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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닥터 리사 Apr 08. 2021

기억에 남는 환자분 이야기


선물로 받은 책 한 권 


지난 주말 만난 의대 동기에게서 책 선물을 받았다. 자신이 힘들 때 도움을 받은 책이라며... 의대생이나 전공의들에게도 필독서로 권한다고 했다. 그런데 어디서 이 책을 보았더라... 페이스북을 뒤져봤지만 잘 아시다시피 여기엔 검색기능이 없다. 다행히 책 후면에서 알게 되었다. 나의 또 다른 의대 동기의 친척분이 하시는 출판사에서 펴낸 책이다. 꼭 사서 읽어야지 했는데 우연히 선물을 받게 되다니... 이런 소소한 고리로 만나게 된 책. 일요일 하루동안 단숨에 읽어버렸다. 정말 흥미진진하면서도 감동적이었다. 

어떤 상황에서도 편견을 가지고 판단하면 안되겠구나 싶은 도입부에서부터... 늘 타인의 죽음을 대하는 나에게도 안락사 케이스는 그 무게가 크게 다가왔다. 삶과 죽음은 인간이 결정하는 영역이 아니라는 겸허한 이야기에 공감하면서 내 마음은 한결 가벼워졌다. 냉정해보이는 서양의 의사들도 환자들과 인간적인 교감을 나누고 친밀한 관계를 형성하는구나 싶었다. 그러면서 나에게 영향을 주고 잊혀지지 않는 환자는 누구였을까 생각해봤다. 호스피스를 하면서 만난 환자들은 옴니버스처럼 각각 사연이 있어서 오히려 누가 누구보다 인상적이라 하기가 힘들었다. 초짜 의사로 일하던 레지던트 시절의 환자를 떠올려봤다.... ‘나를 바꾸고 키워준’ 환자가 있을까.... 

나를 키운 한 명의 환자


한 내과환자가 떠올랐다. 가정의학과 레지던트로 파견나갔던 내과에서, 입원한 할아버지 한 분의 담당을 맡았었다. 그 분은 은퇴한 의사였다. 체구도 자그마하고, 말수가 적은 분이었다. 증상도 특이하게 기억나는 것이 없었고, 여러 검사를 한 다음에도 별다른 소견은 나타나지 않았다. 내가 결과를 설명하자, 그 분은 끄덕이면서 '내가 시골에 살아서, 서울의 큰 병원에 와서 검사받고 싶었다, 어느 만큼 (돈과 시간) 계획이 있어서 왔고, 검사 받았으니 며칠 더 머물다 가게 해 달라'하고 쿨하게 말씀하셨다. 당시 자녀분도 와서 면담한 기억이 난다. 소탈한 모습으로, 아버지에 대해 간절하게 부탁을 했었다. 눈을 빛내면서... '아버지가 평소 어디 아파도 내색을 절대 하지 않으시니, 잘 부탁드립니다'라고... 퇴원날 그 환자분이 내게 선물을 하나 주고 가셨다. 국내 브랜드의 향수 하나였다. 여기서 향수도 나오나 싶던... 나름 시원한 향이라 여름에 잘 썼던 기억이다. 그 후 그 환자분은 다시 볼 일이 없었다. 나도 파견을 마쳤고, 그 분도 아마 고향으로 돌아가셨을 것이다. 

그런데 향수 덕분인지, 종종 생각이 났다. '의사'라는 배경을 보고 레지던트인 나에게 까다롭게 대하면 어쩌나 하는 걱정과 달리 다른 환자들보다 더 편하게 대해주었던 환자분. 검사에서 별 다른 이상이 없으면 안도하는 환자들도 있지만, 자신은 힘든데 왜 찾아내지 못하는 거냐고 불만을 제기하는 경우도 있다. 그 환자분은 계속 내게 '의외'였던 것 같다. 그저 뭐 그럴 수도 있지 하는 투로 자신의 결과를 받아들이고, 훌훌 떠나버린 그런 느낌. 아무에게도 폐를 끼치고 싶어하지 않는 듯했다. 그에 비해 효심이 가득해 보이던 자녀분들. 


향수를 모으게 되다 

그 이후 나는 향수를 모으는 버릇이 생겼다. 화장품, 가방, 옷... 사실 명품에 대한 관심이 거의 없다. 하지만 단 한 가지, 면세점에서 보고 고르는 것은 향수이다. 별 것 아닌 듯 해도 향기가 오래 가고, 병원에서 당직을 서더라도 향수를 바꾸면 기분이 달라진다는 걸 느꼈기 때문이었다. 이후로 환자들을 볼 때나 스트레스가 물밀듯이 다가 올 때 '침착함'과 '거리'를 떠올린다. 마치 자신의 일이 아닌 듯, 초월한 듯한 그 분의 중립적인 태도가 내게 몹시 큰 자유를 선사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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