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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곤 Apr 06. 2022

기안84 전시회, 니 그림 내 그림(2)

‘분열’은 생존수단

분열


이하 기안84 전시회


 '분열'이란 현대 시대를 살아가기 위한 하나의 규칙으로 자리 잡은 지 오래입니다. 어느새 자아 분열은 현대인의 병증을 넘어 이제는 현대인을 정의하는 요소가 되어 버린 것처럼 말입니다. 사람들은 위선자들의 진짜 얼굴, 가짜 얼굴과는 다른 가면들을 쓰며 살아갑니다.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라.'


 최근 어릴 적 어미한테 버림받고 절에서 키워진 동자승에게 마음이 간지 오래입니다. 문학 속의 동자승은 절이 너무 싫습니다. 그 싫음이 정도를 넘겼는지, 어디에 있을지 모르는 어미를 찾기 위해 절을 떠나는 동자승은 나에게 왠지 모를 애정을 불러일으킵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자신의 이상을 위해 과감히 자신을 던질 줄 아는 모습이 매력으로 다가오지 않았나 싶습니다.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라'의 체념하는 투의 혼잣말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린 말입니다 저에겐. 목가적인 삶 속에 길들여진 나는 절밥을 끊지 못하는 미련한 중생인 셈입니다만. 교육의 이상을 실현하자는 낭만주의적 슬로건은 사실 나에게 사고의 도피처이자 최소한의 변명일지도 모릅니다.


 우리 삶에서 종교의 옛 위상은 찾기 힘듭니다, 그렇지만 누군가 자신을 무교라 정의한다 손치더라도 종교와 무관한 삶을 사는 건 결코 아닐 것입니다. 현대에 들어서 종교의 자리는 종교적 색깔을 숨긴 것들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들의 태생은 반(反) 종교이지만 그들은 아이러니하게도 종교 집단과 같은 집단적 신념을 공통분모로 가집니다. 정치는 종교가 되었고, 종교 또한 정치가 되었다. 교육, 정치, 역사는 물론 하물며 아이폰(iPhone) 또한 여기서 자유롭진 못할 것 입니다. 이처럼 종교는 세분화되어 우리 삶에 내밀히 스며듭니다.


 이러한 대(大) 종교의 시대에 분열이란 우리 시대를 살아가는 하나의 규율로써 자리 잡았고, 분열을 관리하지 못하는 사람은 현대의 패배자가 되기 마련입니다. 현대의 패배자의 유형중 하나를 소개하자면, 현대의 도그마(dogma)를 따르지 못하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다양성을 존중하고, 폭력을 반대하는 운동으로부터 시작되는 PC(politially correct) 혹은 과도한 윤리 사상은 새로운 폭력을 만들어내고 다양성을 해치는 결과로 이어지기도 하죠. 폭력은 때론 비윤리가 아닌 과도한 윤리의 산물이다. 이는 <날개>에 나오는 유명한 구절인 '박제가 되어버린 천재를 아시오'와 같이 또 한 명의 천재를 박제해 버리는 결과를 낳게 됩니다. 따라서 분열은 하나의 생존수단입니다.


 하지만 서로 다른 가면들 사이의 층위는 '나'라는 존재에게 부조화라는 결과물을 가져옵니다. 이러한 부조화에 두려움을 느끼지 않는다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분열이란 우리 시대를 살아가는 하나의 규율이자, 분열을 관리하지 못하는 사람은 현대의 패배자가 되기 마련인데 어떻게 하란 말인 건가요. 분열은 하나의 생존전략으로써 택하긴 하였지만, 어느 가면 하나 나의 얼굴에 딱 들어맞는 것이 없게 느껴질 때가 많습니다. 때론 분열을 관리하기는커녕 가면 뒤를 맹목적으로 쫓아 허우적 되는 나 자신만을 발견할 뿐입니다.



전시회의 3번째 섹션은 '분열'입니다







풀 소유(Full所有)

 

 사실 비(非) 사유를 사유하는 것보다 더 사유를 요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기안84 전시회의 3가지는 섹션은 순서대로 <의미의 해체>, <불안> , <분열>이자 이를 Statement의 내용과도  엮어 볼 수도 있습니다. 전시회의 큰 주제는 욕망이지만 그 부재 풀 소유(Full所有)가 이 전시회의 완성도를 높이죠. 먼저 모두가 가지고 있는 세속적인 욕망(부동산, 시계, 자동차)은 '불안'으로 이어지기 마련입니다. 이러한 불안에서 벗어나기 위해, 아니 살아남기 위해서 많은 사람들은 생존 수단으로써 '분열'을 택합니다. 분열은 우리를 크게 두 가지, 진지한 얼굴과 웃음기 가득한 얼굴로 나누어 버립니다. 웃음기 가득한 얼굴이 세상의 의미를 해체시켜 버리고, 이것이 진정으로 이 세상에 평화를 가져다준다는 믿음과 함께 말입니다.


 다시, 비(非) 사유를 사유하는 것보다 더 사유를 요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웃음이 진지한 의미를 해체시킨 다는 말에는 동의합니다만. 이 세상에 더 이상의 진지한 비극이 없다는 말은 즉, 많은 사고가 요구되는 이러한 역설적인 생각 또한 사라졌다는 것일 겁니다. 어린아이의 재잘거림을 소유하고자 하는 생각 또한 어른들의 크나큰 욕심일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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