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든패스 파노라믹 열차로 인터라켄 가기
5시간가량을 자고 아침 7시에 잠에서 깬 나는, 앞으로의 여행을 위해 최대한 수면을 보충하려 했지만 시차 때문인지 잠이 오지 않았다. 결국 그냥 일어나기로 했다. 다른 룸메이트들은 여전히 자고 있었고 방은 여전히 어두웠다.
나는 씻고 조식을 먹으러 내려갔다. 조식은 정말 좋았다. 고급 호텔처럼 요리가 있는 건 아니었지만, 과일, 요거트, 빵, 주스, 햄, 야채 등이 각각 여러 종류가 제공되었다.
아침을 먹으면서 메테오스위스(Meteoswiss. 스위스에서 가장 정확한 날씨 앱)를 보니 앞으로 3일 간 모든 지역의 날씨가 화창했다(참고로 메테오 스위스는 최대 3일 전에 보면 높은 확률로 적중하고, 3일 이후의 날씨는 변경 가능성이 어느 정도 있다고 한다). 스위스 알프스 지역 여행 시 날씨에 따라 뷰 차이가 크기 때문에 날씨는 굉장히 중요하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그날그날의 날씨에 따라 일정을 유동적으로 변경한다. 이때 날씨 앱과 산에 있는 실시간 웹캠을 참고한다. 나도 하루 단위의 계획을 8일 치 짰고, 각 1일 치의 계획을 언제 실행할지는 날씨에 따라 결정하기로 했다.
이제 이번 여행의 대부분을 머무를 인터라켄으로 이동하여 다음 숙소에 체크인을 해야 한다. 든든한 아침을 먹고 체크아웃을 한 뒤 캐리어를 들고 제네바 역으로 이동했다.
제네바역에서 인터라켄으로 가는 방법은 크게 2가지 선택지가 있었다. 하나는 기차를 타고 먼저 베른으로 가서 환승을 하여 인터라켄으로 가는 최단경로인데 이는 약 3시간 정도가 소요됐다. 또 하나는 기차를 타고 먼저 몽트뢰로 간 뒤에 골든패스 라인으로 가는 방법인데 5시간 이상이 소요됐다. 골든패스 라인은 몽트뢰에서 루체른까지 이어지는 기차 노선이다. 이 노선에 골든패스라는 이름이 붙은 이유는 아름다운 경관을 보며 이동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노선에는 여러 기차들이 지나가지만 그중에서도 골든패스 익스프레스라는 기차가 유명하다. 그리고 몽트뢰에서 츠바이짐멘까지의 한 구간만 '골든패스 파노라믹'이라는 파노라마 열차가 운행된다(23년 6월부터는 추가로 하루에 딱 4번 몽트뢰~인터라켄을 잇는 골든패스 파노라믹 열차가 운행됨). 골든패스 파노라믹 열차는 스위스에서 '베르니나 익스프레스', '빙하특급'과 함께 손꼽히는 3대 파노라마 열차이다. 파노라마 열차는 아름다운 경관을 더 잘 감상할 수 있게 해 준다.
나는 첫날부터 주요 관광지를 바쁘게 가기보다는 여유롭게 스위스의 느낌을 만끽하고 싶었다. 예전에 혼자 일본 여행을 할 때 첫날부터 타이트한 일정을 짰다가 낭패를 본 경험 때문이기도 했다. 그래서 나는 골든패스 라인을 따라 굳이 돌아서 인터라켄까지 가기로 했다. 스위스 트래블 패스(이하 스위스 패스)가 있다면 스위스의 대부분의 기차는 무료이기 때문에 별도로 티켓을 구입하지 않아도 골든패스 열차에 탑승할 수 있다. 하지만 좌석이 없는 경우 서서 가야 해서 제대로 풍경을 즐길 수가 없고, 나는 좋은 자리에 앉고 싶었기 때문에 몽트뢰로 가는 기차 안에서 스마트폰으로 좌석 예약을 했다. 골든패스 파노라믹 열차는 몽트뢰~츠바이짐멘 구간만 수시로 운행했기 때문에, 이를 타려면 츠바이짐멘에서 다른 열차로 환승해야 했다. 그래서 몽트뢰~츠바이짐멘, 그리고 츠바이짐멘~인터라켄 이렇게 2번의 좌석 예약이 필요했다. 예약 비용은 구간에 따라 한 번에 1~2만 원대였다.
잠시 뒤 몽트뢰역에 도착했고, 화장실을 다녀오기 위해 이정표를 따라가니 유료 화장실이 있었다. 가격은 1프랑. 한화로 약 1,500원이었다. 스위스는 기차역에 있는 화장실의 상당수는 유료였다. 돈을 내고 화장실을 가야 한다니. 이런 경험이 처음이었던 나는 돈을 내고 싶지 않았지만 근처에 다른 화장실이 없어서 어쩔 수 없이 애플페이로 결제를 한 뒤 들어갔다. 상태는 아주 좋지는 않았는데 사용을 마치고 밖에 나가니 현지인으로 보이는 어떤 여성분이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문이 닫히기 전에 돈을 지불하지 않고 화장실에 들어갔다. 나는 굉장히 당황스러웠다. '원래 다들 이러나..?'라고 생각하고 다시 탑승하는 장소로 가 조금 기다려서 골든패스 파노라믹에 탑승했다.
타고 보니 유료로 예약한 것이 무색하게 빈자리가 더 많았다. 성수기에는 자리가 없는 경우가 있다고 들었는데 9월 말에는 자리가 넉넉했다. 기대했던 대로 뷰는 굉장히 예뻤다. 다른 일반 파노라마 열차들보다 옆 유리창과 위쪽 대각선 유리창 사이가 가까웠다. 이 풍경을 눈으로만 담기가 아쉬워 캐리어에서 삼각대를 꺼냈다. 다행히 왼쪽 건너편에 4자리가 모두 비어서 삼각대를 설치하고 사진과 영상을 찍다 보니 금방 츠바이짐멘에 도착했다.
다음으로 인터라켄으로 가기 위해 일반 골든패스 익스프레스 열차로 갈아탔다. 이 열차는 몽트뢰에서 인터라켄까지 가는 열차여서인지 자리가 거의 없었다. 내가 예약한 자리로 가보니 누군가가 앉아있길래 직원에게 말했다. 직원이 독일어로 추정되는 언어로 뭐라고 이야기를 하니 원래 앉아있던 분은 다른 자리로 갔다. 옆에 분들과 일행인지 얘기 중이었는데 그 자리에 앉으니 그때부터 모두 조용해져서 뭔가 내가 쫓아낸 것 같아 조금 뻘쭘했다. 일반 골든패스 열차는 유리창 사이의 거리는 조금 더 멀었지만, 츠바이짐멘에서 인터라켄으로 가는 길의 풍경은 개인적으로는 이전 구간보다 더 예쁘게 느껴졌다. 하지만 풍경을 계속 보다 보니 얼마 되지 않아 조금 질려서 아까 찍은 영상을 정리하다 보니 어느새 왼쪽에 인터라켄의 툰 호수가 보였다. 툰 호수의 색은 아름다운 에메랄드 빛이었다. 나는 열차 내 사람들과 함께 툰호수의 풍경을 열심히 찍었다.
인터라켄 서역에 도착하여 캐리어를 끌고 숙소로 향했다. 이곳이 그 말로만 듣던 인터라켄이구나 싶은 마음으로 걸어가는데 위를 올려다보니 패러글라이딩을 하는 사람들이 보였다. 패러글라이딩 착지 장소인 잔디밭을 왼쪽에 끼고 걸어가다 보니 소들이 울리는 종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스위스에서는 소들의 목에 종을 달아놔서 풀을 뜯을 때 계속 종소리가 나는데 여러 마리의 소들에 의해 종소리가 울리면 정말 아름다운 소리가 난다.
소들이 풀을 뜯고 있는 잔디밭 바로 옆에 위치한 숙소 '백패커스 빌라 소넨호프'에 도착하니 딱 체크인 시간인 오후 4시가 되었다. 체크인을 하는데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이 숙소는 굉장히 인기 있는 곳이라 내가 예약할 때 당시에 6~7인용 남녀 혼성 도미토리 외에는 방이 거의 없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6~7인용 혼성 도미토리로 예약했는데 갑자기 4인실로 업그레이드를 해주는 것이 아닌가! 게다가 내가 두 번째로 와서 남은 1층 자리를 겟할 수가 있었다(4인실에는 2개의 2층 침대가 있고, 자리 배정은 선착순이다). 짐을 풀고 숙소 이곳저곳을 둘러보는데 생각했던 것보다도 더 좋아서 굉장히 만족스러웠다. 방 안에는 카드키로 잠글 수 있는 사물함이 있어 캐리어를 넣을 수 있었고, 세면대와 변기가 있는 화장실이 있었다. 그리고 각 층마다 공용 샤워실 겸 화장실이 있었다.
미리 알아둔 근처 자전거 대여점에 걸어가서 전기 자전거를 대여했다. 일반 자전거를 타면 다리가 아프다는 후기를 봤고, 앞으로 트레킹 일정이 많기 때문에 전기자전거를 대여했다. 비용은 1시간에 약 4만 4천 원 정도. 꽤 비쌌다.
자전거를 타고 인터라켄 동쪽에 있는 브리엔츠 호수로 향했다. 호숫가에 가니 일정 거리마다 벤치들이 있었고, 이곳에 앉아 여유롭게 쉬는 사람들과 호수 구경을 하는 사람들만 조금 있어서 한적했다.
여기에 이슬람 국가에서 오신 것으로 보이는 외국인 두 분이 있었는데, 내가 선글라스를 끼고 자전거를 타고 가던 중 한 분이 뜬금없이 '너 엑소의 백현 같아'라고 했다. 전혀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에 어이없음의 웃음이 나왔고 땡큐라고 하고 빠르게 자리를 떴다(엑소 잘 모르시는 듯..).
호수를 따라 더 가다 보니 벤치가 하나 있었는데 딱 사진 찍기 좋아 보여 자전거에서 내렸다. 자전거를 한쪽에 세워두고 삼각대를 설치해 사진을 열심히 찍고 있는데 웬 백조 한 마리가 잔디밭으로 올라와 잔디를 뜯어먹는 것이 아닌가! 너무 귀엽고 신기해서 또 열심히 사진을 찍었다. 내가 가까이 다가가면 백조는 나를 물려는 듯 내 쪽으로 다가왔다. 이렇게 놀다보니 어느새 자전거 대여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 자전거를 빌렸던 곳으로 가서 반납한 뒤 숙소로 돌아갔다.
숙소로 돌아가니 방 테라스에 어떤 사람이 앉아 있었다. 문을 열어보니 나보다 먼저 와있었던 한국인이었다. 테라스에서 보이는 융프라우가 아름다워 잠시 앉아서 바라보고 있다고 했다. 가볍게 인사를 하고 방으로 들어와 이야기를 나눴다. 들어보니 나보다 하루 먼저 스위스에 왔다고 했고, 앞으로의 여행 계획이 나와 거의 일치한다는 것을 알게 됐다. 가려고 하는 곳, 하루 단위로 계획을 한 것, 날씨에 따라 유동적으로 계획을 정하려고 한 점, 심지어 융프라우요흐를 갈 필요가 있을지 고민 중인 것까지 같았다.
우리는 우선 오늘 저녁을 같이 먹기로 했다. 그분께서 COOP 마트(스위스 최대 마트 체인 중 하나)에서 사 둔 소시지가 있어서 구워주겠다고 하셨다. 나는 한국에서 챙겨 온 햇반 하나를 꺼내 지하에 있는 공용 주방으로 가서 같이 맥주 한 잔과 함께 저녁을 먹으며 이야기를 나눴다. 대화를 해보니 서로 굉장히 성향이 비슷하다는 걸 느꼈고, 같이 동행을 한 번 해보기로 했다. 둘 다 어느 정도 혼자 다니고 싶어 하는 마음이 있었고, 실제로 동행을 했을 때 둘 다 만족스러울지는 두고 봐야 하기 때문에 조심스럽게 제안을 하신듯했다. 식사를 마치고 다음날 일정을 위해 씻고 잠시 바람을 쐬러 테라스에 나갔는데 잠시 뒤에 칠레에서 온 또 다른 룸메가 테라스로 나왔다. 인사를 하고 얘기를 하다가 그 친구가 나한테 한국에서 무슨 일을 하냐고 물어봤다. 내가 소프트웨어 엔지니어라고 하니 놀라면서 자신도 그렇다고 했다. 열심히 기술 관련 대화를 하고 나서 링크드인과 인스타그램을 교환하고 나는 침대로 와 잠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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