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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야감 Oct 25. 2024

배추벌레

46문장

수그린 남자의 등에 잠자리가 앉았다. 수확의 계절이 왔다. 그의 등은 마치 활처럼 굽었지만 탄력 있는 근육이 힘을 머금고 있었기에 세월에 굴복한 노인의 그것과는 사뭇 달랐다. 그는 손을 부지런히 움직여 배추를 뒤적거렸다. 좁다란 땅에 일군 텃밭이라 많은 작물을 심기 힘들어도 그는 살뜰히 그곳을 활용하였다. 배춧잎도 수확을 애타게 기다리는 듯 푸른 잎을 활짝 펼치고 있었고 무는 부끄럽지도 않은지 하얀 몸을 반쯤 땅 위로 내비치고 있었다.


남자의 눈에 걸린 것은 배춧잎에 숭숭 뚫린 구멍이었다. 농약까지 쳤건만 이 놈의 배추벌레들은 여전히 활개를 치고 다녔다. 그럼에도 몇십 년 동안 작물을 살펴온 그의 날카로운 시선을 피할 수는 없었다. 잠시 살피고는 재빨리, 하지만 정확히 손을 뻗어 벌레들을 집어 올렸다. 배춧잎 색의 놈들은 나를 놓으라는 듯 손가락 사이에서 격렬히 연체의 몸을 꿈틀거렸다. 은신처 밖으로 휙 던져져 버려, 이제 그를 보호해 줄 수 없는 흙 위에서 그 모습은 매우 적나라했다.


한 마리, 두 마리, 세 마리.


연쇄구멍범들이 차례로 검거되었지만 얼마나 많은 공범이 있을지 그 조차도 가늠할 수는 없었다. 언제까지 벌레를 잡고 있을 수 없는 노릇이라 숨어있는 놈들에 대해서는 그들의 운을 치하하기로 했다.


문득 인기척이 느껴져 옆을 돌아보니 소년이 서있었다. 멀찌감치에서 발그레한 얼굴로 땅에서 꿈틀거리는 벌레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가까이 와서 볼래?"

"그래도 돼요?"


"안될 거 뭐 있겠니. 이놈들 이제 너한테 맡기마"


소년은 벌레 앞에 쪼그려 앉아 고개를 수그려 눈의 초점을 모았다. 호기심과 두려움을 가늠하던 저울이 한쪽으로 기우는 순간 충동적으로 손가락을 뻗어 그중 한놈을 톡 건드렸다. 눈앞에 음식을 뺏겨버린 분노가 더 큰 벌레들은 그 손가락질에는 관심도 없는듯했다. 이번에는 조심스레 한 마리를 집어 올려 눈앞에 대롱대롱 거리는 놈을, 입술을 동그랗게 모은 채 바라보았다. 어찌 이 작은 생명체가 이런 세밀한 만듦새를 갖춘 것인지, 도대체 디자이너는 누구일까.


"배추벌레가 그렇게 신기하니?"

"얘네가 배추벌레예요?"


"배추 색깔처럼 초록초록하지? 그놈들이 잎을 뜯고 먹고 자라 나비가 되는 거야"

"이게 나비가 된다고요?"


"저기 날아다니는 하얀 나비 보이니? 자라서 저렇게 되는 거란다"

"정말요? 몰랐어요. 저는 나비는 태어나자마자 나비인 줄 알았어요"


"태어나자마자 그랬으면 우리도 좋겠다. 기껏 길러놓은 배추에 이렇게 구멍을 숭숭 뚫어버리니 원. 일일이 손으로 잡을 수 도 없고"

"할아버지, 그럼 제가 잡아도 돼요?"


"네가 잡는다고? 됐다. 난 너 챙겨줄 일당 없어"

"돈은 필요 없어요. 그냥 잡게만 해주세요"


"네가 원한다면 잡는 걸 막지는 않겠지만.. 잎이 상하지 않게 조심만 해주렴"


소년의 낮이 가득해졌다. 잠시도 쉬지 않고 배추밭을 이리저리 옮겨 다니며 열심히 배추벌레를 추적했다. 남자의 당부도 머리 한편에서 잊지 않아 그의 발걸음과 손짓은 조심조심 섬세했다. 이미 배 터지게 먹은 녀석을 검거하기도 하고 이제 막 식사를 시작하려는 녀석을 적발하기도 했다.


"너는 좀 억울하겠다. 그래도 어쩌겠어, 이리 와!"


흙밭에 나뒹구는 배추벌레가 하나 둘 쌓여가고 하늘은 점차 붉은빛으로 물들어갔다. 소년의 배에서 난 꼬르륵 소리가 종료령이었다. 조금은 쌀쌀해진 공기를 느끼며 허리를 펴고 고개를 돌렸다. 저 산 넘어 감추어가는 해에 배추벌레들이 거무죽죽해 보일 무렵이었다. 소년은 별안간 바닥에 모아진 벌레들을 흙과 잔뜩 양손에 퍼올리더니 어딘가로 달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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