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은역』
‘이거 강역장 맞지? 강역장이 왜 여기에 있나? ㅋㅋ’
오래전, 영주댐 안에 있는 물문화관을 둘러보던 역장님 한 분이 단톡방에 글과 사진을 올렸었다.
‘맞네, 똑 닮았다!’
‘강역장님 맞네요!’
단톡방에 올라온 사진을 본 직원들은 모두 신기하다는 듯 댓글을 달았다. 이 지역에 오래 근무하신 역장님의 모습이었다. 철도 정복을 입고 모자까지 반듯하게 썼다. 보통 전시실에 조형물이나 그림을 제작할 때는 실재인물을 대상으로 하지는 않는 듯한데 물문화관에서는 같이 근무하던 역장님을 볼 수 있어 철도직원들에게 화제가 되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평은역이 사라진 것도, 단톡방의 사진을 보며 모두가 웃었던 기억도 모두 10여 년 전의 일이 되었다.
물문화관은 영주댐이 위치한 내성천과 영주지역의 자연경관을 소개하고 있는 박물관으로 수자원 공사에서 조성했다. 평은역은 영주와 안동 사이에 있던 중앙선의 기차역이었다. 행정구역상 영주시 평은면에 속했으며 2013년에 폐역이 되었다. 2016년, 영주댐에 담수가 시작되면서 그 일대는 모두 물속에 잠기게 되었는데 다행히 사라진 평은역은 영주댐 안에 복원시켜놓았다.
봄볕이 따스한 토요일, 나는 평은역을 만나기 위해 영주댐으로 향한다. 햇살을 받으며 서 있는 벚나무는 꽃망울을 터트릴까 말까 유쾌한 저울질을 한다. 노란 개나리는 어린아이의 눈망울같은 꽃잎을 활짝 열어 나를 바라본다. 모든 꽃이 유난히 더디게 피어 마음을 애태웠는데 나의 조급함을 책망이라도 하듯 꽃들은 예전보다 더 황홀하게 내 앞에 나타난다.
물박물관에 들어서니 데스크를 지키는 직원만 있고, 구경하는 이는 아무도 없다. 토요일 오후인데도 이렇게 사람이 없는데 평일이라고 사람이 넘쳐날 리 없지 않은가. 박물관을 찬찬히 둘러보며 사람들이 찾지 않는 이유를 알 것 같다. 벽면을 가득 채운 글자들. 무언가를 길게 설명해야만 전시관이나 박물관의 역할을 다한다고 여기는 건 아닌지……. 호기심에 들어왔던 사람도 글자가 주는 중압감에 그냥 나가버릴 듯하다. 다른 지역의 전시관이나 박물관을 방문할 때도 무미건조하다고 느껴질 때가 많았다. 때로는 몇 줄의 짧은 시가 긴 설명문이나 논설문보다 사람들의 마음에 강한 인상을 남기는 법인데……. 대중을 위한 각종 전시관이 짧은 글이나 대중의 시선을 끌 수 있는 조형물들로 채워지기를 바란다면 내 욕심인 건가.
영주댐 홍보실이라는 곳에 이르러 비로소 평은역 내부의 모습과 만난다. 매표창구가 제일 먼저 눈에 보인다. 유리창에 붙어 있는 ‘좌석발매 중’, ‘질서를 지킵시다’라는 문구를 보니 아무래도 60~70년대를 소재로 역사 내부를 복원했나 보다. 사무실 안에 걸어놓은 태극기 옆에 ‘파리모기를 없애자’라는 표어도 보인다. 예전에 실제로 역에 그런 표어를 붙여놨는지는 모르겠지만 우리 지역의 기차역에는 파리도 많고, 모기도 많다. 거기에 길고양이와 개는 물론, 뱀도 자주 나타나 직원들을 놀라게 한다. 도심을 벗어나 한적한 곳에 있는 기차역이 각종 곤충과 벌레, 동물들에게도 훌륭한 휴식처가 되나 보다.
매표실을 지키고 있는 강역장님의 모습이 반갑다. 퇴직하신 후에도 사라진 평은역을 지키고 계실 역장님이다. 맞이방에서는 쪽 찐 머리의 할머니가 손자의 코를 풀어주고 있고, 교복을 입은 여고생은 가방을 옆에 두고 기차를 기다린다. 맞이방에서 두 사람이 기다리는 기차는 비둘기호일 것만 같은데 배경 화면에 보이는 기차는 아쉽게도 주황색의 무궁화호다. 손자와 장터로 나가 장을 보려던 할머니도, 학교에 가야 하는 여고생도 비둘기호를 기다리다 평생 아무 열차도 타지 못할 것만 같다. 아무리 생각해도 여고생의 얼굴이 너무 나이 들어 보여 웃는다. 40대의 아줌마가 교복을 입은 모습이라고나 할까. 이왕 만들 거면 생기있고 예쁜 10대의 모습으로 해주었으면 좋았을걸!
전시공간 뒤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니 철길이 놓여있다. 철길 따라 뒹구는 자갈도 이런 곳에서 보게 되니 더 반갑다. 벽면에는 평은역의 모습을 담은 사진들이 걸려있다. 역장님과 퇴직하신 선배님이 함께 찍은 사진 앞에서 잠시 발길을 멈춘다. 어느덧 선배들이 하나, 둘씩 떠나고 이제는 내가 제법 고참이 되었다. 오래도록 같은 직장에서 근무하던 선배들의 이름을 교육일지와 비상 연락망에서 빼버릴 때마다 뜻모를 허전함이 밀려온다. 가슴속에 머물던 서글픔이 물방울 되어 톡톡 터지는 순간이기도 하다.
전시관을 나와 출렁다리를 건너 평은 역사(驛舍)를 보러 간다. 산책코스를 걸으며 나의 미래가 봄날의 새싹처럼 경이로움과 감탄, 그리고 도전과 열정으로 채워져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젊음은 나에게 서러운 방황과 끝없는 열정을 가져다주었다. 반면, 50대의 삶은 적당한 안정감과 여유로움을 베풀었고, 갱년기라는 신체적, 정신적 혼란을 사은품으로 선물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원치 않는 사은품들 때문에 새로운 도전을 꿈꾸는 게 조금은 힘들어졌다. 이제는 도전과 열정을 위해 많은 노력이 필요한 시기가 되었다. 주저앉으려고만 하는 몸과 마음을 내 의지와 노력으로 일으켜 세우며 살아가야 한다.
역사 건물 안에 내부를 복원시켜놓았으면 좋으련만 아쉽게도 평은역은 역사 외부와 내부가 따로 존재한다. 내부는 물문화관 안에, 역사 건물은 댐 안쪽에 만들어 놓았다. 한 시간쯤 후면 해가 진다. 멀리 보이는 산과 온종일 자연을 비춘 태양과 조용히 흐르는 물, 거기에 댐 주변을 언제나 지키고 있는 온갖 나무들이 아름다운 조화를 이룬다. 머지않아 사라져버릴 붉은 해의 모습이 황홀하다. 이때의 해는 강렬함을 잠시 접고, 순수한 아름다움과 평화를 선사한다. 첫사랑의 순간처럼 마음이 설레는 시간이다.
물을 보며, 풀과 나무를 보며 한참을 걸으니 평은역이 보인다. 정말 예쁘게 복원해 놓았는데 바라봐 주는 사람이 없어 안타까울 뿐이다. 역사 건물이 자리 잡은 곳의 경치도 정말 아름답다. 댐 안에 자리 잡고 있으니 그럴 수밖에……. 커피숍이나 북카페를 하면 대박 날 경치다. 게다가 지금은 사라진 평은역이 아닌가. 오래전에 임대공고가 났는데 아무도 맡아 하겠다는 사람이 없는 것 같다. 그도 그럴 것이 차가 못 들어가는 위치다. 걸어서 이곳까지 오기에는 너무 멀다. 사람들이 쉽게 오갈 수 있는 곳에 지어졌다면 더 좋았을 텐데 아쉬움이 남는다.
영주댐이 만들어질 당시 여러 논란이 있었다. 이제 와서 이미 만들어진 댐을 예전의 모습대로 되돌릴 수는 없다. 예쁘게 지어놓은 평은역에 다시 기차가 다닐 수는 없지만 오래전처럼 사람들이 오가는 곳으로 만들 수는 있지 않을까.
‘역장님, 역장님이 평은역의 마지막 역장님이셨어요?’
평은역을 보고 온 다음 날, 나는 강역장님께 카카오톡을 보냈다.
‘아니, 나 아니고 정역장이 마지막이었어.’
전시관에 있는 매표실에도, 사진에도 강역장님이 있길래 당연히 마지막 역장님인 줄 알았는데 몇 년 전 퇴직하신 다른 역장님이 마지막 역장님이라고 한다. 올 6월이면 강역장님도 정년퇴임을 맞는다. 지금은 없어진 철도고등학교를 나와 스무 살 때부터 철도에 근무하신 분이다. 내가 철도에 처음 들어왔을 때 신규자 교육을 해주셨는데……. 고리타분하고 보수적이라고 느꼈던 선배들이 모두 퇴직을 하고 나면 직장에 새로운 활력이 찾아올 것처럼 떠들던 때가 엊그제 같다. 나 역시 보수적이고 ‘나 때는 말이야’를 이야기하는 선배가 되어 직장 언저리를 맴돌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