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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유로운 풀풀 Jun 16. 2023

직장 동료의 예의를 빙자한 뒷담화에 대하여

사회에는 다양한 부류의 사람이 있다. 나와 성향이 잘 맞는 사람만 있다면 참 좋으련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꽤 많다. 절반 만 이래도 마음이 맞다면 그건 유쾌한 직장 생활의 시작이고, 한 두 명 만이래도 마음을 이야기할 수 있다면 그건 꽤 할 만한 직장 생활이다.



예전에 오이 껍질의 가시처럼 탁 걸리는 직장 동료가 있다. 말을 섞고 나면 뭔가 뒤가 찜찜해지는 기분이랄까? 내가 예민해서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 사람과 업무적으로 몇 가지 일에 부딪히며 더 가까이는 가면 되지 않을 사람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1대 1로 나를 대할 때와 1대 다수에서 날 대할 때 온도차가 있었다. 1대 1로 말할 때는 나를 아래로 보는 듯한 느낌으로 약간의 무시를 섞은 뉘앙스로 이야기를 했다. 그리고 다수에 섞여서 나와 이야기할 때는 엄청 위하는 듯한 말투로 자신을 좋은 사람으로 포장을 했다. 물론 그런 일들을 겪으며 나도 그 사람에 대한 '호'의 감정이 '불호'로 서서히 바뀌었기에 업무적인 대화 사이의 유연한 틈을 벌여주는 대화를 섞지 않았고, 몇몇 사건을 거친 후 그 사람은 날 조금은 어렵게 대하고 있다. (뒤에서 까는 말이야 그러려니 한다.)




나의 업무는 보안에 예민한 업무였다. 교사들의 업무야 돌아가며 맡지만 나는 정보 쪽 업무를 맡고 있기에 자잘해 보이지만 꽤 민감한 일들에 걸려있는 위치였다. 

그런데 그 사람이 업무담당자인 나와 상의를 하지 않고 모두 합쳐 수백만 원이 되는 기계를 보안이 전혀 되지 않는 공간으로 옮겨버렸다. 사유는? 그 기계가 있으니 본인이 머리가 아프다는 이유로. 그 사람이 오기 전부터 그 기계는 그 자리에 있었고, 그 사람이 와서 있을 위치는 두 군데나 있었지만 본인이 불편하다는 이유로 구태여 그 공간을 사용해 놓고, 자신의 개인적인 만족도를 위해 회사 업무 담당자인 나와 의논하지 않고 수백만 원의 기계를 보안이 전혀 되지 않는 공간으로 옮긴 것이다. 

사무실에서 '당신은 업무 담당자인 나와 협의하지 않고 임의로 옮기고도 나에게 말 한마디 하지 않았다. 다음부터 조심해 달라. 보안 관리 부분에서 이런 것들을 조심해 달라.'라고 이야기했다. 그러자 '자기가 한 게 아니라 옆 사람이 그냥 대신해줬고, 그 옆 사람은 관리자가 시켜서 그렇게 했다'라고 변명하는 게 아닌가. 난 '실수를 포장하는 사람들의 나르시시즘적인 요소'를 참 좋아하지 않는데, 그 사람은 딱 그런 요소를 가지고 있었다. 그냥 '아, 몸이 불편하다 보니 어쩔 수가 없었다. 보안은 제가 한 번 더 신경 쓰겠다.'라고 말하면 그만일 것을 모르쇠로 일관하는 그 사람의 태도에 바로 옆에 있던 관리자분께서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날 바라보셨다. 



그 이후로 여자들끼리의 신경을 긁는 말과 태도가 좀 있었다. 그럼에도 별 신경 쓰지 않은 이유는 근무처를 옮기면 다시 볼 일 없는 사람이거니와 불필요한 곳에 내 에너지를 낭비하고 싶지 않아서였다.


업무에서 비협조적이거나 그 사람의 서툰 업무추진(본인은 스스로가 가장 잘하고 있다며 어필하는 중)으로 몇몇 동료들이 피로함을 호소하면 '그런 부분이 있다.'라고 응수하며 그냥저냥 몇 개월을 보냈는데...


이 사람이 나를 잡아먹고 험담할 꼬투리를 찾아냈다. 

바로 '안 착한 선생님'이다.


아이들은 담임교사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 좋든 싫든 담임교사와 보내는 시간이 많으니 자연스레 담임의 생각이나 뉘앙스를 흡수하게 된다. 그래서 더욱 말 한마디, 행동 하나를 조심해야 하는 게 이 위치이기도 하다.


난 '착한 선생님'을 지향하지 않는다. 아이들이 느끼는 '착함'의 기준이 지극히 주관적이기도 하고, '착하다'는 프레임에 갇히면 아이들에게 꼭 해 주어야 할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눈치 보는 학급경영'이 되기 때문이다. 아이들의 눈치를 보기 시작하면, 아이들에게 전해야 할 말을 제대로 전하지 못하고 불필요한 변명이나 편 가르기의 말로 아이들의 환심을 사려고 하기 쉽다. 이건 '떡볶이 사줄게, 내가 최고지?'와 같은 직접적인 방식이 아니라 아이들은 인지하지 못하는 비언어적인 행동과 언어의 뉘앙스로 묘하게 전해지기 마련이다. 


그래서 나는 필요한 말은 그냥 한다. 복도에서 운동화를 신고 다니는 아이에게는 '청소하시는 여사님의 수고로움을 언급하며 실내화를 신고 다니자.'라고 말하고, 동생을 괴롭히고 장난이라고 변명하는 아이에게는 '동생이 느끼기에 불쾌했다면 괴롭힘이다.'라고 말한다. 이 과정은 아이 입장에서는 귀찮고 아프다. 신고 있던 운동화를 벗어야 하고, 단순한 장난이라고 생각했던 행동을 괴롭힘이라 인지해야 하는 아픔이 있다. 

내 입장에서도 이런 말들을 불편하다. 그냥 미소 지으며 인사받아주고, 멋지다며 칭찬만 해주면 좋은 선생님이 될 텐데, 구태여 한 마디를 더 보태고 나면 '혼낸 선생님, 깐깐한 선생님'이 되기 때문이다. (오해는 마시라. 근무하는 학급, 6 학급 반경 내에서만 그렇게 이야기한다. 나를 같은 학교 옆 반 선생님으로 인지하지 못하는 객관적인 상황일 경우 구태여 말하지 않는다. 괜한 오해를 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위에서 언급한 그리 사이가 좋지만은 않은 그 사람이 요 부분을 탁 물었다. 나의 그런 부분들과 자신의 친절함을 대조하며 '나는 좋은 선생님, 너희들은 복 받은 아이들, 저 반이 아니라 다행이지?'의 뉘앙스를 온몸으로 전달하고 있었던 거다. 뭐 매번 그러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 반 아이들이 우리 반 아이들을 괴롭히거나 험한 말을 했을 때 나의 지도가 들어가면 꼭 그런 뉘앙스를 그 학급 아이들에게 전달했다. 


교사들 사이에서는 이런 분위기가 있다. 동학년 이내의 소규모인 경우 다른 반 아이들 사이에서 일이 벌어질 경우 사안이 경미하다면 자신의 학급에서 처리하고, 사안이 조금 지도가 더 들어가야 할 부분이라면 피해학급 아동의 교사가 이야기를 하는 것. 그리고 그 부분에 대해서 아이들 앞에서 교사 평가를 하지 않는 것. 만약 그 처치가 과하다고 느껴진다면 교사들 간의 소통을 이어가는 것. 


그런데 이 사람이 이런 부분을 자꾸 선을 넘었다. 학급 아이들의 마음을 얻기 위해, '우리 선생님이 최고로 착해'라는 특별한 타이틀을 얻기 위해 다른 교사를 까내리는 거다. 옆 반 아이들에게 자기 반에 와서 마음껏 놀라고 한다거나, '나'는 괜찮다고 말하거나, 동료 교사와 아이들에게는 '옆 반 애들이 나를 너무 좋아한다'며 선을 넘는 말을 한다거나, 당연히 조언을 들어야 하는 좋지 않은 행동에 대한 교정을  듣고 온 아이에게 '속상하겠다, 아구구, 그 선생님이 별 것 아닌 일로 그랬다'는 뉘앙스로 말한다거나. 자신의 착함을 세우기 위해 타인을 까내리고, 아이들 앞에서 옆 반 선생님의 뒷담화를 까는 것이다.



휴.

그 사람의 장점도 있었다. 사람은 누구나 장점과 단점을 가지고 있지 않은가. 그 장단점조차도 그 사람이 가진 기질들 중에 하나에 불과하며 그것 또한 연결된 스펙트럼으로 판단하는 기준이 되어서는 안 되지 않은가.


하지만 난 그 사람의 나르시시즘적인 요소와 그것을 어필하기 위해 무의식적으로 행하는 비슷한 패턴의 행동들이 참 거슬렸다. 일을 일로 처리하지 못하고 '늬들 생각해서 이렇게 신경 엄청 많이 썼어. 나 잘했지?'라며 서툰 행동을 보이면서도, '나는 고경력자'라는 프레임에 사로잡혀 자신의 기준에 안 맞는 사람들을 잣대질하고 뒷담화를 까는 분위기를 만들고 쏙 빠지는 그 모습이 난 좋지 않았다. 일종의 가스라이팅을 밥 먹듯이 하며 주변인들을 조종하는 태도에 환멸이 일었다고나 할까.



오늘 새벽 눈을 떴는데

문득 여러 사건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자신은 좋은 사람인 척 예의를 갖추어 말하는데 주변인을 까내리는 뒷담화를 일삼던 그 사람.

자신의 감정이 불편한 건 참지 못하고 주변인에게 돌려 까서 결국 나를 나쁜 사람으로 만들던 그 사람.  

(당신이 업무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실수해서, 업무담당자인 내가 '이런 거 협조 주세요'한 걸 기분 나빠하면 내 업무는 어쩌라고요? 하하)


그 사람은 알까?

결국 자신이 함께 뒷담화를 깠던 그 사람들이 나에게 모두 이야기를 해 줬고, 시간이 지난 지금 '그 사람 좀 이상한 구석이 있었어'라고 말한다는 사실을.



직장 생활은 쉽지 않다.

뒷담화와 나르시시즘에 가스라이팅 당하지 않기 위해 

오늘도 힘을 내야지.


출근길, 파이팅.


덧. 

글을 마무리하며 드는 자기검열. 

'내가 너무 예민한가?'


...


'내가 너무 예민한게 아니라 그 사람이 무례한거야.'라고 다시 고쳐 말하며 날 다독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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