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평역·불정역』
어느 날, 연기자 김석훈 씨가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한 장면을 우연히 본 적이 있다. 그가 서울의 구석진 곳을 마치 관광가이드처럼 해박한 지식으로 설명을 하고 있어 눈여겨보게 되었다. 극장이 있는 곳에 이르자 요즘 여기가 아주 어렵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며 오랜 세월 자리를 지킨 극장이 경제적으로 힘들다는 소식을 들으면 마음이 쓰인다는 얘기를 덧붙였다. 참으로 공감 가는 얘기였다. 연기자가 극장 운영이 어려워 문 닫는 것을 걱정하듯 나는 철도인으로서 오래된 기차역이 폐쇄된다는 소식을 들으면 늘 안타깝다.
모든 것은 변화하는 게 자연의 이치라지만 기차역만큼은 변하지 않은 채 오래도록 우리 곁에 머물러 있었으면 한다. 기차역은 지역의 역사를 고스란히 보여준다. 때론 개인의 인생을 오롯이 담고 있을 때도 많다. 무도회가 열리는 멋진 궁전 같은 공간이 되기도 하고, 누군가의 마음에 따스한 기운을 나눠주는 곳이 되기도 한다. 나는 오늘도 그 신비의 공간으로 향한다.
1999년 철도청에서 발행한 『한국철도 100년사』에 따르면 1955년 9월 15일, 문경선의 개통식이 열렸다고 한다. 문경선은 광복 이후에 계획되어 건설이 완성된 첫 번째 산업철도다. 이때 개통된 구간이 진남-가은 구간인데 가은이란 이름이 사용된 것은 몇 년 후의 일이며 처음에는 지역의 유명한 탄광 이름을 본떠 은성역이라고 했다고 한다. 이 구간은 나중에 가은선으로 개칭되었으나 개통될 당시 문경선이라 불렸기에 인터넷 자료나 각종 관광자료 등에 문경선이라고 통칭하는 경우가 더러 있는 듯하다.
집집마다 연탄을 피워 난방을 했던 시절, 무연탄이 많이 나는 문경에 철도를 건설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최초로 개통한 진남-가은 구간 외에도 불정-문경 간 선로가 추가로 놓였다. 선로가 놓이는 곳에 필연적으로 역이 들어섰다. 그때 지어진 역들이 지금까지 남아있지만 아쉽게도 기차가 운행하지는 않는다. 진남역, 불정역, 주평역, 가은역, 문경역 등 석탄산업의 부흥기를 알리던 문경선의 기차역들은 가정에서 연탄이 사라짐과 동시에 우리의 생활권에서 점점 멀어지게 되었다.
주평역은 2018년에 인근에 있던 쌍용양회 공장이 문을 닫을 때까지 화물열차가 드나들던 곳이었다. 2007년에 직원이 근무하지 않는 간이역이 되었기에 쌍용양회와 관련된 업무가 있는 날이면 점촌역 직원들이 화물열차를 타고 주평역으로 가서 업무처리를 하고 돌아오곤 했다.
주평역 가는 길에 주평 건널목을 지난다. 건널목 주변은 한적한 마을이다. 기차가 다닌다면 많이 위험하겠지만 지금은 어떤 열차도 이곳을 지나가지 않는다. 건널목 차단기와 멈춤을 알리는 신호장치가 마을과 함께 조화를 이루며 수줍게 서 있다. 건널목을 보니 예전에 같이 근무하던 직원이 꼭 보라고 추천하던 드라마 ‘나의 아저씨’가 생각난다.
많은 사람이 인생 드라마로 꼽는다며 꼭 보라고 몇 번이나 얘기하길래 시간 내어 보게 되었다. 넷플릭스를 통해 한 편, 한 편 보기 시작하다가 나중에는 밤늦게까지 몰아보며 그야말로 드라마에 푹 빠져들었다. 『나의 아저씨』는 TV 드라마에 대한 부정적인 내 생각을 바꿔놓았다.
주인공 박동훈이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철길건널목을 지나는 광경이 종종 나왔다. 열차가 지나가기를 기다리는 중년 남성의 모습 속에 삶의 고단함이 그대로 묻어나 있었다. 드라마의 분위기와 마을의 건널목이 어찌나 잘 어울리던지 화면 속에 담긴 풍경 자체가 등장인물의 대사보다 많은 것을 말해주는 듯했다. 주평 건널목의 모습이 드라마 속의 건널목과 똑 닮았다. 지난날의 분주함을 이제는 내려놓고 마을 속의 일부가 되어 지나가는 이들에게 평온함을 주고 있는 듯 보인다.
운치 있는 주평 건널목의 모습과는 달리 주평역은 네모반듯한 공장 건물을 닮아 살짝 눈살이 찌푸려진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기차가 다니던 역 구내로 들어갈 수 있다는 점이다. 사람의 손길이 닿은 지 오래라 역 구내는 잡풀이 무성하다. 긴 휴식에 들어간 철길은 햇살 아래서 반짝이고, 개나리와 벚꽃은 흐드러지게 피어 홀로 남은 철길을 위로한다. 풀숲 사이로 길게 늘어선 기찻길을 오래도록 바라보며 서 있다. 철길도 예전 그대로고, 개나리와 벚꽃이 지금도 활짝 피는 곳이다. 모든 것들이 허물어져 내리는 역 구내를 바라보며 안타까움을 느끼는 것 외엔 할 수 있는 게 없다.
주평역을 나서는데 누군가의 집 앞에 작은 텃밭이 보인다. 연둣빛의 상추가 싹을 틔우고 있다. 사람의 관심과 손길은 세상 모든 것에게 생명을 부여하는 마법임이 틀림없다.
불정역, 지금까지 봐왔던 기차역과는 차별화된, 독보적인 외관을 자랑하는 불정역이다. 『헨젤과 그레텔』 속에 등장하는 숲속의 과자 집이 이렇지 않았을까. 역사 하부는 화강석으로, 상부는 인근 영강변의 강자갈인 오석을 사용하여 장식했다고 한다.
“문경탄전의 역사를 고스란히 담고 있는 불정역은 1955년 9월 15일에 완공하였으며, 문경선의 시작점인 점촌역과 현재 철로 자전거 역으로 운영 중인 진남역 사이에 자리 잡고 있다.”
역사(驛舍) 앞에 놓인 불정역에 대한 소개 글 중 일부다. 점촌역과 진남역 사이……. 머릿속으로 철도 노선도를 떠올리며 불정역의 위치를 그려본다. 철길의 흔적이 없다면 이곳이 기차역이었다는 사실을 모를 듯하다. 잘 가꾼 시골 별장의 넓은 정원을 보는 것처럼 역사 주변이 깔끔하다. 예쁜 역사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는 이들이 몇 명 보인다. 주평역에는 사람이 없었는데 이곳은 그나마 사진을 찍으러 오는 사람들이 몇 있어서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그래도 아쉬움이 남는 건 내 욕심 탓일 것이다.
많은 이들이 이곳을 찾게 하려면 잘 보존된 역사 이외에 사람들이 만족할 만한 무언가가 필요하다. 지금까지 카페로, 레일바이크 탑승지로, 시민들을 위한 도서관과 전시공간으로, 작은 체험공간이나 소공원으로 사용되고 있는 폐역이나 무인역들을 많이 보아왔다. 역 주변을 천천히 걷다 보니 이곳은 벼룩시장이 열리기 좋은 장소라는 생각이 든다. 작은 공간을 무료로 또는 저렴한 가격에 대여해주고 그곳에서 자기가 팔고 싶은 물건을 파는 것이다.
어린아이는 싫증 난 장난감을, 학생은 자신이 사용하던 학용품이나 작아서 못 입는 옷, 신발 등을 내놓는 것이다. 주부들은 집에서 쓰기에는 마땅찮고, 그냥 버리기는 아까운 물건들을 팔아도 좋고, 집에서 키운 상추나 고추 등 각종 채소를 가져와도 좋지 않을까. 쿠키 만들기에 자신이 있는 사람은 이곳에서 자신의 실력에 대한 상업성을 시험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하다. 물론 가격은 파는 사람 마음대로다.
예전에 딸아이와 같이 캐나다의 밴쿠버에 놀러 간 적이 있었다. 숙소 근처에서 작은 시장이 열렸는데 모두 지역주민들이 재배한 농산물을 팔고 있었다. 직접 만든 쿠키나 빵도 사 먹을 수 있어 좋았다. 특정 요일, 특정 시간에만 열리는 일종의 번개시장이었는데 구경하는 재미도 쏠쏠했고, 판매되는 과일과 채소가 모두 신선해서 깊은 인상을 받았다. 문경은 문경새재라는 천혜의 관광자원이 있어 늘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지는 곳이다. 이런 환경이니 한 달에 한 번씩이라도 벼룩시장이 열리면 불정역이 지금보다 활기를 띠지 않을까.
산다는 것은 죽을 때까지 멈추지 않는 성장의 과정이다. 그리고 그 성장의 목적은 바로 우리 삶에서 진정 중요한 것이 무엇이고, 진정한 행복이 무엇인지를 배우는 데 있다.
『만일 내가 인생을 다시 산다면』, 김해남 지음, 메이븐, 2022, p127.
30년 동안 정신분석전문의로 일했고, 마흔세 살에 파킨슨병 진단을 받은 김해남 선생님은 산다는 것은 곧 성장하는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성장은 멈춤이 아닌 변화를 통해 만들어지는 게 아닌가. 나는 어제보다 조금이라도 더 나은 오늘을 살고 있는지, 중요한 것을 놓치며 살아가고 있는 건 아닌지……. 지난날을 가슴에 품고 이제는 공원이 된 불정역에 앉아 삶의 성장과 행복을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