론세스바예스 - 수비리
순례자의 아침은 부산하기 짝이 없다. 일단 아침 8시에 모두 정리하고 숙소를 나서야 한다. 그전에 대충 씻고 화장실 가고 아침밥 먹고 우리 부부처럼 짐을 부칠 사람들은 배낭에 택을 붙여서 정해진 장소에 가져다 놓아야 하니 늦어도 6시 반에는 일어나야 한다. 10월 하순 스페인의 아침 8시는 아직 해가 뜨기 전, 혹은 막 뜰 무렵이라서 결국 깜깜한 새벽에 일어나서 부산을 떨어야 한다는 말이다. 더구나 눈을 떠보니 어둠 속에 비가 내린다. 촉촉이 내리는 가을비가 아니라 제법 주룩주룩 내리는 장맛비다.
어둠이 채 가시지 않은 이른 아침, 빗속에 순례 2일 차를 시작한다. 론세스바예스에서 수비리는 23km 구간으로 한 번의 오르막을 빼고는 거의 내리막길, 어렵지 않은 코스다. 처음에는 작은 나무들 사이의 숲길, 조금 지나니 작은 개울을 따라 오솔길이 이어진다. 다행히 비는 그치고 날도 밝아졌다. 다른 순례자들이 심심치 않을 정도로 눈에 띈다. 부지런하고 걸음 빠른 그룹들은 이미 멀리 앞서가고 우리 부부처럼 게으른 순례자들이다. 우리 부부는 당연히 게으르면서도 늑장 부리는 그룹에 속한다. 천천히 느릿느릿 걷고, 처음 보는 식물이나 오래된 건물이 보이면 이리저리 살펴보고, 주민이라도 만나면 한두 마디 인사말이라도 건네고야 만다. 평생 바쁘게, 남에게 뒤지지 않으려고 종종걸음으로 살아왔지만, 이제부터는 그럴 필요가 없다. 아무렴, 가진 게 시간뿐인 백수 아닌가?
까미노가 문득 특별한 의미로 다가온 것은 바로 여유를 부리며 천천히 걷던 중이었다. 크지도 않은 개울을 건너는데 돌다리가 놓아 있다. 돌을 군데군데 던져놓은 징검다리가 아니라 제법 큰 돌로 교각을 만들고 그 위에 길쭉한 돌로 상판을 만들어 얹은 제대로 된 형태의 돌다리다. 색깔과 생김새로 봐서는 최소한 몇 백 년 전에 만든 듯싶다. 현대 장비가 없으니 저 무거운 돌들을 마을 사람들과 당나귀들이 낑낑대며 끌고 와서 만들었겠지, 그런데 이 한적한 오솔길의 저 다리는 누굴 위해 놓았을까?
스페인은 땅이 넓다. 집들은 각자의 농토에 흩어져 있지 않고 마을에 성당을 중심으로 다닥다닥 모여 있다. 그렇다면 농민들은 우리나라처럼 지게에 등짐을 지는 게 아니라, 말이 끄는 수레에 농작물을 날랐을 것이다. 사람이 한 명씩 건너야 하는 저 돌다리는 주민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순례자를 위한 다리겠다는 판단이 서는 이유다.
1000년 전, 혹은 500년 전의 광경을 상상해 본다. 당시의 순례자들이 어떤 모습이었는지는 모르지만 아마도 충분한 노잣돈을 지닌 럭셔리한 여행은 아니었을 것이다. 추위를 막을 모자가 달린 커다란 망토에 몸을 지탱할 지팡이, 남루한 한 두 벌의 옷과 빵을 넣은 배낭, 발가락이 튀어나오는 허름한 신발을 신었으리라. 그런 차림으로 독일에서, 프랑스에서, 혹은 북유럽에서 출발해서 이곳을 지나갔으리라. 배고픈 순례자들은 구걸도 했을 것이고 혹은 남의 농작물이나 생필품들을 훔치기도 했겠지. 지쳐서 아무 데서나 자거나 병들어 죽는 경우는 없었을까? 말은 순례자라지만 주민들의 눈으로 보면 달갑지 않은 불청객들, 한 마디로 거지 떼로 보였을 것이다. 그런 순례자들을 막거나 쫓아내지 않고 오히려 그들의 발이 젖을까 봐 힘들게 돌다리를 놓아준 스페인 사람들, 아니 그들의 조상들에게 문득 고개가 숙여졌다.
‘감사합니다. 당신들 덕분에 오늘 우리 부부와 수많은 순례자들이
아름다운 길을 편안하게 걷습니다.’
순례자들을 위한 배려는 이것만이 아니다. 길을 걷다 보면 스페인 사람들이 순례자들을 위해서 얼마나 세심한 배려를 하고 있는지 금방 느낄 수 있다. 우선 곳곳에 길을 잃지 않도록 표지판이나 표지석을 세워놓거나 돌멩이에 노란 화살표, 혹은 순례의 상징인 가리비로 길을 표시해 놓았다. 거기에 친절하게 산티아고까지의 남은 거리를 적어두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이런 표지들은 출발지에서 시작해서 산티아고 성당에 도착할 때까지, 밭두렁 길과 산길과 마을길과 도시의 넓은 인도와 건물의 벽과 전신주를 가리지 않고 빠짐없이 설치돼 있다. 순례자들이 길을 잘못 들지 않도록 딱 필요한 곳에 필요한 만큼. 세심한 배려가 없이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다.
마을에는 군데군데 순례자들을 위한 우물들이 남아있고, 주민들은 자신이 살고 있는 집 문 앞에 순례자를 위한 물병을 놓아두기도 한다. 알베르게 또한 순례자를 위한 편의시설이다. 옛날에는 주로 가톨릭 교구에서 운영했다는데 지금은 가톨릭 교구뿐 아니라 스페인 정부에서도 공립 알베르게를 운영한다. 대부분의 공립 알베르게는 시설이 깨끗하고 편의시설도 나름대로 훌륭하다 (물론 몇 군데 예외는 있었다). 하룻밤 숙박비는 5-10유로, 이익을 보기에는 너무 적은 액수다.
식당에서는 순례자들을 위해서 순례자 메뉴를 준비해두었다. 빵과 샐러드, 메인 스테이크, 간단한 디저트에 와인이나 커피를 곁들인 이 순례자 메뉴는 거의 12유로 선이다. 우리 돈으로 치면 15,000원 정도니까 순댓국 보다 비싸다고 볼 수도 있지만 유럽임을 감안하고 다른 식당들과 비교해보면 감사한 가격이다.
더 재미있는 게 있다. 길을 걷다 보면 길옆으로 다양한 간식거리가 심심찮게 나타난다. 마침 계절이 맞아서인지 모르지만 참으로 다양한 과일들, 간식거리를 만났다. 맨 먼저 눈에 띈 과일은 머루, 누가 봐도 주인 없이 그냥 길가에 달린 녀석이라 아무 생각 없이 따 먹었다. 조금 더 가다 보니 이번에는 진한 보라색의 이름 모를 과일이 눈에 띈다. 땅에 떨어진 놈을 조금 먹어보니 말랑말랑, 달달하니 썩 괜찮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녀석 이름이 이루엘라란다.
사과, 아몬드, 석류, 호두, 복숭아, 무화과, 포도........ 그 뒤로 우리 눈앞에는 여러 종류의 과일들이 잊을 만하면 차례대로 나타나 주었다. 처음에는 주인이 있으려니 싶어서 길에 떨어진 것들만 조금씩 주워 먹었는데 가만히 보니 이건 순례자들을 위한 배려라는 생각이 든다. 첫째 넓은 밀밭이나 올리브 과수원이나 마을길이나 가리지 않고 이런 과일나무들은 순례길 옆으로만 몇 그루씩 심어 있다. 땅에 떨어져 밟히고 썩어도 누가 수확하는 법이 없다. 배고픈 순례자들을 위한 스페인 사람들의 숨은 배려임에 틀림이 없다.
포도밭도 그렇다. 길을 걷다 보면 포도밭이 제법 많은데 유독 길가 쪽으로는 군데군데 수확하지 않은 포도가 까치밥, 아니 순례밥으로 매달려 있다. 나중에 들어보니 순례자들을 도둑으로 만들지 않기 위한 배려란다. 이 말을 듣는 순간 울컥, 눈물이 솟는다.
“그라시아스 아라 까미노”
아르헨티나의 국민가수 메르세데스 소사의 노래 제목, ‘생에 감사해(Gracias a la vida)’가 머리에 떠올라 이렇게 중얼거렸다. 길을 내준 스페인 사람들에게 한 인사말이다. 나중에 번역기를 찾아보니 정확한 스페인어도 아니다. 아무렴 어떠랴? 개떡같이 말해도 찰떡같이 알아듣는다는 데, 문법이 틀렸다고 내 맘을 몰라주기기야 할까? 다시 한번 그라시아스 아라 까미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