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스한 여운을 주는 영화 2018년 토머스 스티바
"그녀의 말대로였다 왜 난 그때 것 몰랐을까? 정말 바다에서 나는 파도소리 같았다."
이 영화를 다 보고 난 후 한참 동안 그 묵직한 여운이 사라지지 않았다. 어떤 극적인 사건도, 이렇다 할 서사도 없는, 대사도 극히 적은 영화였는데 계속 생각이 났고 그 잔향은 오래 지속됐다. 영화는 창문 하나 없는 창고에서 진행되는 대형마트 야간근무자들의 일상을 담는다. 행동과 대화의 미니멀리즘, 속내를 알 수 없는 과묵한 주인공, 마트 노동자들의 따뜻한 연대 등.. 여러 가지 복합적인 감정이 들 게 하는 영화였다. 그 묘한 기운 때문이었는지 한동안 마트 노동자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지게차를 운전하는 주인공들의 모습도 부러웠고, 특히 야간근무자라 '밤'만이 가지고 있는 조용한 공기를 오롯이 혼자 느껴보고도 싶었다. 생각해보면 너무나 엉뚱한 생각이었다. 우리나라와 독일의 상황은 다를 테지만 어찌 됐든 영화는 그렇게 과장되지도, 작위적이지도 않은, 우리네 삶의 일상과 크게 다르다고 느껴지지 않았다. 어쩌면 현실과의 괴리감이 없어 보여서 극 중 주인공처럼 마트 노동자가 되고 싶다는 막연한 생각을 했었는지도 모르겠다.
영화 후반부. 음료 파트에서 같이 일했던 브루노(피터 쿠스)가 자살하고 오랫동안 그를 봐왔던 동료들은 슬픔을 감추지 못한다. 통일이 되기 전. 마트가 동독의 국영 트럭 회사였을 때부터 같이 동고동락하던 사이였는데 이렇게 허무하게 가다니.. 모두들 그의 죽음을 애도하며 슬퍼했다. 통일 후 트럭회사는 대형마트로 변했고, 트럭 노동자들은 그대로 고용승계를 받아 마트 노동자가 되었다. 이제는 트럭 대신 지게차를 운전하며 빛 한 줌 들지 않는 통로를 왔다 갔다 할 뿐이다. 그는 외로웠을 것이다. 통일 후 세상이 자본주의로 변하는 것에 적응하지 못했을 것이고, 곁에 가족도 없었을뿐더러, 통일 전 트럭을 몰며 뻥 뚫린 고속도로를 운전하던 모습도 그리웠을 것이다. 영화는 브루노의 속내에 대한 어떠한 언급도 없지만 그가 떠나고 난 후 짐작할 수 있다. 그가 고뇌하고, 외로워하며 보냈던 시간들을.
영화 마지막 장면. 마리온(산드라 휠러)은 이제 막 정식직원이 된 크리스티안(프란츠 로고스키)에게 예전에 브루노가 알려줬던 건데 너무 좋았다며 똑같이 따라 해 보라고 권한다. 그러면서 지게차의 포크를 천장 끝까지 올리고 천천히 부드럽게 내리라고 한다. 그리고 조용히 귀 기울이며 들어보라고... 어디선가 파도소리가 들리지 않냐고... 천천히 내려지는 포크의 기계소리를 눈감고 듣고 있으면 영화 속 크리스티안도, 관객인 우리들도 분명히 들릴 것이다. 망망대해 어딘가에서 느껴지는 파도소리를. 그것도 너무나 생생하게.
브루노는 남겨진 크리스티안과 마리온에게 그리고 관객인 우리들에게 넓디넓은 바다의 파도소리를 선물로 주었다. 그는 우리 모두가 언제가 팔리게 될 냉장고 속에 가둬진 물고기가 아니라 망망대해 한가운데서 헤엄치는 자유로운 영혼이 되기를 소망했던 것 같다. 현실은 대형마트처럼 답답하고, 지루한 일상이지만 그 속에서 희망을 찾길 바라는 마음을 담은 듯했다. 뜻밖의 선물을 받은 느낌이었다. 극장 안이 바다의 시원함으로 가득 메워졌고, 깊은 여운이 느껴졌다. 영화가 전체적으로 무겁다거나, 우울하거나, 가라앉는 느낌이 들지 않았던 이유가 여기에 있었던 것 같다. 두 시간 내내 전반적으로 깔려있는 더디고도 온화한, 따스한 시선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영화를 본 지 꽤 됐음에도 여전히 계속 생각나는 영화다. 일상의 잔잔함 속에서 조용하면서도 깊이 있는 뭔가를 발견하고 싶은 분이라면 꼭 보길 추천한다. 마지막 장면의 맑고 시원한 바닷소리가 평소와는 다르게 다가올 것이다.
Written by concubin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