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어머니 되어가기 2
첫 만남 1편
결혼 문제나 진학, 취업 문제로 부모와 자식 간의 갈등을 빚는 줄거리는 현실이나 드라마, 소설 속에서 너무 흔한 소재다. 뜻이 꺾인 쪽이 피해자가 되어 수동인 삶을 살거나 반항을 하는 쪽으로 이야기는 흘러간다.
한결같은 진행에 짜증이 날 때가 많다. 작가의 빈곤한 상상력에 질리기도 한다. 하지만 막상 그 입장이 되니 나 역시 그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아니 벗어날 수가 없다.
결혼 허락을 받은 아들은 신나게 엉덩이를 흔들며 회사 기숙사로 떠나고 나는 그대로 침대에 뻗었다. 그렇게 누워만 있다 보니 오만가지 생각이 나를 짓눌렀다. 처음 생각은 물론 ‘괘씸한 아들놈’이었다. 하지만 곧 ‘결혼을 반대해서 그 친구가 혹 상처를 받지 않았을까?’, ‘결혼 자체를 반대했지, 사람을 반대하지 않았는데 무뚝뚝한 아들놈이 제대로 얘기를 전했을까?’ 얼굴도 모르는 예비 며느리의 마음을 헤아리기 바빴다.
그러다가 결혼자금은? 아이들 살 집은? 예물은?
아들의 결혼을 반대한 진짜 이유가 ‘돈’ 때문이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갑자기 뇌가 머리뼈 속에서 공놀이를 하는 듯한 편두통에 머리띠를 둘러맸지만 아무 소용없었다.
신혼 초, 주인집 할머니의 갑질에 지쳐 아이 돌반지도 팔고 대출까지 받아 스무 평짜리 작은 아파트를 마련했다. 쌩 양아치 집주인의 트집에서 해방됐지만 때마침 시작된 IMF 사태 때문에 ‘집 있는 거지’ 생활을 청산하기까지 15년도 넘게 걸렸다.
그때 결심한 게 하나 있었다.
『아들 결혼할 때, 집 사주기』
부모 품을 떠나 가정을 꾸리는 아들 가족이 '집'때문에 청춘을, 사랑을, 저당 잡히지 않게 하리라!
하지만 이런 결심이 공수표가 되었다는 사실을 깨닫자 괘씸이고 뭐고, 내 인생 전반에 대해 반성이 들기 시작했다.
IMF 직전에 대출을 잔뜩 끼고 집을 샀던가?
아이들 학원비 과외비를 아깝다 생각하지 않았을까?
친구 M처럼 스무 번씩 이사 다니며 부동산에 투자했다면?
주식은 강 건너 불 보듯 한 걸까?
왜 왜 왜? 돈을 모른 척했을까? 아니 돈에 초월한 척했던 걸까?
아무리 후회와 궁리를 해도 아들에게 멀쩡한 전셋집 하나 ‘척’ 마련해줄 수 없다는 생각이 들자 인생 실패자처럼 느껴졌다.
깊은 밤, 아르바이트를 끝내고 집에 들어서는 대학 새내기 둘째가 웬일로 코맹맹이 소리를 하며 예쁜 선물 상자 하나를 내밀었다.
“엄마 기운 내.”
“......”
“형님 결혼한다고 속상해하지 마.”
자식에게 받은 상처, 다른 자식이 싸매 주는구나. 하지만 감동의 눈물이 채 맺히기도 전에
“나는 형님보다는 아주 늦게 결혼할 거니까.” 둘째의 너무 이른 만혼 선언에 웃음이 터져 나왔다.
한바탕 웃고 나니 머리가 맑아졌다. 편두통이 사라진 자리에 '어떻게든 되겠지'라는 낙관론이 아들의 결혼 선언 후 처음으로 모락모락 피어났다.
겨우 마음을 추스르는 내게 큰아들은 여자 친구를 만나보라고 자꾸 채근했다. 하늘이 내린다는 시어머니 심통 때문인지 아니면 이른 결혼 선언의 서운함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순순히 만나고 싶지 않았다. 이런 사소한 약속, 하나쯤은 내 마음대로 하고 싶었다. 이유 없이 약속을 차일피일 미뤘다.
막상 약속이 잡히자 앞서 감정은 사라지고 예비 며느리에게 괜찮은 시어머니로 보이고 싶었다. 갱년기 호르몬 때문이라고 변명하기에도 민망한 ‘죽 끓듯 한’ 변덕에 나도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친구를 만드는 가장 빠른 방법을 쓰기로 했다. 누구나 알만한 브랜드, 조금은 비싼, 패션과 실용을 겸비한 선물.
높고 푸른 가을 하늘이 싱숭생숭하기만 한 어느 토요일 오후, 백화점 선물 코너에서 화려하게 포장한 스마트 워치를 들고 예약한 중국집에 들어섰다.
직원이 가리키는 5번 방으로 향하는 당당한 발걸음과 달리 내 심장은 면접장에 들어선 취준생처럼 나댔다.
육(六)아(我)일기
갱년기를 등에 업고 질풍노도의 중년 시대를 지나는 중이다
이제 곧 들어설 육십이라는 노년 시대를 제대로 맞이하기 위해
언젠간 지나갈 푸르른 중년의 나를 기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