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생의 첫 스카이다이빙
나는 버킷리스트라는 걸 명확하게 어딘가에 적어놓고 하나씩 지워나가는 사람은 아니다. 하지만 스스로 내 버킷리스트에 있다고 말하고 다니는 것들이 몇 가지 있었다. 스카이다이빙, 번지점프, 피라미드 보기, 오로라 보기 같은 것들이었다. 스카이다이빙을 한다면 기왕이면 스위스 알프스에서 아름다운 풍경을 보며 하고 싶었다. 그래서 내 버킷리스트에는 단순히 '스카이다이빙 하기'가 아니라 '스위스 알프스에서 스카이다이빙하기'가 있었다. 이번 여행에서 꼭 스카이다이빙을 하겠노라 마음먹었다.
하지만 스위스에서 머무는 8일(첫날과 마지막날 제외)이라는 시간이 생각보다 그리 길지는 않았다. 여행 전 열심히 조사를 해보니 꼭 가야 한다고 생각되는 곳이 생각보다 많았다. 그렇게 스카이다이빙은 내 마음속에서 우선순위가 조금씩 밀렸다. 비싼 가격도 한몫했다. 셀프카메라로 찍어주는 사진과 영상까지 구매하면 총비용이 88만 원 정도였다. 다른 나라에서는 이 정도까지 비싸진 않던데, 스위스가 전 세계 통틀어서 가장 비싼 듯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안 할 수는 없지, 내 버킷리스트인데. 이번 여행에서만큼은 돈이 아까워 결정을 망설이던 지난날의 모습은 잠시나마 넣어두기로 마음먹었다.
전날 룸메에게 스카이다이빙을 할 거라고 얘기했다.
룸메: "어우 어떻게 될까 무섭지 않으세요? 저는 누가 천만 원을 준 대도 절대 안 할 거예요."
나: "큭큭. 저는 사고가 나는 극히 일부의 사람이 제가 될 가능성이 거의 없다고 생각을 하니 무섭지 않은 것 같아요."
룸메: "저는 그 가능성을 왜 굳이 시험을 하는지 잘 이해하지 못하겠어요. 하하"
일리가 있었다. 하지만 나는 오늘 그 가능성을 시험해 보리.
내가 스카이다이빙을 오늘 하기로 한 이유는, 오늘은 다른 날들보다 구름이 많은 날이기 때문이었다. 구름이 없는 맑은 날은 다른 일정에 양보하고 싶었다. 왜냐면 스카이다이빙은 구름이 어느 정도 있어도 괜찮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어차피 짧은 순간이고, 하늘에서 뛰어내리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의의가 있으며, 지상을 내려다보는 시간이 대부분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반면, 산에 올라가서 저 멀리 풍경을 감상하는 상황에서는 구름의 양이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했다.
스카이다이빙이 끝나면 정오 즈음이 되는데, 이후 일정은 외시넨 호수와 블라우 호수를 보러 가기로 했다. 호수에서는 산에서처럼 멀리 내다보는 것도 아니고 호수 자체로도 예쁘기에 산에 오르는 것보다 하늘의 영향을 훨씬 덜 받을 거라고 생각해서였다.
8시 30분에 숙소 앞에서 스카이다이빙 업체의 픽업 차량에 탑승했다. 픽업용 밴 안에는 나 말고 아무도 없었다. 차를 타고 조금 더 가다가 한국인 한 분이 탑승했다. 이야기를 해보니 혼자 이탈리아 시칠리아 섬에 있다 어제 스위스로 넘어왔다고 했다. 전에 호주에서 스카이다이빙을 했었는데 좋았어서 이번에 또 하는 거란다. 이야기를 하면서 조금 더 가다 보니 한국인들이 6명 정도 더 탑승했다. 인터라켄에서 픽업을 모두 마치고 이제 다이빙 장소로 이동하기 위해 툰 호수를 따라 달렸다. 하늘을 올려다보았는데 생각보다 구름이 많지 않았다. 최근 며칠 동안은 구름이 아예 없었다 보니 날씨앱에 구름 표시를 보고는 잔뜩 쫄았는데, 알고 보니 내가 생각했던 만큼의 양은 아니었다.
스카이다이빙 장소까지 가는 동안 사고와 관련된 동의서와 사진, 영상 등 어떤 것을 구매할 것인지 적는 종이를 나눠줬다. 보통 스카이다이빙 비용과 별개로 사진 및 영상 구매 비용을 내야 한다. 사진 및 영상 구매는 선택지에 따라 가격이 천차만별이다. 두 가지를 선택한다고 보면 되는데, 첫 번째로는 나와 함께 붙어서 뛰는 전문 다이버가 셀프 카메라로 찍은 것을 살지, 우리와 함께 뛴 또 다른 전문 다이버가 제삼자의 시점에서 찍은 것을 살지, 아니면 둘 다 살지를 골라야 하고, 두 번째로는 사진만 살지, 영상만 살지, 둘 다 살지를 골라야 한다. 나는 셀프 카메라로 찍은 사진과 영상 모두를 구입하기로해서 170프랑을 추가 결제해야 했다. 다이빙 비용이 410프랑이니 합쳐서 한화로 대략 88만 원 정도인 셈. 역시 가격이 아주 후덜덜하다.
동의서의 내용은 영어로 적혀있었다. 나는 보통 충분히 읽어보고 서명을 하는 편인데 내가 마지막으로 작성할 차례가 되자 이미 목적지에 도착해서 제대로 읽고 서명을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설마 무슨 일이야 나겠어?'라고 생각하고 대충 서명을 했다(이러면 안 된다).
픽업 및 드랍 서비스를 해주어서인지 목적지가 어딘지는 사전에 말해주지 않았다. 그런데 오는 길에 지도 앱으로 보니 자꾸만 내 다음 행선지인 외시넨 호수 쪽으로 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알고 보니 다이빙 장소는 인터라켄에서 외시넨 호수에 가는 길 중간쯤에 위치해 있었다. 이게 웬 횡재냐 싶었던 나는 픽업 차량 기사에게 가서 말했다.
"나 이거하고 Frutigen 역(외시넨 호수로 가는 기차가 지나는 기차역)에 가야 하니까 근처 역에 내려줄 수 있어?"
"알겠어. 대신 내가 까먹을 수도 있으니 이따 한 번 더 말해줘!"
스카이다이빙 슈트를 받고 짐을 라커에 넣었다. 사이즈가 조금 작아서 직원에서 말하니 한 사이즈 큰걸 줘서 갈아입었다. 그리고는 다 같이 간단하게 다이빙 시 어떻게 자세를 취해야 하는지 등에 대한 교육을 들었다. 나는 2조가 되었는데, 1조가 먼저 다이빙을 하고 비행기가 돌아오면 2조가 이어서 하는 식이었다. 1조가 다이빙을 하는 동안 아까 두 번째로 차에 탑승했던 한국 분께 사진을 찍어달라고 부탁드렸고, 혼자 삼각대로도 여러 장 찍었다.
1조 멤버들이 하나둘씩 지상에 착지했고, 이 중 아까 이야기를 나누었던 한 분을 보니 한껏 들떠 보였다.
"처음으로 스카이다이빙을 해보신 느낌이 어때요?"
"와 진짜 너무 재밌어요! 저는 다음에 또 할 의향이 200% 있어요!"
여운이 가시지 않았는지 연신 '와..'라며 감탄하는 표정만 봐도 그의 기분이 온전히 느껴졌다. 나도 한껏 기대되는 마음으로 활주로와 잔디밭을 가로질러 경비행기 쪽으로 걸어갔다. 출발하기 전에 나와 매칭된 전문 다이버가 액션캠으로 나에게 소감을 묻는 영상을 찍었다. 지금 기분이 어떠냐고 물어봐서 '약간 긴장되지만 분명 재미있을 것 같다'라고 했고, 다이버는 '당연히 그럴 거다'라고 했다. 들어보니 이 다이버 분은 1,000번 이상을 뛴 베테랑이라고 했다. 겉보기에도 다른 다이버들보다 훨씬 연륜이 있어 보였다. 경비행기 앞에서 마지막으로 한 마디를 하는 모습을 찍고 경비행기에 올라탔다.
비행기가 활주로를 달려 하늘로 날아올랐다. 고도가 계속해서 올라가는 동안 창밖의 풍경이 정말 너무 예뻤다. 넓디넓은 호수와 아름다운 도시가 점점 작은 장난감처럼 보였다. 이때는 전혀 무섭거나 긴장되지 않고 그냥 편안하게 아름다운 풍경을 감상하는 느낌이었다. 내가 평소에 놀이기구를 안 무서워하기도 하고, 아직까지는 실감이 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다른 다이버들은 열심히 자신이 맡은 이들에게 말을 걸고 있었다. 나와 뛰는 전문 다이버는 액션캠으로 열심히 창 밖 풍경을 찍는데 열중했다. 나중에 영상을 받고 나니 바깥 풍경이 너무 멋있게 편집되어 있어서 만족스러웠다. 비행기에는 취미로 스카이다이빙을 하는듯한 서양인 2명도 같이 탔다. 자신들이 평소에 사용하는듯한 다이빙 슈트를 입고 왔고, 같이 뛰는 사람 없이 스스로 뛰는 모양이었다.
슬슬 적정 높이에 도달했는지 점프를 하는 순서를 알려줬다. 나는 두 번째 차례였다. 그리고는 나와 같은 체험 다이버들에게 고글을 나눠줬다. 조금은 조잡한 모양새의 고글이었다. 전문 다이버들은 헬멧을 썼는데 우리에게는 아마 좀 더 넓은 시야로 풍경을 감상할 수 있도록 고글을 주는 듯했다. 고도 측정기는 이제 4,400m를 돌파했다고 말하고 있었다. 참고로 알프스에서 제일 높은 산인 프랑스의 몽블랑이 4,804m 고, 어제 본 마테호른이 4,478m이다.
조금 뒤 갑자기 비행기 문이 열렸다. 비행기 문이 열리고 나니 갑자기 분위기가 완전히 바뀌었다. 문이 닫혀있을 때는 사실 그냥 일반 여객기를 타는 것과 느낌이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문이 열리는 순간 온도, 소리, 공기, 이 모든 것이 바뀌었다. 4,400m 상공의 찬 공기가 안으로 매섭게 몰아쳤다. 사람이 말하는 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아 소리를 쳐야 들릴까 말까 했다. 내가 여기서 뛰어내린다는 사실이 확 실감이 났다.
문이 열리고 특별한 준비 과정도 없이 순식간에 첫 번째 팀이 뛰어내렸다.
'이렇게 바로 뛰어내린다고..?'
바로 이어서 나와 함께하는 다이버가 뒤에서 나를 안고 앉은 상태로 문 앞으로 갔다. 그리고 나는 배운 대로 양손으로 어깨끈을 잡고 고개를 뒤로 젖히고 스마일을 했다. 그리고는 바로 점프! 점프하는 순간부터 놀이기구를 탈 때 그 간 떨어지는 느낌보다 강한 느낌이 약 십 초 간 이어졌다. 그리고 나는 입을 벌리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여행 준비 당시 유튜브로 스카이다이빙 후기를 찾아봤었는데, 입을 벌리면 엄청난 양의 공기가 입안으로 들어가고, 입안의 수분을 금세 마르게 해서 입 안이 따갑다는 것이었다(이러한 모습이 나중에 영상에 그대로 찍혔는데 굉장히 웃기고 추했다..ㅋㅋ).
높은 곳이라 공기가 적어서 그런 건지, 아니면 반대로 엄청난 양의 공기가 얼굴에 부딪혀서인지 조금은 숨을 쉬기가 힘든 느낌이었다. 내 앞에서는 또 다른 전문 다이버가 나를 'ㅋㅋ 어때 재밌지? ㅋㅋ'라는듯한 표정으로 계속 바라봤다. 내 뒤에 다이버가 오른손으로 내 어깨를 툭툭 쳤다. 이건 어깨끈을 잡고 있는 손을 놓고 앞으로 뻗으라는 의미라고 교육 시간에 들었다. 나는 양손을 앞으로 내밀고 주먹을 쥐기도 하고, 슈퍼맨처럼 한 순을 뒤로 하는 자세를 하기도 했다. 앞에 있는 다른 다른 다이버를 보거나 포즈를 취하는데 열중한 나는, 내가 아직까지 풍경을 제대로 보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고 열심히 주변 풍경을 둘러봤다.
1분쯤 지났을까, 낙하산이 펼쳐졌다. 자유낙하를 하는 시간은 역시 짧게 느껴졌다. 낙하산이 펼쳐진 채로 주변 풍경을 감상했다. 회전하는 일명 '빙글빙글'(?)이라는 것도 했는데 재밌지만 조금 어지러웠다. 열심히 멀리 있는 풍경도 보고 아래도 내려다보고 하다 보니 금방 지상에 도착했다. 교육할 때 물어보니 자유낙하 1분에 낙하산 5분이라 지상에 다다르는 데까지 총 6분이 걸린다고 했던 것 같은데 그것보다도 짧게 느껴졌다. 내리고 나서 뛴 소감을 묻는 질문에 대한 답을 하는 것을 액션캠으로 찍고 나서 다이빙이 마무리됐다.
스위스에서 인생 첫 스카이다이빙을 한 소감은 조금은 아쉽다는 것이었다. 물론 태어나서 한 번도 해보지 못한 완전히 새로운 경험이었기에, 나쁘지 않았고 한 번쯤은 해 볼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스릴감도 생각보단 덜했고, 무엇보다 너무 짧게 느껴졌다. 풍경을 제대로 즐길 여유가 없었다. 뛰어내리는 순간 숨은 잘 안 쉬어지고, 포즈도 신경 쓰고, 앞에 다이버도 보고, 뒤에 다이버의 사인도 받고, 주변 풍경도 보고 이걸 자유낙하하는 1분도 안 되는 시간 동안 한 번에 다 하려니까 정신이 없어서 제대로 즐기지 못한 기분이었다. 그래서인지 다이빙을 할 때 본 풍경도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자유도가 없다는 것도 한몫하는 것 같다. 전에 세부에서 했던 액티비티인 카와산 캐녀닝, 오슬롭 고래상어 스노클링, 그리고 스쿠버다이빙은 자유도가 높아서 자연의 무서움과 살아있음을 온몸으로 느꼈다. 반면 이번에 한 스카이다이빙은 그냥 조금 더 스릴 있는 놀이기구를 타는 느낌이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팔을 움직이고, 소리를 지르고, 표정을 바꾸는 것 뿐이기 때문. 만약 혼자 뛰어내린다면 훨씬 재미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사실 스카이다이빙이 생각보다 시시하지는 않을까 조금 걱정하긴 했었다. 그래서 줄 하나에 의지하여 스스로 뛰어내리는 스톡호른(Stockhorn) 번지점프도 하려고 했으나 시간이 너무 오래 소요되어(5시간) 포기했고, 여유롭게 풍경을 즐기기 좋아 보였던 패러글라이딩도 스카이다이빙으로 충분히 비슷한 경험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싶어 하지 않기로 했다. 같이 뛰었던 어떤 한국 분은 스카이다이빙보다 패러글라이딩이 더 무서웠다고 말하기도 했다.
만약 가격이 88만 원이 아닌 30만 원이었다면 어땠을까? 아쉬움은 덜 했을 것 같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더 재미가 있어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어찌 되었든 중요한 건, 가격이 88만 원일지라도 절대로 후회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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