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능내역』
능내역, 한때는 중앙선의 역이었으나 복선화 공사가 진행되면서 아쉽게도 2008년에 폐역이 되었다. 사무실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관광 관련 책자나 인터넷 검색을 통해 능내역의 모습을 자주 볼 수 있었다. 고풍스러운 외관 사진과 역에 대한 다양한 찬사를 보며 오래전부터 가보고 싶은 역으로 점찍고 있었다. 기차가 다니지 않은 지 오래지만 아직도 많은 이들이 능내역을 찾고 있다는 사실에 감탄하며 역에 대한 기대를 나날이 키워가던 중이었다.
가을 하늘에 하얀 꽃구름이 피어올라 나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내가 가족들에게 농담 삼아 자주 하는 말이 있다. 날이 화창한데 집에만 콕 틀어박혀 있으면 아름다운 날씨에 대한 모독이라고. 오늘이 바로 그런 날이다. 화사한 가을날을 존중하는 의미에서 나는 오늘도 집을 나선다. 한 번도 가보지 못한 능내역으로. 『빨간 머리 앤』의 앤셜리가 마릴라 아주머니와 매슈 아저씨를 처음 만나러 가는 길처럼 부푼 가슴을 안고서 말이다.
능내역을 너무 오랫동안 가슴속에 담아온 터여서였을까, 아니면 기대가 너무 커서였을까, 조용히 서 있는 능내역을 보며 안타까운 마음이 먼저 들었다. 책자에서 본 능내역에 대한 기사는 모든 것이 좋다는 찬사뿐이었다. 실제로 접한 능내역은 남편을 잃고 혼자서 어린 아이를 키우는 젊은 과수댁의 모습 그대로였다. 머리조차 제대로 틀어 올릴 새 없이 팍팍한 삶을 이어가듯 능내역의 외관이 지치고 피곤해 보였다. 역사 앞에 그대로 놓여있는 철길과 가로등이 운치를 더했지만 이 역시 제대로 된 관리가 이루어지지 않아 사람의 손길이 절실해 보였다.
맞이방 안으로 들어서니 오히려 겉모습이 더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능내역의 역사를 말해주는 평범한 사람들의 사진이 인상적이었지만 이삿짐을 싸느라 어수선한 집에 귀한 예술작품이 벽에 그대로 걸려있는 것처럼 사진이 주는 감동이 반감되었다. 벽면에는 군데군데 스티커 자국이 상처처럼 남아있고, 얼룩덜룩한 오염이 하나둘씩 더해지고 있었다. 워낙 많은 이들에게 알려진 능내역이라서 관리하기 힘들겠지만 오랜 기다림 끝에 마주한 능내역이 좀 더 정결하게 관리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능내역 주변에는 많은 사람으로 붐볐지만 역은 소외된 공간처럼 외롭게 서 있는 듯 느껴졌다. 주변을 한 바퀴 둘러보고 나서야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능내역을 보기 위해 찾아온 사람보다 자전거를 타다가 이곳에서 잠시 쉬어가는 사람들이 훨씬 많았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역이 아니라 역 앞에 있는 유명한 식당으로 사람들의 발길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아무리 폐역이라도 역이 사랑채가 아니라 행랑채처럼 느껴진 것은 이곳, 능내역이 처음이었다. 뭔가 주객(主客)이 뒤바뀐 느낌이 들었다.
아쉽고 안타까운 마음을 뒤로한 채 역사 뒤편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특별한 공간을 찾겠다는 기대보다는 따뜻한 커피 한잔을 마실 수 있는 곳을 찾던 중이었다. 그때 허름한 건물 유리창에 붙은 손글씨의 안내문 하나가 보인다. ‘능내책방, 길 건너 모퉁이’. 그리고는 화살표 하나가 그려져 있다. 설마 이런 곳에 책방이 있겠어, 라고 생각하며 발걸음을 옮긴다. 길을 건너니 올리브를 닮은 녹색의 간판이 보인다. ‘능내책방’. 설마가 현실이 되는 순간의 감동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능내서점이 아니라 능내책방이라서 더 인상적이었던 책방, 역시 내부도 깔끔하다. 문을 연 지 한달 남짓 되었나보다. 책방이 넓지는 않으나 많은 책을 비치하지 않아 모든 것들이 여유로워 보인다. 미래의 책방주인을 꿈꾸는 나에게는 탐방의 공간이기도 하다. 책이 숨 쉬는 공간에 있으니 나의 호흡이 깊어진다.
한 줄의 글은 곧 한 사람의 인생이다. 쉽게 다가가려는 태도도 물론 좋지만, 한 줄의 글을 가슴에 담으려면 아주 긴 사색의 시간이 필요하다. 쉽게 담은 것은 쉽게 달아나기 때문이다. 한 줄의 글이라도 몇 번의 질문을 통해서 그 의미를 다르게 추출할 수 있다면, 그렇게 추출한 의미를 다시 내 삶에 연결할 수 있다면, 그 지식이 필요한 수많은 사람에게 전할 수도 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많은 글과 말이 아니다. 많은 질문과 깊은 사색만이 우리를 자유롭게 한다.
『오십에 시작하는 마음공부』, 김종원 지음, 비즈니스북스, 2023, p44~45.
내 삶을 깊은 사색으로 이끌어줄 책들을 천천히 펼쳐본다. 책방지기의 취향에 따라 진열된 다양한 책들이 나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다. 책방 안의 포근한 기운에 기분이 좋아지고, 한발 한발 조용히 내딛는 걸음걸이에도 여유가 생긴다. 찬찬히 둘러본 후 책 몇 권을 가슴에 안고 계신대 앞에 선다. 먼저 계산을 하고 있는 손님이 있어 줄 서서 기다리며 앞쪽을 바라보니 주인장의 계산하는 모양이 영 서투르다. 역시 초보 주인장이 맞다. 쩔쩔매는 책방지기의 모습에 오히려 신뢰감이 든다. 뭔가를 사고파는 일에 익숙지 않은 사람임이 틀림없다는 생각 때문이다.
“책과 관련 있는 일을 하시는 분이시죠?”
내 차례가 되어 계산할 책을 내밀며 책방지기에게 말을 건넨다. 내로라하는 대형서점마저 버티지 못하고 문을 닫는 요즘 세상에 이런 외진 곳에 작은 서점을 열 수 있는 사람….
“예, 번역일을 하고 있어요.”
역시 내 예상대로다. 어떻게 이런 곳에 서점 낼 생각을 했는지, 오래도록 문을 닫지 않고 버틸 수 있을지 묻고 싶었지만 그저 젊은 책방지기를 열렬히 응원하는 마음을 담아 묵묵히 결제 카드를 내밀었다.
“7만3천8백 원입니다.”
조금 전에 계산을 마친 손님은 10만 원이 넘는 금액을 결제했었다. 10만 원 이상 구매고객에게 에코백을 기념으로 준다며 천연염색을 한 듯한 예쁜 가방에 구매한 책을 넣어 주는 광경을 바로 앞에서 보았다. 내 앞의 손님에게는 가방을 주고 나에게는 주지 않는 게 마음 편치 않았던 지 책방지기는 나에게도 가방을 선물했다. 이런 마음으로 책을 팔아 이윤을 남길 수 있으려나, 고맙기는 했지만 책방지기의 셈할 줄 모르는 마음에 걱정이 앞서는 건 어쩔 수 없다. 능내 서점같은 곳이 경제난을 겪지 않고 오래도록 우리 곁에 머물러 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하다.
서점을 나와 가장 많은 사람이 붐비는 곳으로 간다. 바로 역 앞에 있는 국숫집이다. 많은 이들이 이 국숫집을 찾기 위해 내비게이션을 ‘능내역’으로 검색하지 않았을까, 규모가 크지 않은, 허름한 점포다. 야외에 놓여있는 여러 개의 테이블은 이미 만석이다. 줄지어 차례를 기다리는 이들 속에 섞여 사람들의 식탁을 힐끗거린다. 대부분 국수와 전 종류를 맛있게 먹고 있다. 비빔국수와 잔치국수 사이에서 고민하다가 나는 감자전에 어울릴법한 비빔국수를 마음속으로 찜해둔다.
주 고객이 자전거를 타다가 허기를 달래려는 사람들이어서일까, 국수의 양이 제법 많다. 큰 양푼에 가득 담긴 비빔국수에서 참기름 향이 고소하게 피어난다. 적당하게 매콤하면서도 깔끔한 손맛이 인상적이다. 전통 국수의 맛 그대로다. 갓 구워낸 감자전도 바삭하면서도 부드러워 입맛을 돋운다. 국수 한 그릇에 감자전 하나면 세 사람도 충분히 먹을 수 있는 양이다. 맛도 일품! 양도 푸짐!
햇살 좋은 날, 천천히 달리는 비둘기호를 타고 능내역에서 내려 국수 한 그릇으로 허기를 달래고, 작은 서점 안에서 하루를 보내는, 어떤 날을 상상한다. 노란 가로등 불빛 아래서 집으로 돌아가는 기차를 기다리는 낯선 이의 뒷모습을 그려본다. 능내역, 그리고 능내리…. 안타까움과 아름다움이 뒤섞여 내 가슴속에 낮은 기적소리를 남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