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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웅섭 Apr 25. 2023

구병산 자락, 마을과 마을을 잇는 길

속리산둘레길 1코스 (임곡리 - 장안안내소, 14.2km)

 속리산 둘레길, 이름부터 예사롭지 않다. 풍속 속(俗)에 떠날 리(離)이면 '속세, 즉 사람 세상을 떠난다'는 뜻인데, 사람끼리 모여사는 존재인 사람이 어떻게 속세를 떠날 수 있다는 말인가? 사람 사는 세상에서 부대끼며 살다 보니 사람을 떠나 자연 속으로, 혹은 부처님 세상으로 떠나고 싶다는 뜻이겠으나 사실 그것은 떠날 수 없는 인간이 상상으로 만들어 낸 헛된 희망의 다른 표현이리라. 그렇다고 좁은 일상의 틀에서 한평생 갇혀 애면글면 살 수만은 없는 노릇이니 어쩌랴, 속리산 둘레길을 걸으며 속세를 떠나는 기분만이라도 느껴볼 참이다.


 속리산 둘레길의 첫 시작은 충북 보은군 마로면 임곡리다. 자가용을 가지고 오는 사람은 속리산 IC에서 15분 만에 닿을 수 있고, 도착지인 장안안내소에 주차를 한 사람은 하루 세 번 다니는 보은 시내버스로 종점인 임곡리 마을회관에 갈 수 있다. (장안안내소 주차 후 200m 걸어서 장안 농협 앞에서 버스탑승. 08;05, 12;05, 16;05) 임곡리에 들어서면 우선 멋들어진 둥구나무가 여행자를 반긴다. 수령 350년의 느티나무로 보은군의 보호수다. 길 오른편에서 하늘을 배경으로 날개를 활짝 펴고 서 있는 모습이 당당하면서도 단아하다. 오래되어 거무티티해진 나무 등걸과 파릇파릇 돋아난 새 잎들이 묘한 대비를 이루어 서로의 아름다움을 더해준다. 

 


 


임곡리는 진주 강 씨 집성촌인 윗말과, 인동 장 씨 집성마을인 아랫말로 이루어져 있으며 한때는 170여 호를 자랑하는 커다란 마을이었단다. 그러나 지금은 모두 20여 호가 남아 마을을 지키고 있을 뿐이다. 잠시 발품을 팔아 윗말로 이르면 비교적 양호한 모양새를 유지하고 있는 담배 건조실과 오래된 흙집 하나를 만날 수 있다. 흙벽에 바른 양회가 군데군데 갈라지고 떨어지긴 했으나 창호지가 제대로 발리어진 문은 호미로 빗장 걸린 채 굳건히 입을 다물고 있고, 부엌문에는 '반공, 방첩'이라는 녹슨 명패가 세월의 두께를 뒤집어쓴 채  단단하게 붙어 있다. 어쩌면 수십 년간 혼자서 시간을 버티어내고 있는 토담집을 보니 마치 나의 유년시절의 한 순간이 혼자서 외롭게 버티고 있는 듯, 애처롭고도 반갑다.  2-30년 전만 해도 흔했지만 이제는 거의 만나기 힘든 풍경들이니 잠시 들러서 사진과 마음에 담는 것도 좋겠다.


 그러나 정작 임곡리에서 주목할 만한 얘기는 따로 있다. 바로 분단마을이라는 것이다. 물론 남북의 분단마을이 아니라 충청북도와 경상북도의 경계, 분단마을이다. 마을 한가운데를 흐르는 조그마한 실개천을 경계로 한쪽은 경상북도 상주시 화남면이요, 반대쪽은 충청북도 보은군 마로면이다.  따라서 크지도 않은 마을에 이장도 두 명, 부녀회장도 두 명, 마을회관도 두 개다. 버스도 보은과 상주에서 각각 하루 세 번씩 들어온다. (그러나 예전에는 관기 장을 보러 다녔다니 생활권은 보은으로 보는 것이 맞을 듯싶다.) 재미있는 것은 이뿐이 아니다. 같은 마을에서도 충북이냐 경북이냐를 두고 학교가 갈라졌다. 처음에는 모두들 관기국민학교를 다니다가 60년대의 어느 시기에 경북 화남면에 평원초등학교가 생기면서 같은 마을 동무들이 이산가족이 되었단다. 분단마을 주민으로서 불편함도 많을 만 한데, 정작 살아온 주민들은 개의치 않는 분위기다. 뭐, 좀 불편하기는 하지만 한 마을 주민으로 살아가는데 문제는 없다는 식이다. 아무리 도가 달라도 그 이유로 편을 가르거나 경쟁하는 일이 없이 한 식구로 살아왔다는 말이다.


 시작 지점인 마을회관(경상북도 마을회관이다)을 떠나 개울가 도로를 따라 마을길을 걷는다. 걷고 있는 길은 경북이요, 몇 걸음 걸어 개울을 건너면 충북이다. 조금 걷다 보면 연화사라고 써 놓은 삐뚤삐뚤한 글씨를 따라 골목길로 접어들고, 곧이어 말목재라는 이정표와 안내판이 나타난다. 사연을 읽어본다. 말목재는 말의 목을 닮아 붙여진 이름이며 예로부터 임곡리 사람들이 보은을 드나드는 주요 교통로였단다. 지금은 둘레꾼이 가끔 지날 뿐, 풀과 꽃과 나무들이 주인인 세상이 되어 버렸다. 그 자연의 길을 따라 숲의 세계로 접어든다. 알 수 없는 꽃향기가 감도는 듯, 주위를 둘러보니 자그만 분꽃나무 꽃이 앙증맞은 얼굴로 인사를 하고, 무성하게 나무를 뒤덮고 있는 덤불사이에는 으름꽃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다. 달착지근한 꽃 향기는 바로 이 녀석의 것이로구나 싶다. 길은 과하지 않을 정도로 잘 정비되어 있다. 배수로와 돌계단도 소박하게 설치되어 있고 예초작업도  이루어진 것 같아서 편안하게 걸을 수 있다. 나는 지금 혼자 걷지만 누군가의 보살핌 속에서 걷는다는 느낌, 이토록 한적한 길도 누군가가 정성을 들여 관리하고 있다는 사실이 고맙다.

왼쪽으로는 잡초 같은 풀들이 가득인데 모두 작고 하얀 꽃들을 머리에 이고 있다. 자세히 보니 그냥 야산이 아니라 묵은 논, 혹은 밭인 듯싶다. 사람들이 떠나고 수십 년이 흘러 이제는 제법 굵어진 나무들과 잡초들이 주인행세를 하고 있는데 올해의 주인은 바로 이 녀석인 모양이다. 무슨 풀인가 싶어서 검색을 해보니 '미나리냉이'란다. '미나리'면 미나리고 '냉이'면 냉이지 '미나리냉이'는 뭘까, 잎을 하나 따서 씹어보니 뒷맛에 살짝 매큼함이 올라온다. 



 갑자기 사람들의 왁자지껄한 소리가 숲의 고요를 깨운다. 7-8명의 사람들이 고갯길을 걸어 올라오며 내는 소리인데 모두들 톤이 높은 경쾌한 목소리다. 가까이 다가서 보니 60대 중후반으로 보이는 분들인데 농사꾼도 둘레꾼도 아닌 것이 정체가 모호하다. 인사를 건네고 둘레꾼이냐고 물으니 임곡리 출신 출향민들이란다. 일 년에 한 번씩 모임을 하기 위해 고향마을인 임곡리에 모였고 학교 다니던 등굣길인 이 말목재를 추억 삼아 걷고 있단다. 어쩐지 말소리가 높고 경쾌하더니만, 나이 든 초등학생들이었던 것이다. 말목재에 관한 추억들이라도 듣고 싶었지만 너무 오래 잡아두면 결례일 듯하여 인사를 건네고 돌아섰다.


 

말목재를 내려서면 작은 잠수교가 앙증맞게 놓여있다. 이름이 세월교라는데 아마도 물이 넘는다는 의미의 수월(水越) 교가 변해서 된 이름인가 싶다. 그러나 작은 세월교를 금방 건널 수는 없다. 이정표를 덮을 듯 뻗어 내린 으름꽃 덤불이 그냥 지나치지 말라고 발목을 잡기 때문이다. 지나는 이도 드문 길이고 보니 그 청을 거절할 수도 없다. 잠시 꽃 덤불 앞에 발길을 세운다. 


 우거진 잎새들에 숨어서 조롱조롱 땅을 보고 매달린 으름꽃들은 마치 태양과 남의 시선이 부끄러워 숨은 것처럼, 동글동글 보랏빛 꽃잎들은 여인의 몸매처럼 비밀스럽고 요염하기까지 하다. 이렇게 크고 아름다운 꽃들이 원예종이 아니라  야생화로 저절로 피었다는 사실이, 그리고 마침 둘레길 바로 옆이라는 사실이 놀랍고 감사하다.


이제부터 적암리까지는 탁 트인 뚝방길과 논 사이로 걷는다. 단조롭기는 하지만 심심하지는 않다. 바로 오른쪽에 품을 활짝 벌린 구병산이 있기 때문이다. 아홉 개의 병풍을 닮았다고 해서 이름 붙여진 구병산, 비록 규모는 속리산에 비해 작지만 산의 풍광과 기운은 만만치 않은 명산이다. '기운이 만만치 않다'라는 표현이 다소 거부감을 줄 수 있는 표현임을 모르는 바는 아니다. 그러나 고속도로로 상주를 오가다가 늘 이곳 부근만 지나면 세상이 환해지는 느낌을 받았는데 아무리 생각해 봐도 구병산 말고 다른 이유가 없으니 그리 말하는 것이다. 어쨌거나 그 '구병산의 품 안에서 마을과 마을을 따라 옛길을 걷는 것'이 바로 속리산둘레길 1코스라고 말할 수 있다.


 

임곡리를 떠난 지 40여 분 만에 만나는 첫 번째 동네가 적암리다. 구병산의 품 안에 바로 안겨 있으며 앞에는 시루봉이 볼록 솟아서 눈길을 끈다. 구병산 등산객들이 주로 찾는 코스의 출발점이며 보은의 드론교육장, 속리산휴게소가 마을 끝에 자리 잡고 있다. 여차하면 쪽문을 통해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밥을 사 먹고 걸어 나올 수도 있어서 편리하고도 재미있다. 마을 이름을 보자면 붉은 바위가 많은가 싶은데 정작 붉은 바위는 보이지 않고 마을 유래비에도 십승지와 의병장 조헌 이야기만 기록되어 있을 뿐, 붉은 바위에 관한 이야기는 없다. 향토사학자인 양화용 선생의 설명에 따르면  임진왜란 때 이명백 장군과 의병들의 피가 바위를 물들여서 적암이라 불렸단다. 그저 붉은색 바위 몇 개로 붙은 지명이 아니었다는 말이다. 둘레길을 따라 동네입구에 들어서니 쟁기질 한 빈 밭에 비닐멀칭이 씌워져 있고 바위 위에는 녹슨 호미가 하나 걸려 있다. 주인이 잊은 것이 아니라 잠시 걸어놓은 것이길, 둘레길을 걸으니 별것 아닌 작은 사물들도 마음에 들어오나 보다.


적암리에서 다음 마을인 갈평리로 가기 위해서는 고속도로 지하도를 건너 잠시 숲길로 들어서야 한다. 숲은 주로 신갈나무와 떡갈나무 군락이 많으며 군데군데 소나무와 다른 잡목들이 혼재되어 있다.  경사가 가파른 곳에는 예쁜 돌계단이 놓여 있다. 보통 등산을 하는 사람들은 무릎이 아프다는 이유로 계단을 피해서 걷는 경우가 많지만, 이곳의 계단은 그리 높지 않아 부담이 없다. 더구나 계단을 피해서 걸을 경우 길이 넓어지고 숲이 파손될 염려가 있으니 꼭 돌계단을 이용할 것을 권한다. 숲길을 따라 정상에 다다르면 예쁘장한 나무벤치와 쉼터가 나타나고 조금 더 내려오면 갈평마을로 통하는 곧은 농로가 나타난다. 이제부터가 세 번째 마을, 갈평리다.


갈평리. 평이라는 뜻은 평지라 많다는 뜻이리라. 실제로 구병산 자락임에도 불구하고 갈평리는 넓은 들판, 아니 평야를 품고 있다. 그런데 갈은 무엇일까? 마을 유래비를 살펴보니 역시나 칡이 많은 동네라서 갈평이라 불리었단다. 갈평리에도 둥구나무가 있다. 다만 임곡리나 적암리와는 다르게 마을 입구가 아니라 마을의 가운데, 마을회관 옆에 , 한 그루가 아니라 두 그루가 나란히 서 있어서 외롭지 않겠다 싶다. 새끼줄로 금줄을 쳐 놓은 것으로 보아 아직도 사람들이 이곳에서 동제를 지내는가 보다. 둥구나무가 그냥 나무가 아니라 사람들의 마음속에 수호신으로, 가까운 친구로 그렇게 살아있다는 말이다. 웬만한 신화와 전설이 물질문명과 할리우드 영화에 밀려 빛을 잃은 세상이니, 아직도 사람들 마음에 살아있는 갈평리의 느티나무는 그 이유 하나만으로도 행복한 생을 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구불구불, 정겨운 흙벽과 돌담을 지나고 마을길을 벗어나니 또 다른 숲길이 다가선다. 이름하여 갈평숲길이다. 그런데 숲길로 들어서니 다락논이 보인다. 보통 논은 물이 많아야 하니 평지에 있기 마련인데, 아마도 샘이 나는 곳이기에 사람들이 논을 풀었겠다 싶다. 그런데 마음을 끄는 표지판 하나가 있다. 낡은 합판 위에 굵은 글씨로 호소문 하나가 써져 있는데 사유재산이니 두릅과 머위를 따가지 말아 달라는 내용이다. 인적 드문 둘레길 바로 옆에 서 있는 두릅나무를 사람들이 더러 손을 대기도 했으리라. 정작 주인은 얻어먹지도 못하고 얼마나 속이 상하고 야속했을까, 그러나 호소문은 그런 속내를 내비치지 않고 정중하게 부탁을 하고 있다. 다행히 두릅 순들이 쇠어서 더 이상 사람들이 손대지는 않을 듯싶지만, 둘레꾼인 내가 괜히 죄송스럽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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