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2학년 딸아이의 꿈은 이야기꾼이다. 지구 여기저기를 탐험하며 여러 가지를 발견하고, 이를 바탕으로 자신의 글을 써서 사람들에게 이야기를 전하는 사람이다. 또한 자신이 번 돈으로 사람들이 좋아할 만한 체험거리를 무료로 제공하여 기쁨을 전하겠다는 야무진 포부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3월 신학기에 늘 적는 자기소개란의 꿈 칸에는 1학년때와 마찬가지로 '이야기꾼, 탐험가'라고 당당하게 적었다.
그런 딸아이가 잠들기 전 속상한 일이 있었다며 털어놓았다.
"엄마, 오늘 무용수업 시간에 무용선생님이 탐험가는 없어질 직업이래. 정말이야?"
아이는 눈물을 글썽이며 말을 이어갔다. 꿈을 이야기하는 시간이 있어서 '탐험가'라고 이야기했더니 선생님께서 '탐험가는 곧 없어질 직업이다. 로봇이 위험한 일을 모두 대신할 거다. 더 이상 발견할 땅도 없다.'라고 대답하셨다고 한다. 원래 자신의 1번 꿈은 이야기꾼인데 반 친구들이 이야기꾼이라는 꿈을 이해하지 못하고 이상하다고 이야기해서 2번 꿈인 탐험가를 이야기했는데, 그마저도 무용선생님이 없어질 직업이라고 말씀하셨다며, 아이는 펑펑 울었다.
발견할 땅은 없지만 발견할 우주는 있으며, 지구는 자꾸 변하기에 이곳저곳을 탐험하여 사람들에게 소식을 전해주는 탐험가는 꼭 필요하고, 로봇이 그 일을 도와주기에 탐험가는 없어져서는 안 될 소중한 꿈이라고 이야기해 주었지만. 엄마의 T적인 위로는 전혀 위로가 되지 않았다. 아이는 울고, 난 답답하고. 답답함이 이어지니 괜히 그런 말을 쏟아낸 반 친구들과 무용선생님을 원망하는 마음까지 솟았다. (사실 그 마음을 어쩌지 못해 야심한 시각에 글을 쓰는 중이다.)
'많이 속상했겠다, 너의 꿈은 소중하다, 탐험하여 알게 된 사실에 상상을 더하여 이야기를 만들어 사람들에게 전하는 건 정말 큰 꿈이다, 넌 너의 꿈을 실현할 수 있다.' 뭐 이런저런 이야기를 쏟아놓았더니, 아이가 아주 깊은 질문을 했다.
"근데 엄마, 상상은 이뤄질 수 없대. 그러니까 상상이 아니라 진짜 이뤄질 수 있는 걸 꿈꿔야 하는 거래."
이건 뭔 망언인가. 아마도 아이의 넓은 꿈을 다 이해하지 못한 사람들이 '그건 헛된 꿈'이라고 초를 친 모양이었다. 머리가 댕 울렸다.
"사람들은 달에 갈 수 없다고 생각했지. 하지만 어떤 사람은 달에 가기를 꿈꿨고, 그 상상을 현실로 이뤘어. 상상을 해야 이뤄낼 방법을 찾아내어 꿈을 실현할 수 있는 거야."
자기 계발서를 탐독한 덕분인가, 이런 질문에 책 같은 정답은 술술 나왔다. 다행인가, 25분에 걸친 아이와의 꿈 토론은 "너의 꿈은 소중하다, 큰 꿈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말에 흔들리지 말아라."로 결론지어졌다.
아이에게 이불을 덮어주고 부엌으로 나와 싱크대 정리를 하는데 속이 답답했다. 아이가 꿈꾸는 이야기꾼과 탐험가라는 멋진 미래를 실현 불가능한 이야기라고, 이미 한물 간 이야기일 뿐이라고 단정 짓는 소리들에 가슴이 턱 막혔다. 그들의 생각도 모르는 건 아니다. 나 또한 '이야기꾼, 탐험가'라는 꿈을 처음 들었을 때 정말로 당황스러웠다. 하지만 책과 상상을 좋아하는 아이에게는 정말 딱 맞는 꿈이기에 아이의 꿈에 나 또한 설득되었다. 아이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늘 이야기를 상상하고, 넘치는 상상을 종이에 글과 그림으로 표현한다. 쉴 새 없이 말하고, 말하지 않을 때는 글을 읽거나 자신의 생각을 확장했다. 나라고 뭐 '의사, 변호사, 사업가' 같은 직업을 바라지 않았겠는가. 고작 아홉 살 된 딸아이지만 '이야기꾼, 탐험가'는 너무 위험하거나 안정성이 보장되지 않았거나 비현실적인 꿈이라 아이의 허황된 망상만 키워주는 게 아닌가 고민해보지 않았겠는가. (아이의 인생은 아이의 것이라 세뇌하지만 나도 어쩔 수 없는 K맘이니까.) 하지만 이제 고작 초등 2학년인 아이의 멋진 꿈에 손대고 싶지 않았다. 그저 이야기를 들어주었을 뿐인데 이게 이리 속상한 일이 되어버리다니.
아이가 어른이 되어 무엇이 될지 모른다. 이렇게 큰 꿈을 꿔놓고는 K직장인이 되기 위해 스펙을 쌓아갈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어찌 되었든 그 과정에서 아이가 자신의 생각을 소중하게 여기고 자신을 알아갈 기회로 삼기를 바랐다. 좋아하는 것을 더 좋아하고, 잘하는 것을 더 즐기는 아이로 자라길 바랐다. 그렇게 엄마인 나도 잘 이해되지 않았던 미래를 아이를 통해 알아가고 키워갔는데 엉엉 우는 아이를 보니, 우리의 그 예쁜 과정이 다 망가져버릴까 봐 겁이 났다.
아직 잠들지 않은 아이에게 다가가 볼을 맞대고 이야기했다.
"딸아, 엄마는 너의 꿈이 정말 크고 멋지고 소중하다고 생각해. 상상하고 바라며 다가가면 현실이 될 거야. 엄마는 믿어."
아이는 씩 웃으며 몸을 돌려 누웠다. 털어놓고 나니 마음이 풀린 모양이었다. 그런 아이를 보니 다시 마음이 짠했다.
오늘 밤 한 고비는 넘겼다. 또 이런 일이 언제고 일어나지 않을까? 아이의 꿈이 이야기꾼으로 이어진다면 말이다. '대체 그 꿈은 뭐냐'라고 사람들이 물을 때마다 아이가 당당했으면 좋겠다. 이야기꾼이든 탐험가든 아이돌이든 의사든. 그게 뭐가 됐든. 맘껏 꿈꾸고 맘껏 상상해도 판단받지 않는 초등기를 보냈으면 좋겠다. 아니 판단받는 순간이 종종, 자주 찾아오더라도 "너의 꿈은 소중하다"라고 말해주는 엄마의 믿음을 기억했으면 좋겠다. 그거면 된다.
*고작 초등학교 2학년 아이의 푸념에 이런 긴 글을 적는 나란 엄마도 참 유난이다. 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