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섯 번째
작은 책이라고 무시했다. 아니 얕잡아 봤다.
하지만 책장을 넘길수록
속도가 점점 느려졌다.
백 년 전 여성의 글이라고는 믿기지 않았다.
그저 보이는 것만이 세상이라 믿는 소녀들에게
진짜 세상 얘기를 또박또박 읽어주는 공부 잘하는 언니의 목소리 같았다.
그 시절
지구를 한 바퀴를 돌고
구라파에서 미술과 예술에 흠뻑 빠졌고
밝아진 눈으로 동포 여성의 가여운 삶을 소름 돋도록 안타까워
이중 삼중으로 막혀 있는 유리천장을 향해 힘껏 소리를 지르다 목청이 터졌을 가여운 언니.
나. 혜. 석.
똑똑하고 당찬 울 언니는 왜 그렇게 이름도 없이 죽어야 했을까?
그리고 언니의 대한 평가는 여전히 서슬이 퍼렇다.
자그마치 백 년이다.
백 년을 씹었으면 이제 작은 세포까지 다 소화가 되을 법도 한데
세상은 아직도 울 언니를 고래심줄인양 질겅댄다.
ㅇ은 유난히 이번에 책에 집중했다.
-'난 페미니스트가 아니야. 그저 사람이고 싶었어. 존재만으로도 자격은 충분해.'라고 책을 읽는 내내 그녀가 내게 소리쳤다고 고백했다.
ㄱ은
- 그 시대 많은 것을 가지고 누렸던 그녀에게 노블레스 오블리주까지 바란다면 무리인 건가? 되뇌다 목소리가 작아졌다.
ㅁ은
- 왜 그녀는 프랑스에서 돌아온 거야? 프랑스에 뼈를 묻어야지. 나 같으면 절대 안 돌아와. 나 같으면... ㅁ은 금방이라도 프랑스에 갈 것처럼 말했다.
ㅈ는
- 난 책을 더 읽어야 할 것 같아. 내 생각 밖에서 난리 부르스를 추는 혜석 님을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어. 모임 내내 당황한 얼굴이었다.
책여우-내게 온 인물의 캐릭터 분석을 위해 책 읽는 여배우들의 모임
ㄱ-내년이 환갑이라는 사실에 대충 낙담하는 스타일
ㅁ-총명한 머리, 그럴듯한 외모. 본인만 모르는 비밀
ㅈ-책여우 이름을 지은 사람
ㅇ- 21학번 늦깎이 대학생
독서모임, 북살롱, 북클럽...
결국 같은 책을 읽고 다른 생각을 나누기 위한 만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