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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라 Jul 30. 2023

아쉬울‘수밖’에



친구와 함께 카페를 갔다. 여름 신상메뉴가 나왔는지 광고지가 카페 여기저기 붙어있었다. 친구는 오래 고민하지 않고 포스터 속 신상음료인 수박주스를 주문했다. 나는 친구처럼 수박주스를 먹어볼까 고민하다 아메리카노를 주문했다. 나는 수박을 아주 많이 싫어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좋아하는 여름 제철 과일 중에 하나는 수박일 것이다. 나도 한때는 좋아했다. 냉장고에 넣어두었다가 꺼내 먹으면, 빨간 과육이 그렇게 시원하고 달달할 수가 없었다. 여름이면 엄마가 깍두기 모양으로 썰어 통에 담아 놓았고,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잘라 놓은 수박을 꺼내 먹었다. 한 입만 베어 먹어도 입안 가득 퍼지는 시원하고 달콤하게 과즙, 그래. 어릴 적에 먹었던 수박은 더운 여름들 달콤하고 시원하게 보낼 수 있도록 해 줬다.


그런데 수박이 싫어졌다. 내 손으로 수박을 사는 일은 없고, 누군가에게 선물할 때에도 수박은 기피한다. 이유를 찾아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면, 회사를 다니고 나서부터이다. 거진 십 년을 싫어하게 된 터라 이제는 주변 사람들도 내가 수박을 싫어하는 이유를 알고 있다.


나는 지금으로부터 십 년 전쯤부터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내 첫 근무지는 보험회사의 한 지점이었다. 영업을 하는 점포였고, 나는 거기에서 사무업무를 보았다. 내가 근무했던 지점은 자주 간식을 사 먹었다. 과일도 종종 사 먹곤 했는데, 한 여름엔 특히 수박을 자주 먹었다. 그리고 누군가 우리 지점을 방문하게 되는 날에는 약속이나 한 것 마냥 큰 수박을 한 통씩 사 왔다. 사무실 냉장고에는 처치곤란인 수박이 넘쳐흘렀다.


집에선 엄마가 늘 수박을 잘라 주셨는데, 회사에선 내 담당이었다. 큰 수박을 자르는 일이 그렇게 힘든 일이라는 건 그때 처음 알았다. 그뿐인가? 수박을 잘라먹고 나면 엄청난 양의 수박껍질이 남는다. 큰 음식물 쓰레기봉투가 가득 차게 몇 봉지를 버리고 나면 테이블은 물론 내 손 역시 끈적끈적해진다. 이 모든 일을 하고 나면 진이 빠졌다. 일 년이 지나자 나는 더 이상 수박을 사 오는 사람들을 좋아하지 않았다. 수박이 들어오면, 누군가 보기 전에 다른 직원 손에 들려 집으로 보낸 적도 있다.


그렇게 지점생활을 몇 년 하고 나니 나는 수박을 싫어하는 사람이 되었다. 본가에 가면 할머니가 키우는 수박이 하우스에 있었다. 강렬한 여름 태양 아래에서도 무럭무럭 크는 수박이 괜히 미웠다. 할머니에게 괜히 수박이 맛없게 생겼다고 퉁명스럽게 말하기도 했다. 그 수박을 잘라 내 입 앞까지 먹으라 가져다주어도, 나는 도통 먹질 않았다. 수박은 나에게 ‘여름의 대명사’ 자리를 잃었다.


죄 없는 수박이 나에게 미움을 사가는 동안 수박의 위상은 나름 높아진 것 같다. ‘땡모반’으로 불리며 해외에서 팔던 수박주스는 요즘 한국에서도 안 파는 카페가 없을 정도다. 여름 시즌음료로 자리를 잡았다. 1인가구는 먹기 힘들다고, 카페에서는 수박을 잘라 통에 넣어서 팔기도 한다. 나는 이런 변화들이 반갑다기 보다는 그저 놀라웠다. 피한다 해도 끈적하게 들러붙는 기분이 들었다. 나는 더 이상 지점에서 수박을 자를 일이 없어졌다. 그 지점에서 근무하지 않고, 더 이상 예전처럼 수박을 사 오는 사람도 없다. 복날에 수박을 먹었던 일도, 오래된 추억이 되어 사라졌지만 여전히 수박을 앞에 두면 깊은 고민에 빠진다.


다시 입안에서 수박의 달콤함을 받아들일 수 있는 날이 올까? 야속하다. 좋아하던 수박을 회사 때문에 빼앗겨버린 이 웃긴 상황이. 나는 좋아하는 것이 많지 않은데, 그중 하나가 사라졌단 사실이 서글프기까지 하다. 하지만 다시 수박을 먹는다 해도 나는 편하게 먹을 수 없다. 내가 수박을 좋아했던 건 누군가가 편하게 먹을 수 있도록 준비해 줬다는 사실을 이제는 알기 때문이다. 누군가의 정성이 들어가야만 좀 더 편안하게 먹을 수 있는 과일, 그 진절머리 나는 수고스러움 때문에 나는 여전히 여름이 되면 수박을 피해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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