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비건베이킹』을 읽고
손으로 무언가를 만들게 되면 스스로에게 믿음이 생긴다던, 자신과 가족을 지지할 수 있다고 말하던 마리아 씨의 단단한 목소리를 마음의 나침반처럼 삼고 있다. 시간이 흘러 엄마도 나도 할머니가 되었을 때, 그저 나이가 조금 더 많고 적을 뿐인 할머니 친구가 되었을 때 우리는 무엇에 기대어 살 수 있을까. 각종 영양제와 오늘의 운세, 30평 아파트가 줄 수 없는 그 무엇을 알아내기 위해 일단 앞치마를 당겨 묶는다. 오븐을 켠다. 엄마는 엄마의 방법을 반드시 찾을 것이다.
『비건베이킹』 p60
제가 정말 좋아하는 다큐멘터리 시리즈가 있어요. 넷플릭스의 <셰프의 테이블>입니다. 저는 한때 요리사의 세계를 너무나 동경했고, 요리학교에 들어갈 계획까지 진지하게 세웠었고, 식당을 창업하고 싶었지요. 하지만 요리라는 것이, 식당의 주방 일이라는 것이 얼마나 고된 일인지 알게 된 후에는 슬그머니 그 꿈을 접었습니다.(이렇게 쉽게 포기할 수가…) 그럼에도 동경은 사라지지 않아서 <셰프의 테이블>을 볼 때마다 눈이 하트가 된답니다. 특히 낸시 실버턴이라는, 전설적인 할머니 베이커가 등장한 에피소드를 정말 좋아해요. 완벽한 빵을 굽기 위해 노력하고 또 노력하는 그 모습에 대리만족을 하게 된다고나 할까요. 사실 저는 20년쯤 후에는 산골로 들어가 화덕에서 투박한 빵을 굽는 할머니가 되는 꿈을 꾸고 있어요. 물론 꿈입니다만.
몇 년 전에 작가님으로부터 베이킹을 배우신다는 이야기를 들은 기억이 있어요.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지요. 그때는 불안한 미래를 위한 대비책 같은 거라고 말씀하셨는데요, 지금의 비건 베이킹은 조금 다른 의미일 것 같아요. 어떠신지요? 또 비건 베이킹을 하면서 스스로 달라진 점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오! 작가님. 저 역시 요리를 주제로 한 다큐멘터리, 영화라면 일단 재생버튼부터 누르는 사람 중 하나입니다. 언급하신 <셰프의 테이블>도 즐겁게 보았던 기억이 나요. 개인적으로는 <대결! 맛있는 패밀리>라는 요리 경연 프로그램을 좀더 애정합니다. 다른 문화적 배경을 지닌 가족 구성원들이 출연해 가문(!)의 비법이 담긴 가정식 요리를 선보이는데요, 사실 저는 어떤 장르의 경연 프로그램을 보든 승패에 딱히 관심이 없습니다. 저를 신나게 하는 포인트는 출연자들이 요리에 바치는 열렬한 마음입니다. 대체 왜 이토록 요리에 진심인지 모르겠습니다. 낸시 실버턴처럼 요리로 전설적인 업적을 쌓으려는 것도 아닐 텐데 말이에요.
작가님의 기억처럼 한때 저는 비건 빵집을 열겠다는 원대한 꿈을 품었습니다. 거금을 들여 창업반 클래스를 수강할 계획이었지요. 하지만 저 역시 지금은 그 꿈을 슬그머니 접은 상태입니다. 모든 요식업이 그렇듯 엄청난 체력과 수고를 들일 자신이 없는 데다, 오래 전 책방을 운영했던 때처럼 애써 찾아오는 손님마저 원망하는 사태가 벌어질까 겁이 나더라고요. 그런데 재밌는 건 꿈을 접었더니 되려 꿈과 일상이 더욱 가까워졌다는 사실입니다. 창업을 염두에 둔 베이킹을 할 때는 돈을 주고 사먹을 만한 맛을 구현해야 한다는 생각 때문인지 스스로에게 좀더 엄격했던 듯합니다. 기대한 맛이 나지 않으면 답답하고 화도 났고요. 취미의 영역으로 넘어온 지금은 내 입맛에 적당한 정도만 맞추면 되니 마음이 한결 편안합니다. 빵 선물도 스스럼없이 더 자주 하게 되었어요.
아무래도 저는 ‘무언가를 만들고 있다’는 그 감각을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시간이 어떻게 흘러가는 지도 모르게 푹 빠져 있는 경험은 무척 귀한 것이니까요. 덕분에 ‘비건’과 ‘베이킹’ 각각을 향한 저의 진지함도 꽤나 희석된 상태입니다. 제가 대단한 일을 하고 있다는 착각에 빠지지 않을 수 있어 다행입니다. 결과물에 집착했다면 진작 비건 베이킹을 멈췄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버터의 유혹을 이기기란 정말 어려워요. 하지만 ‘버터와 계란이 들어가지 않은 디저트를 만들어 보자’는 미션 자체에 집중하니 베이킹이 매번 신기하고 흥미진진합니다. 제 일상에서 손에 꼽을 만한 순수한 기쁨이에요.
나는 상대가 누구든 채식을 적극 권유하는 일이 거의 없다. 만약 내 식단에 긍정적인 관심을 보이거나 질문을 하면 성심껏 대답하는 정도다. 상대 쪽에서 먼저 약속 장소로 비건 레스토랑을 제안하면 눈을 반짝이며 함께 메뉴를 고민한다. “유기농이니 뭐니를 따질 때부터 유난이다 싶었다"며 대놓고 핀잔을 하는 무례한 부류도 있지만, 기후 변화와 동물권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고 실천하는 이들도 있다는 것을 안다. 고기는 먹지만 누구보다 분리수거에 열심인 사람이 있으며 가급적 로컬푸드를 소비하고 매달 환경단체를 후원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 또한 기억한다. 소설가 정세랑의 에세이집 제목처럼 ‘지구인만큼 지구를 사랑할 순 없’다는 사실을 채식에 눈 뜬 이후 절절히 체감하는 중이다. 각자 자신의 생활 안에서 지구를 구하기 위해 힘쓰고 있다.
『비건베이킹』 p16
대학 때 갑자기 정의감에 불타서 채식주의자가 되겠다고 선언한 적이 있어요. 2000년대 초반의 일이었고, 그때의 채식주의자는 뭐랄까, 외국에나 있는 이상하고 별스러운 인종 같은 느낌이었지요. 하루는 누군가의 생일이어서 자취방에서 미역국을 끓였는데 저는 고기를 넣어서는 안 된다고, 미역만으로 끓여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아마 멸치육수조차 내지 않았을 거예요. 미역국은 정말 맹탕이었고 다들 둘러앉아 맛없게 그 미역국을 먹다가 한 친구가 조심스럽게 “다시다라도 좀 넣으면 안 될까?” 하고 물었는데, 저는 “안 돼!” 하고 외쳤습니다. 걔들이 나중에 절 얼마나 욕했을지, 식은땀이 다 납니다.(아이고) 저의 짧은 채식생활은 그걸로 끝이었어요. 고기가 너무 먹고 싶어서 견딜 수가 없더라고요.
저는 원래 고기를 아주 즐기지는 않고 오히려 채소나 해물 같은 것을 좋아하는 편입니다. 그렇다고 고기를 아예 먹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하거나, 고기를 먹는 것에 어마어마한 죄책감을 느끼며 살아야 한다고 믿지는 않습니다. 다만 공장형 축산 같은 것에는 불편하고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지요. 그와 동시에 사람이 다른 사람을 변화시키고 교화하고자 하는 욕구에 대해서는 그 의도가 어떠하든 폭력적이지 않은가, 하는 불안감이 있기도 있기도 합니다. 마치 제가 맹탕 미역국을 모두에게 억지로 먹였던 것처럼 말이에요.(부끄럽다…) 세상을 바꾼다는 그 어렵고 복잡한 일에 대해서 은정님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저의 가까운 친인척 중 한 사람이 양계장을 운영합니다. 육계용 병아리를 키워 납품시키는 일이지요. 노동 강도가 세긴 하지만 최근에 농가 규모를 키울 만큼 만큼 운영이 꽤 잘 되는 듯 보였습니다. 저와 제 남편더러 도시에서 적은 월급받으며 고생하지 말고 내려오라더군요. 물론 농담이지만요. 그 친척분은 제가 고기를 먹지 않는 다는 사실을 아직 모릅니다. 함께 식사할 기회가 거의 없었거니와 제 쪽에서 부러 말하지 않았습니다. 벌컥 화를 내며 얼굴을 붉히실 모습이 훤했거든요. 그분은 제 남편이 유기농 쌀을 사먹는 것을 두고 10년째 놀림거리로 삼고 있습니다. 그게 왜 조롱이 대상이 되는지는 좀처럼 이해가 되지 않지만 뭐, 아무튼 그분의 입장이라는 것이 있겠지요. 제게도 저의 입장이 있습니다. 비건 지향인이라는 사실을 알리고 싶지 않다는 것, 그의 생각을 바꿀 의도 또한 없다는 것입니다. 저는 친척분 내외가 양계장 운영에 온 힘을 쏟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고, 어떤 면에선 대단하다고 느끼기도 합니다. ‘나는 알지만 너는 모른다’ 같은 기분에 취해 그 삶을 함부로 재단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이런 입장은 너무 모호한가요. 세상을 바꾸는 일에 조금의 도움도 되지 않겠지요?
제가 느끼기에, 사람들은 외부의 영향에 너그러운 편인 것 같습니다. 하지만 과녁을 맞추듯 직선적인 조언에는 뒷걸음질을 치지요. 자신의 오래된 습관, 가치관 심지어는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을 부정당하는 듯한 당혹감을 느끼기도 하고요. 비건을 지향하는 저의 전략은 이렇습니다. 남들이야 어떻든 일단 나부터 제대로 살자고. 다양한 제철 채소를 즐기며 이따금씩 빵을 굽는 지금의 생활을 가늘고 길게 이어가보자고요. 왜냐하면 제 주변 사람들이 저의 이런 생활을 퍽 흥미로워하기 때문입니다. sns에서 발견한 비건 식당의 링크를 제게 보내거나, 다음번 약속 장소로 그 식당을 제안하는 지인들을 보는 것 역시 제겐 무척 흥미로운 일입니다. 그들이 결국 바뀔지 어떨지는 좀더 두고봐야 할 일이겠지요. 하지만 당장 변화하지 않는다고 해서 제가 쉽게 실망하는 일은 없을 것 같습니다.
어째서 나는 새해벽두부터 온몸이 아려오는 고행을 자진하고 있는 것일까. 힘 조절에 실패해 보늬가 힐끗 벗겨진 밤을 한입 베어 무니 으깨진 과육 사이로 시원한 단맛이 올라왔다. 의식한 적 없지만 어쩌면 나는 이런 류의 소일거리로부터 일종의 유희와 평안, 자유를 맛봐왔을지도 모르겠다. 반드시 해내야 하지도, 해내기를 요청받지도 않았기에 가능한 즐거움. 성공하면 맛있고 실패해도 재미가 남으니 아쉬움이 없다.
『비건베이킹』 p46
한 가지 일에 몰두하지 못하고 이걸 하다 다시 저걸 하는 타입인 저는 평생 한 가지 일에 전력질주하는 사람들을 보면 신기하기도 하고 부럽기도 해요. 그러다 문득 생각합니다. 제가 한 가지 일에 제 모든 걸 걸지 못하는 이유는 어쩌면, 하나에 모든 걸 걸었다가 망하면 어떻게 하지? 일단 했는데 나에게 딱히 재능이 없다는 걸 뒤늦게, 그러니까 환갑 즈음 깨달으면 어떻게 하지? 하는 두려움 때문일지도 모른다고요. 이러니 나 같은 사람은 대성은 못하겠구나, 하는 생각도 합니다.
저에게 송은정 작가님은 관심사가 다양하고, 조용한 듯 열정이 넘치는 분이라는 인상이 있습니다. 여행, 캠핑, 책방, 베이킹, 채식, 집 짓기까지. 작가님은 하나에 모든 것을 걸고 전력질주하는 삶과, 여러 가지 것들에 두루두루 취미를 갖고 천천히 둘러가는 삶에 대해서 어떤 생각을 가지고 계신지요?
하나에 모든 것을 거는 삶이라니, 상상만 해도 숨이 턱 막혀옵니다. 고백건대 저는 그런 자신을 단 한번도 상상해본 적이 없어요. 반면 어느 누군가에게는 하나에 몰두하는 태도가 삶을 밀고나가는 원동력이 되기도 하겠지요. 그러고보니 <오늘, 책방을 닫았습니다>에서도 비슷한 이야기를 쓴 것이 기억납니다. 책방을 시작할 수 있었던 결정적인 이유가 “이 일에 모든 것을 걸지 않겠다는 다짐” 덕분이었다는 사실말입니다. 곰곰 생각해보니 이런 태도를 갖게 된 밑바탕에는 ‘당장 한치 앞을 알 수 없다’라는 생각이 깔려 있는 듯합니다. 그 대상은 저라는 인간 자체이기도 하고, 제가 살아가는 세상이기도 합니다. 굳이 비중을 나누자면 저의 변화무쌍한 기질에 좀더 무게를 싣고 싶네요.
말씀처럼 저는 관심사가 다양하고 무언가에 쉽게 빠져드는 편입니다. 궁금한 건 참지 못하고 일단 몸으로 겪어야 직성이 풀리지요. 대신 호기심이 충족되면 빠르게 발을 빼거나 포기하는 사람이기도 합니다. 그렇습니다, 저는 포기가 두렵지 않습니다. (어렵지 않다는 쪽이 보다 적절할까요?) 제 남편이 가장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이기도 한데요. 한때는 좀처럼 진득하지 못한 성질머리를 저의 한계처럼 여겼지만, 이제는 일종의 장점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저는 시작하고 포기하는 그 일이 너무나 재밌고 신이 납니다. 사건사고라고는 없는 조용한 일상에서 유일하게 번뜩이는 구간이 있다면 바로 시작과 포기의 나날일 거예요. (물론 이렇게 단언할 수 있는 건 ‘망하더라도 스스로 수습할 수 있을 만큼’의 시도이기 때문입니다.) 목표한 지점을 향해 전력질주하는 삶에 대해서는 사실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여기저기 기웃거리며 재밋거리를 찾는 일에는 꽤 재능이 있는 것 같습니다.
비건 베이킹을 주제로 책을 쓰는 것 역시 내게는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다. 나의 불완전함을, 혼란한 속내를 들키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건 부끄러운 일도 아니고 그 부끄러움마저 스스럼없이 나누면 더는 부끄럽지 않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비건베이킹』 p158
대개의 잔잔한 에세이들이 실패하는 이유 중의 하나가, 충분히 솔직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그건 그들이 거짓말을 한다기보다는, 자신이 말하고 있는 그 주제에 대해서 마음을 완전히 열어 보여주지 않기 때문이라고 느낍니다. 예를 들어 ‘무엇 무엇 때문에 복잡했던 마음이 풀어져 행복해졌다’는 식으로 쓰는 형태의 글들이 많이 있는데, 정작 그 ‘무엇 무엇’에 대해서는 얼버무리기 때문에 글이 모호해져버리는 거죠. 사실 그 ‘무엇 무엇’에 작가와 독자가 연결될 고리가 있는 건데 말이에요. 물론 그 ‘무엇 무엇’에 대해 열심히 진지하게 골똘히 생각하는 것은 어렵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하고 힘든 일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저는 그 과정이 정말로 중요하다고, 독자뿐 아니라 작가 자신에게도 자신을 뛰어넘을 수 있는, 다른 말로는 자신을 재발굴할 수 있는 아주 값진 기회라고 믿어요.
제가 송은정 작가님의 글을 좋아하는 이유는 자신의 ‘못남’을 솔직하게 드러내는 용기, 그러니까 ‘무엇 무엇’을 감추지 않는 강단 때문이에요. 게다가 그런 것들을 멋스러운 포장지로 포장하지도 않지요. 작가님에게 솔직함이란 무엇인지, 글 속에서 솔직하다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그걸 드러내는 어려움을 어떻게 극복하시는지요.
몇 년 전 글쓰기 모임에 참여한 적이 있습니다. 코로나19 이후로는 일주일에 한 번씩 글을 써서 온라인으로 공유를 했지요. 그때 저는 자유분방한 글쓰기에 갈망이 있던 터라 아무런 계획도 방향도 없이 백지 위에 무작정 글을 써내려갔습니다. 어린시절 엄마에게서 풍기던 슬픔에 관한 이야기였어요. 그런데 막상 쓰고 나니 속이 시원하기는커녕 너무나 부끄럽더라고요. 글쓰기에는 자기 치유의 효과가 있다고들 하는데, 제 글은 술에 취해 마구잡이로 휘갈긴 속풀이 같았습니다. 그 이후로는 다신 대책 없이 노트북을 펼치지 않습니다.
솔직함에 대해 물으셨지요. 제 경험에 미루어 답하자면 ‘자신 혹은 대상에 대해 모르는 상태로는 솔직할 수 없다’입니다. 저는 글을 쓰기까지 예열 시간이 꽤 긴 편입니다. 여느 작가들이 그렇듯 쓰고 싶은 주제를 두고 내가 왜 그런 시각과 감정을 갖게 되었는지 따져보는 데 많은 시간을 할애하지요. 지루하고 괴로운 과정이 아닐 수 없어요.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고 답을 구하는 것만큼 재미없는 일이 또 있을까요. 정확히는 ‘나도 나를 잘 모르겠다’는 사실을 직면하는 그 일이요. 논리적으로 제 감정을 가늠할 수 있다면 천만다행이지만 대개는 설명 불가의 상태인 나를 발견하기 일쑤입니다. 그런데 어쩌면 솔직함이란 바로 그 어중간한 간극에서 나오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그렇게 우왕좌왕 들여다보다 보면 “알겠다!”의 명쾌함까지는 아니지만 “알 것 같다!” 정도의 흐릿한 감각이 느껴집니다. 작가님이 말씀하신 ‘무엇 무엇’의 윤곽이 보이기도 하고요. 드디어 무언가 쓸 준비가 된 셈입니다.
엄마의 슬픔에 관해 쓰고 싶었던 그때, 제게는 쓰고 싶은 욕구만 있을 뿐 쓸 준비는 되어 있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슬픔의 정체가 무엇인지, 그 슬픔이 내게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그 무엇도 짐작하지 못했습니다. 물론 그 글이 뱉어내고 말 뿐인 일기라면 아무런 상관이 없겠지만, 제 가족사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과 공유하기에는 부족한 글이었지요. 공감과 이해를 받기 어려운 게 당연했습니다. 일단 무턱대고 쓰기 시작하면 자연히 깨달을 줄 알았어요. 물론 그런 기적도 때로는 일어나겠만 저에겐 해당되지 않는 이야기였습니다.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쓸 수 있는 솔직함 역시 그 사실을 알아차린 뒤에야 가능한 일이지 않을까 싶고요. 다행히 사람들은, 적어도 어떤 독자들은 깨끗이 매듭지은 결론보다 작가의 혼란스러운 속내에 더욱 마음을 기울이는 듯합니다. 작가라는 인간도 실상은 무진장 헤매는구나라는 사실에 위로를 받는 게 아닐까요. 이것은 독자로서 저의 경험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신기하지요, 작가님. 저는 언제나 제가 충분히 솔직하지 못했다는 자괴감에 휩싸이곤 합니다. 이렇게 문장으로 쓰고 보니 ‘충분하다’와 ‘솔직하다’가 나란히 존재할 수 있는지 의문이 들기도 하네요.
2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