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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말이 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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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런썸 Feb 11. 2022

답을 들을 준비가 안 되어 있는 질문


큰아이가 올해 고3이다. 지난달엔 친구 따라 관리형 독서실을 끊어 달라고 해서 매일 7시에 나가고 10시에 들어오더니 이번 달은 자신 없는지 집에 들어앉았다. 일주일에 세 번 수학학원을 가고 숙제만 겨우 해 가는 것 같다. 다른 집 고3 아이들은 얼마나 바쁘게 공부할까. 나중엔 시간이 없어서 그동안 놀았던 걸 후회한다던데. 중요한 시기를 허송세월하고 있는 것 같아 속이 탄다. 그러나 한숨은 속으로 삭일 수밖에. 올해 나의 목표는 편안한 고3 엄마 되기. 아이한테 불안해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고 싶다. 휴대폰으로 게임을 재미있게 하고 계시는 아드님한테 넌지시 물어본다.


"너 공부하기 싫으면 다른 거 뭐 배워 보고 싶은 거 없어? 이렇게 시간 보내는 게 아까워서 그래."

(시간 아까우니 당장 들어가서 공부해.)

"그래요? 아... 그럼 지게차 운전해 볼까요?"

"어... 그래? 그게 하고 싶었어?"(네가 기계 다루는 데 소질이 있니? 다치면 어떡하고?...)

"딱히 그런 건 아니고 진로 선생님이 배워 보셨다고 해서요. 아, 요리도 재밌을 것 같던데. 한식 요리 자격증 한번 따 볼까?"

"어... 그래? 요리도 배워 두면 나중에 좋지."(시작하면 끝까지 가겠니? 요리도 만만하지 않다...)


우리의 대화는 더 이상 진척되지 않았다. 지게차 운전을 배운다고 하니 험한 일을 하다가 사고라도 나면 어떡하지 하는 생각이 스쳐갔고 요리를 배운다니 정말 아이가 공부는 팽개치고 배운다고 달려들까 오만가지 생각이 지나갔다. 차라리 톡 까놓고 공부하라는 잔소리가 나을 뻔했다. 나는 알았다. 아들의 대답을 들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것을. 아이는 그렇게 대답하고도 짧은 순간 엄마의 동요하는 눈빛을 보았을 것이다. 공부가 아닌 다른 길로 힘껏 밀어줄 용기도 없으면서 어쩌자고 대범한 척 아이한테 그렇게 말했을까.


섣불리 다른 길로 가라고 등 떠미는 건 아닐까 걱정스러웠다. '내가 가고 싶은 길은 공부가 아닌 다른 곳에 있다'라고 작정한 아이도 아이인데. 고등학생 때 무엇을 하고 싶은지 자기의 길을 가는 아이들은 도대체 어떤 강심장 엄마 밑에서 자란 걸까. 공부도, 공부가 아닌 다른 진로도 확실하지 않은 채 맞는 아이의 고3은 어떤 시간이 될지 몰라서 두렵다. 그러나 확실한 건 올해도 아이와 나의 마음을 다치지 않고 잘 보내고 싶다는 것이다.


주변에서 "올해 아이가 고3이죠?" 질문을 곧잘 받는다. 질문하시는 분의 표정엔 '올해 힘들겠다, 아이도 엄마도 고생해서 어떡하나' 같은 마음이 읽힌다. 그런 표정을 읽으면 나는 안 그렇다고 손사래를 쳤다. 이제는 좀 힘든 표정이라도 지어야 될 것 같다. 어떤 분은 아이가 정한 목표가 있는지 진지하게 물으신다. 아이가 고3이 되면 엄마는 그런 질문에 대답할 준비를 해 놓아야 되는 것 같다. 아, 아이는 고3이지만, 나는 고3 엄마가 되길 거부하고 싶다. 이 땅의 모든 엄마들이 나 같은 시간을 지났거나, 지나거나, 지나갈 텐데, 이 땅의 모든 고3 엄마들을 응원한다. 아니지, 나는 우리 아이만 응원하면 되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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