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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살던 고향은 서울
그 속에서 놀던 때가 그립습니다

장충동 2

    벌써 입구는 북새통이었다이리저리 치이고 나니빵 하나는 사라졌고 내 작은 손에 남은 빵 하나는 뭉그러져 있었다. 나를 끌고 빈자리를 찾아 헤매는 엄마는 킬리만자로의 표범이었다. 노란 크림으로 범벅이 된 한 손을 내리지도 올리지도 못한 채 엄마에 끌려 계단을 쉴 새 없이 오르락거렸다.


 간신히 관중석에 자리를 잡은 순간안도의 숨을 내쉴 새도 없이 엄마는 돌변해버렸다더는 내 엄마가 아니었다저 멀리 내려다보이는 사각 링을 향해킬리만자로의 표범처럼포효하는 것이었다


  엄마만이 아니었다링에서 피투성이가 되도록 치고받고 메치는 팬티만 입은 두 남자의 움직임에 체육관 안의 모든 사람이 한 목소리로 소리쳤다난 무서웠다엄마 등 뒤에 웅크려 눈물을 찔끔거리는데 손에 쥔 크림빵이 눈에 들어왔다. 어른들의 기세에 빵은 차마 씹지도 못하고 노란 크림을 혀로 연신 핥았다.


   이전의 두려움을 단번에 사라지게 하는 맛이었다크림이 내 입속에서 녹아들수록 사람들의 환호성은 귀에서 멀어졌고달콤함에 푹 빠진 나는 그제야 작은 입으로 빵을 베어 물었다. 나도 모르게 불편한 관중석에서 아기처럼 잠이 들었다폭신한 빵과 달달한 노란 슈크림이 내게 마술을 부렸기 때문이었으리라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도 엄마의 흥분은 쉬이 가라앉지 않았다. “이노키그놈이 먼저 반칙을 한 거야김 일이 조금만 일찍 박치기 공격을 했어야지”            


    멋쟁이였던 엄마의 취미는 프로레슬링, 권투 경기 관전이었다. 다른 스포츠 경기는 마다하면서 격투기나 씨름 같은 종목이 TV에 나오면 엄마는 지금도 브라운관에 바짝 다가앉는다. 그녀의 뒤통수가 내 마음 한구석을 아프게 한다. 


   고등학교를 졸업도 하기 전에 가장이 돼버린 엄마. 이른 나이에 결혼을 선택해야만 했던 소녀 가장. 그 삶의 무게를 잠시라도 잊을 수 있는 곳, 작은 일탈을 맛볼 수 있는 곳이 바로 장충체육관이었다. 


   사각의 링으로 퍼붓던 포효는 아마도 엄마 자신을 향한 응원이었으리라. 그녀에게 ‘숨 쉴 공간’이었던 장충체육관. 이제는 희끗희끗한 머리를 휘날리는 남편이 숨 쉴 공간을 찾아 드나드는 곳이 되었다.

    “빵이 벌써 많이 팔렸네.” 쟁반을 들고 남편은 조급해한다. 분주한 뒷모습을 보면, 그의 고단함을 위로해 줄 어깨 한번 편히 내주지 않은 것 같아 미안해진다. 다음 경기는 내가 먼저 가자고 해보련다. 


    가방에 슈크림빵 하나, 단팥빵 하나, 시원한 얼음물도 미리 챙기며, 말로 하는 위로보다 함께 있어 주는 위로가 더 힘이 되고 잔뜩 성난 어깨를 가볍게 풀어주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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