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작스러운 발령으로 서울에서 직장을 다니게 되면서 매일 지하철로 출퇴근을 하게 되었다. 지방에서만 살았던 나는 ‘지하철 출퇴근’에 대한 나름의 로망이 있었다. 드라마나 영화 속에서 직장인들이 출근길에 나서는 모습이 꽤나 멋있게 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직접 겪어보니 로망은 환상에 불과했다.
지하철로 출퇴근을 하는 것은 많은 사람들과 출근 전부터 부딪히게 되는 일이었다. 그렇기에 불편한 일들도 자주 겪게 되었다. 서로 먼저 타고 내리려고 사람들을 밀치며 인상을 찌푸리는 사람들을 보면 내 여유마저 사라졌다. 지하철을 타면서 제일 불쾌하다 여긴 일은 어르신들의 행동이었다. 어르신들은 지하철을 기다리는 사람들의 줄을 무시한 채 새치기 했다. 아무렇지도 않게 내 옷과 가방을 덥석 잡기도 했다. 물론 대다수의 어르신들이 다 그렇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이렇게 배려 없는 어른들을 몇 번 만나고 나니 자연스럽게 그들을 피하게 되었다. 노약자석 옆에는 잘 서지 않았고, 불쾌한 행동을 볼 때면 나도 모르게 실눈을 하고 쳐다보게 되었다. 시골에 계신 할머니, 할아버지와 함께 살며 정을 느꼈던 내가 불과 짧은 사이에 변하게 된 것이다.
그날도 여느 때와 다름없는 출근길이었다. 지하철은 제법 한산했다. 자리가 있어 좌석에 앉아 책을 꺼내 읽고 있었다. 오른쪽 빈 자리에 어떤 할머니가 두 손 가득 들은 짐을 발 아래에 내려놓고 앉으셨다. 할머니가 옆자리에 앉자마자 도끼눈을 하고 내게 불편을 끼칠 행동은 하지 않을까 잔뜩 레이더를 세우고 있었다. 두어 정거장을 지났을 때였다. 할머니는 열차가 제대로 정차하기 전에 짐을 들고 내리기 위해 일어섰다. 순간 지하철이 급정거를 했고, 할머니는 비틀거리며 내 발을 밟고 중심을 잃었다. 조용한 지하철에 발을 밟힌 내 외마디 비명만 들렸다. 오늘도 어김없이 나쁜 예감은 적중했다는 생각만 들어 일순간 짜증이 치솟았다. 할머니에게 뭐라고 쏴 붙여야 할까 머릿속에 뒤죽박죽 짜증 섞인 말들이 스쳐 지나갔다.
그런데 내 발을 밟은 할머니가 넘어질 뻔한 것을 왼편에 앉은 남자분이 잡아 주셨다. 그는 할머니의 손을 잡아드리고 짐을 받아 들었다. 그리고 할머니에게 괜찮으시냐고 물어봤다. 할머니의 무안한 표정이 잠시 환하게 변하는 것을 보았다. 왠지 모를 부끄러움에 나의 예민함도 한층 가라앉았다. 구차하고 무색한 변명의 말들이 나오지 못한 채 사라져버렸다. 할머니는 내게 발을 밟아 미안하다 사과하시고 다음 정거장에서 내리셨다. 나는 머쓱해 괜찮다는 말 한마디 하지 못했다.
본가에 내려가 대중교통을 탈 때마다 어르신들을 보게 되면 나는 자연스레 자리를 양보한다. 지방에 살 때만 하더라도 뉴스에서 자리를 양보하지 않고 자는 척 하는 학생들이 나오는 장면을 보면 ‘왜 저럴까?’라는 의문을 가지며 이해하지 못했다. 서울에 오기 전, 나는 누군가에게 먼저 손을 내밀던 사람이었다. 지금와서 생각해보면 지하철에서 불쾌감을 주는 승객은 단순히 어르신들만은 아니었다. 도움의 손을 내밀지 못하는 이유를 팍팍한 서울살이로만 핑계삼을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