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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슬 Sep 24. 2024

맛있는 게 좋아서

기후 운동을 한다

난 맛있는 음식이 좋다. 요즘 같은 시대에 맛있는 음식이라 하면 마라탕, 치킨, 피자, 엽떡, 케이크 등등 기분 내고 싶을 때 사 먹는 배달 음식이나 디저트를 떠올릴 텐데 내가 말하는 건 그게 아니다.


제철에 나는 예쁜 자두, 새콤달콤한 황금 사과, 가을이 되면 나오는 팍팍한 밤고구마, 포슬포슬 분 나는 여름 감자, 향긋하고 쌉쌀한 나물 등. 우리가 인지하지 못하지만 우리의 기본적인 영양소를 고루 갖출 수 있게 해주는 자연의 식재료. 내가 말하는 맛있는 음식이란 이런 것들이다. 나는 자연이 선물해주는 다양한 잎과 열매와 뿌리와 줄기들을 사랑한다.


과일, 샐러드, 각종 나물

밤고구마

두부김치와 찰옥수수

시래기 영양밥과 직접 달인 맛간장



재료 자체가 다양하고 신선하고 맛있어야 무엇을 만들어도, 어떻게 먹어도 맛있어진다. 일본에서 지내는 동안 맛있는 식재료가 얼마나 중요한 건지 크게 느꼈다. 매일 비슷한 채소, 익숙치 않은 맛, 밍밍한 채소의 향에 크게 실망했다. 비싸디 비싼 과일 값에 과일 한 번 제대로 사 먹질 못하니 얼마나 괴롭던지. 식단은 단조로워졌고 영양은 편중되어 갔다. 우리의 건강과 맛의 즐거움을 유지해주는 건 모두 재료다. 그렇다. 같은 요리도 어떤 재료를 쓰는지에 따라 달라진다. 맛의 기본, 먹거리의 기본은 결국 "농산물"이다.   



요리와 점점 멀어지고, 포장된 완제품을 사먹는 데에 익숙해진 사람들은 자연에서 다양한 먹거리가 나오는 게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잊었다. 밀이 자라지 않으면 케이크도 없고, 감자가 자라지 않으면 웨지감자도 없다. 미역이 녹아 사라지면 미역국도 못 먹게 된다. 내가 해외에서 돌고 돌다 한국에 돌아오게 된 건 다름이 아니라 한국의 식생이 다양하고 풍부하기 때문이다. 철마다 나오는 여러가지 과일에 바다에선 해초, 산에서는 산나물, 들에서는 들나물, 밭에서는 채소와 구황작물, 논에서는 벼가 자라 다채로운 밥상을 만들 수 있다. 해외에서는 이렇게 다양한 재료를 사용하지 않는다. 한국의 풍부한 식생과 다양한 조리법, 음식만큼은 마음에 든다. 이것들이 나에겐 너무 소중하다. 잃고 싶지 않다.



우리가 먹고 있는 것들은 결국 다 자연에서 온다. 사람들이 이제 음식을 마트에 가면 늘 생산되어 판매 중인 것, 끊임 없이 공급되는 것, 저절로 솟아 나는 것, 그래서 어떤 일이 있더라도 돈만 있다면 먹을 수 있는 것 정도로 여기는 듯 하다.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자연이 지금같지 않으면 식생도 지금 같지 않아진다. 당장 이번 달도 남부 지역에서 폭우로 침수 피해를 입어 농부들이 아무것도 수확할 수 없게 됐다. 지구가 점점 뜨거워지면 바다에서 사는 해초들도 녹아내린다. 해초를 먹고 사는 어패류도 굶어 죽는다. 폭염으로 농작물이 말라 죽거나 추위로 얼어 죽는다. 동식물이 죽어버리면 우리는 아무것도 먹을 수 없어진다. 


"기후 위기? 알 바 아니야! 어차피 죽을 거 그냥 오늘 치킨이나 사 먹고 말겠어" 라는 식의 냉소 주의는 하나도 도움 되지 않는다. 기후위기로 인한 죽음은 어느 날 갑자기 돌연사로 찾아 오는 게 아니라 꺼내 둔 물티슈 마르듯이 서서히 목숨을 앗아간다. 오늘을 함부로 살면 내일의 내가 배를 곪는 식인 거다. 당장은 치킨 배달 시켜 먹고, 모카 초코 케이크 사 먹는 게 행복일지 몰라도 미래의 내가  생일에 미역국을 먹지 못할 수도 있다. 배고플 때 냉장고를 털어 비빔밥 만들 반찬조차 구하지 못하게 될 수도 있다. 마트에 돈을 들고 가도 시금치 한 단, 배추 한 포기 겨우 구해 연명해야 할지도 모른다. 양질의 영양이 필요할 때 건강한 음식을 먹지 못해 죽어갈 수도 있다.


결국 기후 위기를 방치하는 것, 가속시키는 것은 자살 행위다. 나 아사하고 싶어요, 동네방네 떠드는 격이나 다름없다. 기후 위기에 대한 대응은 도덕적 의무나 선진 시민 의식을 가져야만 할 수 있는 "교양"이 아니다. 살고 싶은 자의 몸부림이다. 맛있는 걸 먹는 게 삶의 낙이라면 기후 위기에 더더욱 저항해야 한다. 지구가 이상해지는 걸 내버려 두었다간 서서히 먹을 수 있는 것들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배추 값이 금 값이 되고, 사과 값이 금 값이 되는 걸 우린 이미 봐왔다. 이제는 배추나 사과에서 그치지 않을 것이다. 겨울이 오지 않으면 시금치는 영원히 식탁에서 사라지고 월동무는 역사 속 채소가 될 것이다.


고기는 사시사철 나오니까 고기 사 먹으면 되지, 라고 생각한다면 그 또한 오산이다. 사시사철 동물이 죽어 나가고 있다는 것도 소름끼칠 일이다. 매일 셀 수 없는 목숨들이 제 명을 다하기도 전에 살해당한다. 고기를 끊임없이 공급할 수 있게 해주는 공장식 축산업은 지구 가열의 주범이다. 여기에 돈을 주고 소비하는 행위는 "나를 좀 죽여주세요"라고 말하는 거나 다름 없다. 몸이 망가지기 전에 죽는다면 사인은 열사병이 될테고, 몸이 망가져서 죽는다면 사인은 고혈압, 당뇨, 고지혈증 등 만성 대사증후군이 될 것이다. 어쩌면 사인을 판별할 수도 없어질지 모른다. 자연재해로 인해 실종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으니.




나는 이 땅에서 사과가 사라지는 게 싫다. 더이상 미역이나 다시마가 잡히지 않는 것도 싫다. 다양하고 맛있는 재료가 나는 땅에 자랐으니 이 천혜의 자연을 마음껏 누리고 싶다. 난 아주 맛있는 음식을 영원히 먹고 싶다. 내가 기후 위기를 심각히 여기고 외면하지 말아야 한다 목소리를 내는 이유는 내가 이타적이고 도덕적인 사람이어서가 아니다. 맛있는 걸 먹고 싶다는 매우 원초적이고 이기적인 욕구 때문이다.


그러니 먹는 걸 좋아한다면, 이기적인 사람이라면, 건강한 음식을 먹으며 살고 싶다면 누구라도 기후 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그냥 굶어 죽지 않고 싶다면 해야 한다. 살고 싶다면 해야 한다. 지구를 지킨다는 대의 명분 같은 건 필요하지 않다. 사람들은 말한다. "넌 정말 대단하다, 난 이기적이라 못해." 이기적이라 못한다고? 오히려 이기적인 당신이야말로 기후 운동하기에 적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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