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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익명 Jul 26. 2022

자아탐색일기 7:[성추행]이제는 괜찮다고 생각했지만

치유되지 않은 과거는 어떻게든 현재에 흔적을 남긴다. 

 연애도 했다. 섹스도 했다. 성범죄 관련 뉴스를 들어도 아무렇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괜찮은 줄 알았다. 성범죄 트라우마? 나는 잘 모르겠는걸,이라고 생각했다. 

 중학생 때 가족 몰래 혼자 여행을 나섰다가 한 남자를 따라갔었다. 잠이 들지 않으려고 다짐했지만 전날 고된 여행 일정에 지쳐 이야기를 나누다 잠들고 말았다. 느낌이 이상해서 깨어보니 그 남자가 나를 만지고 있었다. 이게 꿈인지, 잘 구분이 가지 않았다. 벌떡 일어나 가야겠다고 했다. 남자는 당황한 것 같았다. 경찰에 신고하지 말라고 했다. 그제야 믿을 수 없는 이 상황이 현실임을 자각했다. 

 그때 입었던 복장, 장소의 분위기, 나누었던 이야기들이 기억난다. 나는 파란 레깅스에 초록색으로 영어가 적힌 갈색 긴 티를 입고 있었다. 나와서 길을 걸으며 한참을 울었다. 남자가 내 몸을 만졌던 감각이 고스란히 내 몸에 남았다. 더럽게 느껴지는 몸을 씻었다. 그리고 일상으로 돌아가 아무렇지 않은 척했다. 오랜 시간을 내가 왜 그 사람을 따라갔을까 하고 자책했다. 경찰에 신고할 생각은 하지 못했다. 주변 사람들이 “그러게 왜 그 사람을 따라갔어?”라고 말한다면 정말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그 사람은 내가 모르는 사람이고 주변의 모든 사람과도 관계가 없는 사람이니 나만 모른 척하면 없던 일이 될 것 같았다.

 

 몇 년간 이 경험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했다. 5년쯤 후 엄마에게 이 경험을 처음 말했을 때 엄마는 많은 사람들이 그런 경험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이제부터는 좀 더 조심하는 계기가 될 테니 좋은 방향을 생각해보자고 했다. 나는 그때 차라리 떠들썩하게 난리를 치며 신고할걸, 이라고 생각했다. 




 최근 상담을 받다가 오랜 기억을 꺼냈다. 이런 경험이 나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가 궁금했다. 성추행의 경험은 깊은 수치심을 강화한다고 한다. 나의 현재에 이제는 전혀 영향을 미치지 않고 있다고 생각했던 이 경험이 가지는 감정의 뿌리에 관하여 생각했다. 성인이 되고 난 후 꽤 많은 남자들과 가벼운 만남을 가졌다. 그건 분명 자학적 섹스였다. 섹스 중 느꼈던 ‘내가 어떻게 되던지 상관없어. 차라리 죽어버렸으면 좋겠다.’라는 자기 파괴적인 생각, 섹스 후 느꼈던 깊은 수치심들은 모두 나의 성추행 경험에서 그 감정의 뿌리를 찾을 수 있었다. 성범죄의 경험은 정신분석학적으로 정체성의 해체와 관련이 있다고 한다. 성범죄는 단순히 성이나 폭력의 문제가 아니라 한 인간의 정체성과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성범죄는 분노가 내면화되는 깊은 우울증, 반복해서 다양하게 표출되는 자기 파괴적 행동, 자신을 세상으로부터 철수시키는 방어 행동 등으로 인해 생애 전체를 어둡고 후미진 곳으로 몰고 간다. 


 특히 나의 이런 경험들을 주변의 누군가가 알게 되었을 때 그 깊은 수치심은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나를 괴롭게 했다. 그 정도가 정말 심해서 나는 스스로에게 상처를 입히고서야 가까스로 잠에 들 수 있었다. 나는 전혀 괜찮은데?라고 생각했던 성추행 경험은 현재의 나에게 이렇게나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이런 썅. 




 최근 내가 성추행을 당한 그 여행지를 다시 여행했다. 그 장소를 다시 보고 싶었다. 그 남자가 알바를 하고 있던 편의점에는 그 남자와 비슷한, 하지만 부쩍 늙어버린 누군가가 있었다. 그 사람이 그 남자였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그곳을 왜 다시 찾아갔던 걸까. 확인이라도 하고 싶었던 걸까. 뭘 확인하고 싶었던 걸까. 내가 커서 힘이 세지면 그 사람을 꼭 죽이겠다고 다짐했었다. 성인 여자의 힘으로는 불가능할 테니 내 주변의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서라도 꼭 죽여야지 생각했다. 성인이 되어서 다시 그곳을 찾아갔을 때는 그 사람을 죽이고자 하는 마음은 아니었다. 난 그 사람을 용서하고 싶었다. 나의 이 상처가 치유되기를 바랐다. 하지만 나는 아직까지 깊은 수치심과 죄책감에 시달리며 자주 죽고 싶어 한다. 

이곳은 앞으로 내가 자주 찾는 여행지가 될 것만 같다. 언젠가 더 이상 내가 이곳을 찾지 않는 날이 오기를 간절히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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