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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웅섭 Sep 10. 2023

여름 오후


 달콤한 낮잠을 한 시간쯤 자고 눈을 뜨니 오후 5시. 이제 슬슬 움직일 시간이다. 여름 햇살이 얼마나 강한지 숨이 턱턱 막힐 지경이니 이 시간이 돼서야 오후일과가 시작된다. 오늘은 무얼 할까? 미룬지 한 달이 다 된 창고정리에 테이블도 짜야하고 깻모도 좀 더 심어야하고 부쩍 자란 풀도 뽑아야하고..... 당장 할 일만해도 수두룩하다. 다행이다. 할 일이 많다는 건 선택할 자유가 많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잠시 행복한 고민 끝에 오늘은 밭둑에 개망초를 베어내기로 했다. 지난 가을 밭둑에 구절초 씨를 뿌렸는데 정작 구절초는 세를 뻗지 못하고 엉뚱한 개망초가 온통 군락을 이루었다. 이놈들도 이름과는 달리 하얀 꽃들이 제법 볼만하긴 하지만 어쨌든 불청객은 불청객, 씨를 뿌리기전에 베어버려 후환을 없앨 작정이다.

 왜낫을 갈아들고 둑에 올라섰다. 내 키를 훌쩍 넘어선 개망초가 낫질에 시원시원 베어진다. 머리위로 노랗게 쏟아지는 꽃가루도 나름 운치 있거니와 이렇게 키 큰 놈들이 쉽게 베어지는 것도 재미있다. 아내는 들깨를 더 심을 요량으로 풀을 뽑기 시작했다. 혹시나 팔이 아프기라도 할까 만류해보지만, 아직 비온 땅이 덜 굳어서 힘들지 않다고 강조하는 걸 보면 제법 재미가 있나보다. 하긴 나도 풀 베는 게 재미있는데 아내라고 다를까.



똑같은 일을 반복하는 것에는 나름대로 요령이 있다. 일의 양을 미리 정하지 않고 시간을 정하는 것이다. 일을 얼마만큼 해야겠다고 생각하는 순간 욕심에 온몸이 긴장하기 쉽고 그만큼 쉽게 지치게 된다. 잠시 급한 마음에 나부대다가 제풀에 지쳐버리는 거다. 반대로 시간을 정하고 일을 하면 굳이 욕심을 낼 필요도 없고 많은 작업량에 미리 기죽을 일도 없다. 그냥 순간순간을 즐기면서 뚜벅뚜벅하다보면 일은 저절로 되어가는 법이다.


어느새 숨이 거칠어지고 온 몸이 땀에 젖는다. 긴 소매를 입었건만 여기저기에 환삼 덩굴이 붉은 상처를 남겼다. 덥고 힘들고 지루한 노동이다. 그런데 이런 노동 속에는 쾌락과도 같은 묘한 매력이 있다. 우선 하루 종일 재잘재잘 끊임없이 떠들어대던 내 의식이 조용히 잦아든다. 풀과 낫질소리와 거친 숨소리와 함께 내면의 고요가 찾아오는 것이다. 오른팔이 아프고 뒷다리가 땅기고 눈에 땀이 들어가고...... 시시각각 변하는 내 몸의 반응을 살피는 것도 재미가 쏠쏠하다.


 그런데 갑자기 나의 즐거움을 방해하는 녀석이 나타났다. 붕- 하는 낮은 저음에 빠르고 불규칙한 비행을 하는 괴물 같은 녀석. 며칠 전에는 땅벌인 줄 알고 나를 도망치게 만든 그 녀석이다. 내 주위를 계속 맴돌면서 기회를 노리는 것으로 봐서 나를 대상으로 보급투쟁을 벌이려는 게 분명하다. 청바지에 잠시 착륙한 모습을 보니 큼직한 등에, 쇠파리다. 물리지 않으려고 가능하면 몸을 크게 움직이고 가끔 풀을 흔들어 대며 녀석을 교란시킨다.


  어느 순간 등이 따끔하다. 아차, 방심하는 사이에 등을 내준 것이다. 이 빠르고 정신없는 녀석을 잡기 위해서는 작전이 필요하다. 움직이지 않고 다리를 내어주니 아무 의심 없이 착륙, 순간 번개 같은 속도로 쳐서 잡았다. 단 한 번의 식사 값으로는 좀 가혹했나 싶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다. 그런데 가만 생각해보니 이 등에도 꼭 나의 평화로움에 훼방꾼만은 아니다. 행복한 스토리의 영화에도 크고 작은 긴장과 갈등은 꼭 있는 법, 약간의 긴장은 평화에 도움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풀을 베다가 등에에 물리고 도망가고 잡고 하는 약간의 스릴과 의외성은 어쩜 평화로운 여름 저녁나절의 그림에 너무나 잘 어울리는, 꼭 필요한 풍경일 것도 같다.

어둑해질 무렵 동네 아주머니가 깻순을 한 아름 베어오셨다. 모종 부은 것이 워낙 많이 남았단다. 야들야들한 어린 깻순은 보드랍고도 향기롭다. 저녁이 늦어져서일까. 깻순을 다듬으면서도 자꾸만 침이 넘어 간다. 아내가 깻순에 양파를 썰어 넣고 심심하게 데쳐 볶았다. 향기롭다. 라디오에서는 첼로연주가 흐르고 창밖으로는 어둠이 내려앉았다. 평화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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