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자유로운 풀풀 Apr 27. 2024

송화 가루와 손걸레질

꽃가루의 계절이다. 아파트 정원 바닥의 잡초들 사이로 냉이꽃이 오롯이 고개를 들더니 본격적으로 송화 가루가 바람에 날리기 시작했다. 아니, 바람에 날리는 게 아니라 송화 가루가 담요가 되어 공기를 덮어버리기 시작했다.


며칠 전, 10층 창문 너머로 등교하는 아이들에게 손을 흔들어주다가 두 눈을 의심했다. 바람이 꽤 많이 부는 날이었는데, 흔들리는 나뭇가지보다 바람에 무더기로 나부끼는 송화가루에 풍향을 알아채고 만 것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잠시 외출하러 나와서는 길을 걷다 멈추었다. 공기가 조금 강하게 소나무를 감싸고돌자, 어여쁘게 돋아난 소나무 수꽃에서 송화 가루가 폭죽놀이하듯 타라락 털리더니 치맛자락 나부끼듯 공기층을 싸고도는 게 아닌가. 가던 길을 쭉 가면 송화 가루 뒤집어쓸 듯하여 송화 치마가 자리를 뜰 때까지 잠시 기다렸다. 


상황이 이 지경이니 환기 때문에 열어둔 창문으로 깨끗한 공기와 송화 가루가 범벅이 되어 우리 집을 장악했다. 닦기 전에는 모른다. 방바닥과 발바닥 사이에 느껴지는 까끌한 이물감이 먼지인지 송화 가루인지는 희거나 검은 걸레로 닦아봐야 안다. 창틀에만 노오랗게 가라앉은 거라는 생각은 금물이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꼭 짠 물걸레로 창틀 아래 바닥을 쓱 문질렀더니 물걸레가 노래졌다. 평소 물이 잘 닿지 않아 그냥 두었던 싱크대도 쓱 닦아보니 하얀 행주가 노래졌다. 노랭이의 향연이다.


평소 귀찮아서 밀대로 물걸레질을 했는데, 이 정도 꽃가루라면 손걸레질이 답일 듯하여 거의 매일 바닥을 닦고 있다. 아이들과 잘 자라고 인사를 나눈 후 "엄마 청소하고 문 닫아줄게." 하고는 물걸레질을 시작한다. 작은 등을 켜고 물걸레 세 장을 준비한다. 한 장만으로 온 집안 바닥을 닦아내기에는 먼지가 너무 많아 무리다. 한 장으로 빨아가며 닦아내기는 꽤 번거롭다. 일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물에 적셔 적당히 짠 물걸레 두 장을 바닥에 흩어 던진다. 나머지 한 장으로 바닥에서 잠자는 첫째의 방에 먼저 들어간다. 이불을 펴고 누은 아이 주변에 쪼그려 앉아 가구 틈새, 걸레받이 위 등을 닦아낸다. 매일 닦는데도 보얗게 묻어 나오는 먼지들을 보면서 '이 녀석들이 우리 딸 코에 들어가지 않아 다행이군.'하고 안도한다. 곧장 둘째 아이 방으로 가서 책상 위와 책장, 바닥을 닦는다. 침대 생활을 하니 먼지가 모두 코로 들어가지 않을 거라는 작은 위안을 건네며 좀 더 편안한 마음으로 바닥을 닦고 거실로 나온다. 그렇게 소진한 걸레를 빨래통에 휙 던지고는 부엌 바닥에 던져놓은 걸레를 편다. 창문을 자주 열어두는 곳이 거실과 부엌이기에 본격적으로 송화 가루가 많이 돌아다니는 곳이다. 뒷베란다와 연결된 부엌 바닥부터 시작한다. 베란다 문틀과 모서리를 걸레로 닦고 뒤집어 확인하니 노랗게 묻어 나왔다. "크윽, 닦아냈어." 집안의 꽃가루들이 내 손에 닦여나간다는 쾌감에 몸을 맡기고 바닥 한 칸 한 칸을 어루만지듯 닦아간다. 부엌 바닥, 현관 앞 바닥, 거실 바닥, 소파 밑, 안방까지 닦고 나면 금세 시간은 40분을 넘긴다. 하얗고 노란 먼지로 뒤덮인 손걸레를 보며 하루를 잘 마감했다는 안도감을 만끽한다.


손걸레질을 할 때마다 고민한다. "무릎에 괜찮을까?" 얼마 전 친구가 쪼그려 앉아 바닥을 닦는 게 무릎 건강에 제일 안 좋다고 했던 말이 떠올라서다. 난 쪼그려 앉다 못해 양 무릎을 바닥에 대고 기어 다니며 손걸레질을 하는데 말이다. 시골에서 밭농사할 때 쓰는 바퀴 달린 앉은뱅이 의자를 사서 바닥을 밀고 다닐까도 고민했지만 청소시간이 밤 9시인지라 아랫집에 바퀴소리가 들릴까 봐 신경 쓰여 포기했다. 쪼그려 앉아 미는 게 덜 안 좋을까, 무릎을 바닥에 대는 게 덜 안 좋을까 고민하며 자세를 요리조리 바꿔 물걸레질을 한다. 그러다가 말미에는 "에이, 그래서 무릎 아프면 그때부터 안 하면 되지 뭐."라고 결론 내리고 속시원히 물걸레질을 마무리하고야 말지만.


내겐 손걸레질이 healing이다. 심각한 고민 없이 바닥을 문지르는 일련의 행위는 머리 쓰며 일에 몰두하던 하루의 끝에 나의 말초신경을 어루만지는 작업이다. 손 끝에 닿는 시원한 물기와 손바닥에 단단히 닿는 물걸레와 바닥의 조합, 착 달라붙다가 물기가 날아가며 사각 스치는 발바닥의 감촉은 지금 이 순간에 충실하게 살고 있음을 자각하게 한다. 


이전에 스님들의 미니멀라이프에 대한 책을 읽었다. 많고 많은 방법과 성찰 중에서 나는 스님의 바닥청소법에 격하게 공감했다. 물이 담긴 대야와 물걸레 한 장으로 법당 바닥을 닦아내는 스님들. 청소기도 사용하지 않고 그저 물과 천조각으로 몸을 규칙적으로 움직이며 걸레질을 했다. 손걸레가 닿지 않은 곳이 없도록 너른 법당 바닥을 신중하게 오가며 바닥을 닦아내었다. 얼마나 단순한가, 얼마나 개운한가. 


진중함으로 메워진 법당이 아니라 물건들이 나뒹구는 방바닥을 닦으면서, 좀 더 가뜬하게 손걸레질을 하기 위해 소유를 줄여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엉덩이를 높게 치켜들고 손바닥으로 물걸레를 팽팽하게 누르며 양발바닥을 힘차게 굴려 바닥을 닦을 수 있도록 책도 좀 줄이고, 책상도 좀 줄이고, 소파도 좀 줄이고, 의자도 좀 줄이고 싶어 졌다. 지금 당장은 아니더라도 아이들이 독립하여 나가고 부부만의 집, 오직 나만을 위한 공간을 꾸밀 때는 더 간편한 살림으로 만드리라 다짐했다. 


생각이 여기에 다다르니, 20년  무릎은 걱정 안 해도 되겠다. 아침저녁으로 손걸레질을 해도 무릎이 아프지 않을 만큼의 공간만을 누리고 살면 되지 않겠는가. 바닥에 퍼질러 앉아 손으로 걸레를 슥슥 움직이고, 엉덩이를 50cm만큼 밀고 다시 슥슥 움직이면 대충 청소가 끝나는 공간. 내 몸이 감당할 수 있을 만큼의 공간과 물건으로 살면 되지 않겠는가. 남편이 들으면 "그냥 로봇청소기 사자."라고 할 테지만 말이다.


내일 아침 일어나 창문을 열면 창틀은 또 노랗게 되어있을 거다. 환기를 위해 창문을 열지만 바닥에 가라앉을 송화 가루를 또 걱정하며, 저녁에는 방바닥에 물걸레 세 장을 던져 놓을 거다. 지금 누리는 이 공간에 감사하며 바닥을 닦을 테다. 풀풀 날리는 송화가루에 정신이 혼미해지지만 그 덕에 누리는 사계절의 푸릇함에 웃음 지을 테다. 송화 가루는 한 달이면 끝나지만, 녹음은 열두 달이니까.


아, 그런데 산속 한가운데 위치한 법당 바닥의 송화 가루는 정말 어마무시하겠다.

매거진의 이전글 엄마에게, 서른아홉 번째 추석을 보내고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