도 상생할 수 있다. 



삼계탕 대신 순두부로 국밥을 끓여 먹을 수도 있고, 햄과 어묵을 넣는 대신 마늘쫑이나 나물 반찬을 넣어 자연식 김밥을 만들 수도 있다. 같은 동물의 죽음을 피하고도 얼마든지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것은 가능하다.  



여기에서 그칠 것이 아니라 우리는 궁극적으로 탈-소비자가 되어야 한다. 사실 인간이라는 무궁무진한 존재를 단순히 소비자로 일축시키는 지금의 사회는 인류에게 굉장한 무례를 범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인간은 단순히 소비하는 존재가 아니다. 인간은 창조하는 주체적 존재다. 지난 인류의 역사에서 이 "창조"는 자연과 함께 이루어졌다. 노래하고 춤을 추고, 제사를 지내며 식량을 자급해 왔던 인류는 자기 삶의 소비자가 아니라 창조자였다. 사실 소비 consume의 어원은 소모성 질환인 결핵 consumption 에서 나왔다. 소비란 즉, 삶을 갉아먹는 행위인 것이다. 자기 생명을 갉아먹고, 생명의 터전을 갉아먹는 행위이다. 인류가 자기 삶의 창조적 생산자에서 소비자로 전락한 그 순간부터 우리는 삶을 고된 임금 노동에 바치며 스스로를 갉아 먹었다. 식민 지배로 타자의 고통을 갉아 먹었으며, 문명이라는 이름으로 대지와 바다를 갉아먹었다. 


소비자라는 단편적인 존재에서 벗어나야 한다. 공동 생산의 주체로 나아가야 한다. 도농 교류를 통해 생산지와 가까워져야 한다. 언니네 텃밭의 유기농 꾸러미를 구독하는 등 공동체 지원 농업(CSA)에도 힘을 실어줄 수 있다. 마트 대신 생협의 생활재를 이용하는 것도 나름의 방법이 될 수 있겠다. 최근엔 농사펀드나 참여형 농업 등으로 직접 모내기를 체험하고 길러낸 쌀을 받을 수 있는 방식도 생겨나고 있다. 이러한 방법들은 전부 목적지가 아니라 경유지다. 목적지는 다시 생산 공동체를 삶의 터전 안으로 들여오는 것이다. 마을 안에서 커뮤니티 텃밭을 함께 관리하고, 공유 부엌을 만드는 방법이 있다. 정원수를 오디나 뽕나무, 돌배나무, 보리수 등 식용 가능하면서도 관상으로 좋은 것들로 구성해도 좋다. 


앞으로의 인류는 요기요 버튼 하나로 "소비"하며 생명을 좀먹는 대신, 스스로의 끼니를 직접 창조할 수 있어야 한다. 그 창조는 인간의, 인간에 의한, 인간만을 위한 인위가 아니라 자연-타자와의 소통이어야 할 것이다. 지금껏 모든 생명체가 그렇게 삶을 지속해 왔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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