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연 있는 파스타 3. 흑임자 크림 고구마 파스타
근래 위장이 예민한 탓에 평일에는 식단 조절을 하던 탓에 고구마와 닭가슴살을 자주 먹게 되었고, 특히 정량에 맞춰 먹다 보면 때론 남게 되기도 합니다. 이런 남은 재료들도 헛되이 버리고 싶지 않은 마음에 어떤 요리로 담아볼까 고민해 보았습니다.
그러던 중 저처럼 소화불량에 시달려 오시던 한 분이 떠올랐습니다. 20여 년간 신장 질환 속에 한 끼 조차 쉽게 드시지 못했던 저희 할머니께서도 드실 수 있던, 제가 준비한 소소한 한 끼를 생각하며 만들었습니다.
평소 요리를 하다 보면 유달리 손이 자주 가는 재료들이 있곤 합니다. 누군가를 생각하며 요리했을 때 그때의 그 맛을 그 사람이 좋아해 줬다면 더 오래 기억에 남을 텐데요.
이번 요리의 주재료인 흑임자가 그런 이유에서 손이 자주 갑니다. 흔히 흑임자 좋아한다 하면 할미 입맛이란 얘기를 종종 듣게 되곤 하는데요. 그 말마따나 제가 싸온 흑임자죽을 좋아해 주셨던 저희 할머니가 떠올라 왠지 모를 애착이 가곤 합니다.
그리고 그 맛을 제가 좋아하는 파스타 한 그릇에 옮겨올 수 없을까 하는 생각에서 이번 요리를 준비하게 되었습니다.
재료
마늘 12쪽, 양파 1/2개, 양송이버섯 6개, 무순 반 줌, 고구마 1개, 닭 가슴살 한 덩어리, 흑임자 한 컵, 코코넛 밀크 200ml, 생크림 200ml, 리가토니 1인분,
할머니께서 병상에 계시던 무렵, 흑임자죽을 싸들고 간 적이 있었습니다. 흑임자가 소화에 도움이 된다는 얘기를 익히 들어온 터라 드시기 편하게 죽으로 만들어 보았고 평소 즐겨 드시던 고구마도 여기에 어울리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함께 곁들여 보았습니다.
병문안 중 위로를 건네듯 포근함이 가득한 따뜻한 흑임자죽의 맛을 제가 좋아하는 파스타에도 담아보고 싶었습니다. 끈끈한 마음이 담긴 듯한 죽의 느낌을 부드럽게 담아내기 위해 코코넛 밀크를 사용한 크림 파스타로 만들어 보았습니다. 그리고 적당한 씹을 거리와 함께 더 빨리 기운을 차리게끔 도와줄 듯한 닭가슴살을 더했습니다. 마지막으로 한입에 먹기 편한 리가토니면을 사용했습니다.
4컷 레시피
1. 코코넛 밀크 200ml와 생크림 200ml, 삶은 고구마 1/2개와 흑임자 한 컵을 블렌더를 통해 곱게 갈아
흑임자 크림소스를 만들 준비를 합니다.
2. 마늘, 양송이는 편 썰기, 양파는 잘게 썰기, 고구마는 깍둑썰기, 닭가슴살은 결대로 찢어줍니다.
3. 버터 2조각에 양파 1/2개를 넣고 캐러멜 라이징 한 후 마늘, 닭가슴살, 양송이버섯 순으로 볶습니다.
이때, 리가토니면을 10-12분가량 삶아 준비합니다.
4. 면을 삶는 중 채소의 식감이 살짝 살아있을 무렵 준비한 크림소스를 넣습니다. 이후 익은 면을 소스와 함께 섞고 마무리 플레이팅 과정에서 삶은 고구마 1/2개와 무순을 올려 마무리합니다. 치즈의 느낌을 대신해 보다 한국적인 느낌을 가미하고 싶다면 들깨가루를 곱게 뿌려줍니다.
평소 파스타를 좋아하면서도 소화불량으로 자주 먹기 어려운 저도 부담 없이 먹을 수 있는 한 그릇이었습니다. 흑임자에서 느껴지는 넉넉한 인심과 편안함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파스타였습니다.
함께 곁들인 음료 또한 평소 명절 기간 본가에 내려가면 할머니께서 자주 내어주시던 식혜로 올려봤습니다. 고즈넉함과 단맛이 느껴지는 식혜가 흑임자와 함께 어쩐지 더 정감 있게 어우러지는 듯했습니다.
사실, 저희 할머니에 대해 마냥 좋은 인상만 남아있던 건 아니었습니다. 저에겐 그저 다정한 분이셨고
오랜 투병생활 속에 하루하루를 힘겹게 견뎌오신 분이셨지만 때론 저희 어머니께 있어 한없이 모진
시어머니 셨기에 간혹 애증의 존재로 느껴지곤 했습니다.
그렇지만 생의 끝무렵, 당신께서 제가 준비한 소박한 흑임자죽 한 그릇을 싹싹 비우시고 냉장고에도 두고두고 보관하며 꺼내드셨던 그때의 기억은 어쩌면 제가 지금껏 요리를 해온 순간 중 가장 자부심을 가질만한 순간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제 기준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해본 제대로 된 효도였지만 그때 주고받은 온정은 지금도 마음속에 자연스레 스며들곤 합니다.
그리고 흑임자뿐만 아니라, 또 다른 그분의 흔적이 제 주변에 남아있습니다. 죽과 함께 전해드렸던 작은 다이어리인데요. 평소 다양한 수첩에 이것저것 기록하는 습관을 가지고 계시던 터라, 제가 곁에 있지 못할 때 소소한 적을 거리 속에 당신의 하루가 기록되길 바라는 마음에서 선물했습니다. 그 마음이
왠지 모르게 선명하게 남아서 인지 오늘의 저도 비슷한 모양의 다이어리 속에 제 하루를 기록해보곤 합니다.
당신이 사무치게 그립다거나 후회가 많이 남는다는 둥 그런 격한 감정이 남아있진 않습니다. 다만, 그 무렵 당신과 함께 주고받은 찰나의 온정이 제 일상 곳곳의 흔적에 알게 모르게 나타나곤 합니다.
어쩌면 과한 비약처럼 느껴질 수 있지만 저에게 있어 당신과의 기억이 소소하게 남아 있는 한 상이 었습니다. 꼬여가는 속을 풀어주는 흑임자처럼, 조금은 넉넉한 마음만 가져갈 수 있는 제가 될 수 있길 바라는 마음에서 글을 마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