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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네잎 Dec 27. 2023

雜(잡)

-  정진혁 시인의 네 번째 시집 『드디어 혼자가 왔다』 출간

* 본 글은 인터넷 신문 [미디어 시in] 2023.12.26에 올린 기사입니다.


정진혁 시인의 네 번째 시집 드디어 혼자가 왔다』 파란시선으로 출간     


내가 나로 존재하는 방법을 모색하는 시심(詩心)     

 

    

김네잎 기자  


        

정진혁 시인이 네 번째 시집 『드디어 혼자가 왔다』를 파란시선으로 출간했다. 2008년 《내일을 여는 작가》를 통해 데뷔한 시인은 그동안 시집 『간잽이』 『자주 먼 것이 내게 올 때가 있다』 『사랑이고 이름이고 저녁인』을 펴냈다. 그리고 2009년 구상문학상 젊은 작가상, 2014년 천강문학상을 수상한 바 있다.     


이번 시집엔 “나와 나 사이에 놓인 나는 누구인가?”(「가지를 튀기면서」)를 찾는 여정이 담겨 있다. 시인은 ‘나’의 존재성 탐색에 시간과 장소에 제한을 두지 않는다. “나 이전”으로, “또 어디로”(시인의 말) 우리를 불러들인다. 때론 봄기운에 흔들리고, 백일홍 속을 걷고, 저녁 붉음 속을 지나 보이지 않는 곳까지 가본 뒤에야 물 위에 떠 있는 언어 몇 송이와 마주한다. 이 “식물의 언어는 ‘제5의 계절 안으로 들어가 잠을’(「적정기술」) 자며 자신만의 생존 기술을 터득하게 한다.”(정우신 시인의 추천사)    

 

그러나 “언어 속에 갇힌 나를 꺼내”(「이름의 숲속에서」)는 작업은 “영혼의 밑바닥을 한참 찾아 기어들어 가”(「숙주 인간」)는 지난한 일이다. 그렇게 꺼낸 “혼자를 어디에 두어야 할지 모르겠다”(「혼자의 배치」)고 화자는 고백한다. 오민석 평론가는 “‘혼자’는 물음의 출발점 혹은 존재의 영도(零度) 상태를 가리킨다.”며 “정진혁의 주된 관심은 인간 실존의 궁구에 있다고”(해설) 말한다. 그 말처럼 정진혁은 시집 속에서 “존재 물음을 던지는 자만이 존재의 방식을 고민한다.”는 것을 알고 끊임없이 시적 탐구를 떠난다.  

   

『드디어 혼자가 왔다』는 존재와 또 다른 존재가 만날 때, 이것들이 충돌하면서 탄생한 매혹적인 시들로 가득하다. 독자들에게 책장을 덮고도 한참동안 가늠할 수 없는 울림을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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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 속 시 맛보기>     


연애의 언어      

    

정진혁



벚꽃의 영역과 물의 영역 사이에 생긴 낙서 같은 것

물가에 서 있는 벚꽃은

이 세상에 하나뿐인 말을 흔들고 있었다

그날 대성리 물가는 세상의 경계선이었다

밤늦도록 벚나무 아래에서 놀다가 우연히 그것을 건드리고 말았다

벚꽃 물가라는 말이 밀려온다

때때로 남서풍이 부는 물가에 가늠할 수 없는 울림

박각시나비와 휘어지는 강물은 알 수 없는 언어로 허공을 다녀온다

언어 몇 송이가 물 위에 떠 있다     

⎯  『드디어 혼자가 왔다』, 파란,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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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의 배치     


정진혁     



바깥과 안이 완전히 뒤바뀌어 왔다

때마침 밤나무 잎이 서걱거리며 흔들렸다


세상은 잠시 알 수 없는 색채와 공간으로 어른거렸다

드디어 혼자가 왔다


그림자의 등을 보고 있는 나와 마주쳤다

발걸음이 희미해졌다

슬며시 혼자가 왔다


그때 붉은 감이나 하얗게 피어난 국화처럼

느낌을 가진 것들이 자신과의 작별을 마음에 품었다


혼자를 어디다 두어야 할지 모르겠다


귀뚜라미가 울고 있다는 가벼움을 관통하며 바람이 지나갔다

지나가는 것들 사이로 혼자가 왔다


가을의 한가운데 희미하게 남아 있는 색채들을 지우며

혼자가 왔다

익명으로 왔다

한 명의 관조자로 왔다


붉게 사그라드는 황혼 속 슬픔이 잠긴 채 왔다

어떤 향기는 가 버렸고

항거는 말없이 왔다


생각하기도 전에 이 모두가 나에게 그대로 왔다

오롯이 지금 이곳에

내가 살아갈 첫 번째 혼자는

내가 잃어버린 혼자이다


혼자를 어디다 두어야 할지 모르겠다      

⎯  『드디어 혼자가 왔다』, 파란,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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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은


정진혁



네 안에는 은은이 가득하다 

그 동그란 세계가 먼 것에서 왔다 


내 정신의 은빛 갈치 같은 은은 

얇은 문장으로 내 어색한 비유로 어쩌지 못하는 

은은 


씹으면 

'화' 하면서도 쓴 어느 공간이 오기도 하고 

손바닥 위에 은은의 눈 

한 알 입안으로 들어가다 놓쳐 버린다 


은은 안으로 들어가려고 세상의 다른 기슭에 서서 

단어들의 밖을 서성거리기도 하고 


은은을 대여섯 알 입에 물면 

어느 별에서 낮잠을 자다 일어난 듯 

은은은은 잠꼬대를 하며 허공에게 가고 싶다 


비어 갈수록 

입안은 관계를 찾아가는 은은이 구르고 


은은 흔들릴 때마다 

내 생의 끝을 생각했다 거기에는 은사시나무가 흔들리고 


은은을 입안에서 녹이는 동안 겨울이 가고 있다 

낮게 가라앉은 소음조차도 은빛이다 


고립감이 와글와글 

은은에 갇혀서 나를 다 버리고 나는 엎어지고 


주머니 속에서 가슴속에서 

'왜 얼룩을 믿지 않는 거야?'라는 질문 앞에서

수백 개의 은은이 부딪힌다 

⎯  『드디어 혼자가 왔다』, 파란,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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