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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성복을 입은 여성들』읽고

가늘고 긴 독서가 건넨 영감으로 쓴 짧은 글

1851년, 미국의 신문은 블루머를 입은 여성들에 대한 온갖 풍자화로 연일 빼곡했답니다. 레퍼토리는 똑같습니다.

'남자가 되고 싶은 거냐.' '추하고 못생겼다.' '세상이 디비진다. 이러다 여자가 경찰도 되고 시가도 필고 청혼도 하는 세상이 오겠다.' <중략>

헐벗거나, 장식품 같은 치렁치렁한 드레스를 차려입고 남성 관람자들의 관음적 시선을 받기 위해서만 화폭 속에 존재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원래는 대상물이어야만 할 여성이, 불현듯 대상화할 구석이 하나도 없는 남성복을 차려입고는 관람자를 오만하게 쳐다본다면? 꽤나 당황스러울 것입니다. <중략> 그러므로 브룩스와 그의 친구들이 댄디의 외양을 취했다는 건, 사실 "우리는 평등하다."보다는 "봤냐. 내가 이렇게 우월하다."에 훨씬 가깝습니다. 귀족적인 여유를 보여주면, 세상을 향해 "네가 감히 나를 평가할 수 있게는 가. 이게 나다. 그러니 받아들여라."라고 말하고 있는 겁니다. <빅토린 저 / 스크로파 출판>










오랜만에 녀석들과 만났다. 내 자랑들.

약속시간은 여섯 시. 내가 도착한 시간은 여덟 시.

골뱅이와 마늘 치킨, 계란말이, 번데기탕까지 이미 해치웠다. 벌건 얼굴색과 주어가 사라진 대화, 입가에 게거품... 까지 유추해석해 보면 적어도 맥주 열 병이상, 소주는 최소 대 여섯 병은 족히 쳐마셨으리라. 


"주재원! 그거. 좋아서 간 거 아니다! 애들 대학 보내려면 이게 제일 좋다는데 어떡해!" 벌써 네 번째 주재원 생활을 하고 있는 A는 침을 뿜어내며 소리를 쳤다.

"아홉 시 넘어 집에 들어 오란다. 집 앞 공원을 뱅글뱅글, 아파트 단지를 뱅글뱅글, 햄스터도 아니고 뱅글뱅글!" B는 듣는 사람 없는 말을 하고 또 하고...

"그냥... 그... 애가 잘 있는지... 아니 아니, 날... 기억하고 있는지... 그냥 그걸 알고 싶어서... 아니다 씨×! 보고 싶었어! 씨×! 씨×!" 초등학교 때 짝꿍인 첫사랑을 찾느라 청춘을 다 보낸 C. 우연히 신문에 실린 미국 어느 한인교회의 성가대 사진 속 그를 발견하고 태평양을 날아갔다. 

"나보고 용돈 그만 벌고 애 보란다! 나이트 죽돌이가 부잣집 자식일 게 뭐냐고! 마흔 넘어 결혼해서 몇 번 하지도 않았는데 애는 줄줄이!" 호텔 오너와 늦은 결혼한 D는 집에 들어가기 싫어서, 아니 정확히는 애들 돌보기 싫어 주야장천 회사에서 살더니 우리 중에 제일 먼저 이사 직함을 달았다.

"나 시계 샀다. 오오오메가! 그거 받아서... 내 암진단금. 크하하핫" 아직도 목에 흉터 밴드를 붙이고 있는 E의 낮고 쉰 목소리는 다른 친구들의 아우성에 묻혔다.

"냉장고가 없어. 울 집엔... 음식냄새가 싫대. 근데 김치냉장고는 있따. 지 좋아하는 맥주만 그득그득해... 알잖아? 나 알코올 알레르기 있는 거..." 녀석들의 아우성을 배경음악 삼아 하도 나도 한마디 얹었다.


골뱅이 집에서 시작된 자랑인지 푸념인지 모를 우리들의 외침은 꼬치 집을 거쳐 콩나물국밥 집까지 이어졌고 되돌이표 가득한 동요처럼 도무지 끝이 나질 않았다.


"주재원 그거, 완전 군인아파트야. 애 생일이다 뭐다 불러내고 본사에서 누구 나오면 쭈르르 불려 가고.. 드러워서 증말." 스투시 티셔츠에 발망 청바지를 입고 마르니 슬리퍼를 흔들거리는 A의 남편은 샤넬 클러치백 지퍼를 의미 없이 여닫는다.

"내가 뭐 울집 오픈하고 싶어서 하니? 청소랑 간식이랑 그거 장난인 줄 알아? 돼지엄마, 아니 돼지아빠 그거 아무나 하냐고!" 반차를 내고 일찍 귀가하겠다는 B의 핸드폰 너머로 쩌렁쩌렁 울리는 그의 목소리.

'행복하게 지내. 나 얼마 전에 결혼했어. 그이랑 손톱 발톱 서로 깎아 주면서 살고 있어. 그러니... 앞으로 연락하진 말고...' 세 번째 이혼 소송 중인 C에게 C의 삼십 년 그는 마지막 편지를 카톡으로 날린다.

"그 인간, 암 걸리고 사람 됐어. 엊그제는 음쓰도 갖다 버리더라니까." 아르바이트하는 동네 마트 회식 자리서 다리를 쩍 벌리고 앉아 생맥주 한 잔을 쭉우우우욱 들이키며 D의 자랑을 늘어놓는 그의 남편.

"내가 앞서가긴 했지. 냉장고 없는 신혼살림을 그땐 누가 생각이나 했니? 니들도 자식 결혼시킬 때 멀리 내다보고 준비해. 이것들아" 네일 숍에서 깨끗하게 정리한 열 손톱을 자식이 없어 어쩌냐는 동네 친구들 앞에서 흔들어 대며 그는 거들먹 거린다. 오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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