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역』
오늘은 스무 살 된 아들이 대학 기숙사로 가는 날이다. 누구나 마찬가지겠지만 아이 둘을 키우며 직장생활을 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애들이 언제 커서 대학을 가려나 싶었는데 마침내 둘째까지 집을 떠나는 날이 온 것이다. 자식의 대학진학이 진정한 의미의 자립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부모로서의 내 삶에서 아이를 독립시킨다는 함축성을 담기에는 충분하지 않을까.
아들을 기숙사에 데려다주고 인근에 있는 삼성역을 찾는다. 봄이라는 말이 무색하게 눈발이라도 날릴 것처럼 스산하다. 쌀쌀한 날씨 탓에 나도 모르게 겉옷을 여민다. 숨은 벚꽃 명소라는 말에 한껏 기대하고 역을 찾았건만 꽃마저도 때아닌 추위에 놀라 얼굴을 드러내지 못하고 있다. 봄볕을 애타게 기다리는 수많은 꽃망울 사이로 삼성역이 보인다.
삼성역은 엄마의 자궁에서 편히 쉬고 있는 태아처럼 아늑하고 포근한 곳에 자리 잡고 있다. 참 좋다는 말이 절로 나온다. 마음을 푸근하게 하는 위치, 거기에 부드러운 감성을 자아내는 외양까지 갖춘 역이다. 안을 들여다보지 못하게 창문과 출입문을 철망과 판자로 막아버린 게 못내 아쉽다. 늘 그렇듯 직원의 입장에서는 안전과 보안 관계상, 역을 지금처럼 폐쇄해야 하는 게 옳다고 생각하지만 역을 그냥 바라보고 느끼고자 하는 여행객이 되면 모든 것이 달라진다. 일상생활에서도 마찬가지다. 어느 관점에서 사물을 바라보느냐에 따라 좋고 나쁨의 느낌은 물론, 옳고 그름의 판단마저도 달라진다. 내 시선을 조금만 이동하면 나쁜 일도 좋은 일이 될 수 있고, 그른 일도 옳은 일로 얼마든지 변화시킬 수 있는 게 우리의 삶이 아니던가.
주어진 상황에 따라 적절한 높이의 시선을 가지고 사물과 현상을 바라보는 일은 생각처럼 쉽지 않다. 숫자만 대입하면 답이 나오는 기본 공식의 문제가 아니라 복합적인 사고 과정을 거쳐야 하는 응용 수학 문제와 가깝기 때문이다. 수학 문제든, 일상의 문제든 많은 유형을 접하고 풀어보는 연습을 충분히 한 사람이 좋은 성적을 거둘 수 있는 게 당연한 이치다. 과연 나는 지금껏 얼마나 많은 문제를 풀어보는 연습을 했을까. 얼마나 많은 연습장을 뒤로 넘기며 문제의 풀이 과정을 적어나갔을까.
화물열차와 여객열차가 바쁘게 지나다니지만 정작 삼성역에서는 열차를 탈 수 없다. 무심한 듯 지나쳐버리는 열차와 스산한 날씨가 둘째를 기숙사에 두고 온 헛헛한 내 마음속에서 뒤얽힌다. 역이 꽃으로 뒤덮여 가장 아름다운 모습으로 나를 맞을 때 다시 와보리라 다짐한다. 얼마나 더 있어야 꽃이 필까…….
벚꽃 만발한 삼성역을 보고 싶은 마음에 한 달 뒤 나는 다시 역을 찾았다. 역으로 가는 입구에 혼자서는 끌어안을 수조차 없는 고목이 여러 그루 보인다. 절정을 이룬 목련꽃이 햇살을 받아 하얗게 빛난다. 목련에게 무대의 중앙을 내어준 벚꽃은 아직도 꽃망울을 터뜨리지 못한 것들이 많다. 햇볕이 잘 드는 곳에 자리 잡은 벚꽃들이 여왕이 되어 활짝 핀 모습으로 사람들을 맞는다. 나처럼 꽃을 보기 위해 온 이들로 역 주변은 붐빈다. 지난번의 쓸쓸하고 고즈넉한 풍경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 폐쇄된 삼성역도 벚꽃이 피어있는 동안은 외롭지 않을 듯 보인다.
이제 막 걸음마를 시작한 꼬마가 뒤뚱거리며 걷는다. 행여 아이가 넘어질세라 그 곁을 지키며 천천히 따라 걷는 젊은 엄마와 아빠의 얼굴에도 연분홍의 벚꽃이 피어난다. 내 아이들이 자라는 모습을 좀 더 행복하게 지켜봤어야 했는데……. 꽃 나들이를 온 가족들의 모습에서 나의 젊은 시절을 본다. 지나고 나니 부모로서 아이들에게 제대로 해주지 못한 것만 가슴에 남는다. 아이들이 다 커버린 지금에서야 부모로서의 마음가짐을 조금은 갖추게 되는 것 같아 그저 미안할 뿐이다. 이제는 아이들이 걸어가는 길을 담담하게 지켜봐 주는 일만 남았다. 그들이 길을 가다 문득 뒤를 돌아보았을 때 웃으며 손을 흔들어주는 한 사람으로 남고 싶다.
내년 이맘때도 꽃과 사람에 둘러싸여 있는, 나의 옛날 이야기 같은 삼성역을 찾아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