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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런썸 Jun 27. 2022

감동받는 사람

아이들이 학교에 돈을 가지고 다니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초임 시절에 분실 사건이 생기면 문제를 해결해야 되는 줄 알고 나섰다가 낭패를 본 경험이 몇 번 있었고 누군가를 의심하게 되는 상황은 학급에 결코 도움이 되지 않는다. 올해도 학기 초에 학교에 돈을 가지고 다니는 것에 대해 말을 꺼냈더니 아이들은 큰돈도 아니고, 집이 먼 사람은 마을버스를 타야 된다며 내 말을 눙쳤다. 학교 옆 아파트 단지가 워낙 크다 보니 끝 동에 사는 아이들은 한여름에 걷기도 힘들 것이다. 게다가 같이 가는 아이들끼리 삼삼오오 편의점에 들러 이것저것 사 먹기도 하는 것 같아 그냥 두고 보기로 했다.   


6월의 어느 날 오후, 여학생 Y가 나에게 할 말이 있다며 왔다. "선생님, M한테 제가 먹을 걸 사줬거든요? 그런데 그 돈을 갚는다고 해 놓고 아직도 안 갚아요." 가슴이 철렁했다. 돈 문제구나. 얼마냐고 물으니 오천 원이랜다. M을 따로 불러서 그런 일이 있었냐고 물으니 맞다고 했다. 사실을 인정하니 다행이었다. 갚기만 하면 되겠구나.


쉬는 시간에 둘을 한 자리에 불렀다. 불러 놓고 대화를 시키니 얘기가 달라졌다. "네가 이자까지 쳐서 갚는다며. 만 원 준다고 했으니까 만 원 받아야겠어." Y가 아까 없던 이자 이야기를 꺼냈다. "내가 언제 그랬냐. 기한이 언제까지 못 갚으면 만원이라고 했지." 나한테 말할 땐 고분고분하게 돈을 빌린 적이 있다던 M도 까칠하게 나왔다. "너 기한 못 지킨 거 사실이잖아. 그러니까 나한테 만 원 줘야 돼." "야, 무슨 소리야. 아니거든."


'이다', '아니다' 문제로 대화가 이어지면 그건 평행선을 린다. 연결이 되지 않는 대화는 마음만 상할 뿐이다. 1단계만  번째 듣고 있는 비폭력대화 연수가 이럴  도움이 다니 경이롭다. 나는 즉각 대화를 중단시켰다.


"Y야, 너 이자까지 받고 싶구나. 내 생각에 친구끼리 이자까지 주는 건 좀 그러니까 그건 Y가 오천 원만 받는 걸로 양보해 주면 안 될까." 대답이 없다. 망설이는 Y를 두고 나는 M을 보며 강경하게 말한다. "대신에 M, 너는 빠른 시일 내에 갚아. 언제까지 갚을 수 있어?" M이 망설이다가 말한다. "여름방학 전까지요." "안돼요. 그건 너무 늦어요. 저는 6월 말까지 받고 싶어요." "안 돼, 나 돈 없어." "나도 하나도 없단 말이야."


결국 두 사람이 조금씩 물러나서 다음 주까지 원금 오천 원을 갚기로 했다. 두 사람 사이에 해결해야 할 문제는 또 있었다. 아까 수학 시간이 끝나고 시험지를 걷으면서 Y가 M한테 욕을 들었다며 사과받고 싶다고 했기 때문이다. 대화는 '욕을 했다, 그런 적이 없다'로 공방이 이어졌고 결국 Y는 분함을 참지 못해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우리가 읽고 있는 책에 '조망 효과'라는 말이 나온 거 기억하니? 우리 시간을 두고 다시 이야기해 보자." 둘은 결국 수업이 끝나고 남기로 했다. '조망 효과'는 우리가 읽고 있는 온작품읽기 책 '우주로 가는 계단'에서 나온 말이다. 우주에서 지구를 보면 전과 달리 볼 수 있다는 뜻이다. 우리는 우주로 갈 수는 없으니까 시간을 두고 생각해 볼 수 있다. 책에서 읽은 문장을 이렇게 실전에 쓰면 쾌감을 느낀다.


나는 안 좋은 말을 들으면 마음이 어지러워진다. Y가 나한테 와서 M한테 욕을 들었다며 세 차례나 반복해서 들려줬을 때부터 기분이 좋지 않은 상태였다. 그 여파로 아이들의 중재도 잘 해결하지 못한 것 같아 마음이 무거웠다. 내가 둘 사이에서 고군분투하고 있는 사이 신나게 떠들고 있는 아이들한테 불똥이 튀었다. "너희는 눈치도 없니? (앞에서 친구가 엉엉 우는데) 이게 남의 집 일이야?"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한 교실에서 내가 하고 싶은 말을 했다.


"나는 아무래도 귀가 약한가 봐. 너희들이 욕을 들어서 억울한 마음으로 나한테 와서 이야기하고 싶어도 들은 욕을 그대로 옮기지 않았으면 좋겠어. 그렇게 옮긴 말이라도 나쁜 말을 들으면 한동안 진정이 안 되는 것 같아. 앞으로는 아무리 분해도 그냥 '욕을 들었어요' 정도만 해 주면 안 될까." 아이들은 진심으로 하는 말은 진심으로 들을 줄 안다. 고맙다.


다음은 체육시간이었다. Y는 시 대표 태권도 선수로 선발될 만큼 운동 기량을 뽐내는 아이다. 체육시간만 기다렸을 텐데 지금 한참을 운 뒤라 얼이 빠져서 기운 없이 구경만 하고 있었다. 오늘은 아이들이 기다리던 배드민턴을 치는 날이었다. "하아, 오늘 H가 결석이라 8명씩 팀을 짰는데 저 팀만 한 명이 비네." 슬쩍 Y 근처에 가서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니 "선생님, 저 들어갈래요." 불쑥 Y가 손을 든다. 잘했다며 얼른 등을 두드려 주었다. "맞아, 앉아 있으면 너만 손해지."


신나게 배드민턴을 치고 와서 남은 6교시까지 마친 후, 아이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마침내 두 사람이 다시 대면한다. 순간, M이 휴대폰 케이스를 열더니 Y에게 불쑥 천 원을 건넨다. Y도 싫지 않은 기색으로 돈을 받았다. 슬며시 웃음이 번진다. 여기에 무슨 말이 필요할까. M의 마음을 움직인 건 수중에 쓸 돈이 하나도 없다던 Y의 말이었을까, 엉엉 울던 모습이었을까. 나 또한 그 자리에서 M이 건네는 천 원을 보고 감동받았다. M이 분명 집에 갈 때 뭐 사 먹으려고 가져온 돈이었을 것이다. "어머, 돈 하나도 없다더니. M아, 선생님 감동받았어." 내가 말하자 Y가 "왜요?" 묻는다.


체육시간에 좀 전까지 통곡하던 Y가 마음을 고쳐 먹고 배드민턴을 치겠다고 나섰을 때에도 감동받았다. 아이들은 자신에게 도움이 되는 것이 어떤 것인지 선택할 수 있고 지금 자신의 감정보다 더 큰 사람이 될 수 있는 존재다. Y를 믿지 못해서 아까운 배드민턴 시간을 저렇게 앉아서 날리면 어떡하나 조바심을 냈던 내가 부끄러웠다. 교사인 내가 하는 일은 아이들 옆에서 감동하는 것뿐이다. 그게 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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