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열심히 Feb 15. 2021

승리호 (Space Sweeper, 2021)

안 돼, 정의롭지가 않아


- 대개의 성공한 스페이스오페라 IP는 시리즈물로 거대한 세계관을 오만 미디어믹스를 통해 엄청 주입합니다. 때문에, 두 시간여 남짓의 단편 영화로 장르의 정수를 살리는 건 스토리텔링 관점에서 만만하지 않은 미션이죠. (가오갤 1편 정도가 최근의 가장 유의미한 성공사례일 텐데. 사실상 이 영화의 진정한 세계관 기반이 7080 팝 서브컬쳐 가는 걸 생각해보면 완전히 독립된 세계관의 스페이스오페라 라는 건 정말 어려운 일입니다)


- 더군다나 스페이스오페라는 그 환타지성으로 인해 몰입감 있는 스토리텔링도 꽤 어려운 장르입니다. 우주공간에서 온갖 효과음이 나오고 마이클 베이 식 카메라워크나 이타노 서커스를 부리는 우주선이 등장하면, [그라비티] 류의 현실적인 몰입감은 배제되거든요. 인물과 스토리, 세계관에 대한 초반 몰입에 실패한다면, 눈뽕 몇 분이 지난 다음부터는 도통 몰입이 어려워집니다. 굳이 만화 같은 걸 내가 CG 발린 영화로 보아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에 대해 무의식 중에, 보는 내내 되묻게 되는 장르인 셈입니다. 그래서 괴작도 많았고요.

그래요 이를테면 이런 것들

- 아직도 많은 이들이 스페이스오페라의 필승 공식을 눈뽕 그래픽이나 캐릭터의 매력에서 찾지만, 글쎄요. 그게 두 시간 넘게 집중시킬 힘이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아마 아닌 거 같아요. 좋은 스페이스오페라는 잘 만들었는데 눈뽕도 잘했기 때문에 느껴지는, 인과율의 잘못된 학습 같은 거랄까요.


- 스페이스오페라 라는 장르는 철저히 너드 매니악의 러브레터입니다. 착하고, 순진한 반면 내향적이고, 딱히 친절하지 않으며 자신만의 세계에서 살아가는 우리의 친구들 말이죠. 혼자일 때는 조용하지만, 마음이 맞는 사람들과는 거리낌 없이 거사를 도모하는 이들이기도 하죠. 네, 너드를 위한 우주 세계는 구체적이고 상세하되 불친절하더라도 파고들 재미와 깊이가 있어야 합니다. 서사는 고전적이되, 일견 낭만적이고 ‘아싸’의 정서를 대변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니까, 일언 배경 설명 없이 두 시간 영화 한 편으로 이 미션을 모두 달성하기는 실로 어렵죠. 그렇기에 미디어믹스나 (이미 잘 구축된) 서브컬쳐에 어느 정도 신세를 지게 됩니다. 스타로드가 카세트 플레이어로 올드팝을 들으며 춤을 추는 오프닝에서, 우리의 서브컬쳐 너드들은 그를 여드름 난 얼굴을 숙이고 티렉스 카세트테이프를 돌려 듣던 십 대 시절 자신처럼 사랑하게 되니까요.


- 사족이 정말 길었네요. 그만큼이나 ‘한국에서’ 대규모 자본을 들여 스페이스오페라에 도전했는데, 그게 두 시간짜리 영화일 경우 너드의 입맛에 맞추는 것은 능력 여하를 떠나 현실적으로 매우 어렵습니다.


- 애당초 한국은 서브컬쳐 그룹의 영향력이 미국이나 일본 대비 미미한 편이고, 주류와의 경계도 아주 선명하지만은 않아요. 특히나 그 범위를 sci-fi, 스페이스오페라로 좁히면, 더더욱 마이너하죠. (스타워즈가 매번 초라하게 퇴장했던 기억을 떠올려보면...) 그런다고 한국의 매니아들이 딱히 만족시키기 쉬운 집단도 아닙니다. 이러니, 굳이 명분과 실리가 모두 빡센 장르 정통성을 추구하는 건 사업적으로 영 미련한 일이에요. 그러니, 스페이스오페라의 틀을 씌운 한국형 블록버스터를 만드는 게 가장 무난한 투자-제작사 입장이었을 겁니다.


그러니, 이 뒤로의 리뷰는 [승리호]를 굳이 스페이스오페라나 sci-fi의 하부 장르로 재단하지 않으려 합니다. 정확히는, 완전히는 어렵고 최대한 배제해보려 해요. (한국의 소위 진성 너드 분들의 컴플레인은, 굳이 제가 아니어도 엄청 많이 올라오고 있기도 하고요.)



- 그래픽도 그래픽인데 미술과 소품, 카메라 움직임 등 ‘보여주는’ 요소들의 완성도가 좋습니다. 기발하지는 않지만, 디테일을 놓치지 않았고 무엇보다 콘텐츠가 많고 빠릅니다. 컷 전환, 편집, 스토리 전개 모두 빠른 편이라 보여지는 것들이 익숙해질 때 즈음이면 장소가 바로 바뀌는 식이에요. 개인적으로는 투박하고 산만한 디테일을 살린 쓰레기 수거선들이나 그들의 거처의 디자인이 멋집니다. 80년대 재패니메이션이 작화의 디테일을 끌어올려 퀄리티를 확보했듯이, [승리호]의 우주 쓰레기 수거 생태계는 굳이 대사로 많이 백업하지 않아도 보는 것만으로 그럴싸한 설득력이 있어요.


반면, 장소마다 퀄리티의 편차가 꽤 나는 건 아쉬웠어요. 이를테면 좁고 그래픽 티가 꽤 나는 클럽 신이라던가, 오래 보면 티가 더 나는 유토피아, 마지막 격전의 무대 같은 곳들... 무산계급의 비주얼에 비해 유흥가, 상류층, UTS의 비주얼이 더 촌스럽고 맥락이 빈약해 보이는 건 적잖이 안타깝습니다. (아마 코신스키 류의 똑 떨어지는 비주얼로 너저분한 수거선 생태계와 대비를 보여주려 했던 게 아닐까 싶은데... 그렇다 하더라도 디테일 자체가 떨어지는 건 결이 다른 문제죠.)



- 대사는 전반적으로 나쁩니다. 아, 주고받는 만담이나 배우들의 합은 나쁘지 않아요. 유해진식 개그나 이병헌 감독류의 말장난이 체질에 맞으신다면 타율이 좋은 편일 거예요.


나쁜 건 대사로 퉁치는 세계관 설명이나 이야기 전개입니다. 방대한 배경도 설명해야 하고, 인물들의 속사정도 설명해야 하고, 꽃님이의 정체나 악의 흑막도 설명해야 합니다. 마지막에는 왜 승리호 크루가 이런 선택을 해야 했는지 까지 두세 번에 걸쳐 설명하며 그들의 행동이 이타적이고 고결한 것임을 이해시켜야 하죠. 영화에서 신파 코드가 계속 지적되는데, 이 영화의 가장 나쁜 점은 신파는 아닙니다. 신파가 과했다기보다는, 나머지 요소들이 너무 급하고 얼렁설렁 이었어요. 아무래도 대사 의존도가 심할 수 밖에 없는 설정이라고는 하지만, 그 정도가 어찌나 심하던지 [블리치]를 보는 기분이 들더군요. 중반 이후부터는 화면은 액션 시퀀스와 일부 감정 신을 위해 존재하고, 대부분의 실제 이야기 진행이나 구멍 메우기는 오로지 대사로만 합니다. 앞서 말한 만담에 비해, 이런 '설명충' 대사들은 듣는 맛과 읽는 맛도 없습니다. 허겁지겁 치고 넘어가기 바쁜 그런 것들이에요.


- 인디아나 존스의 빠른 활극 템포에 카우보이 비밥 식 쿨한 팀워크, 가오갤과 유해진이 반반씩 섞인 말장난, 빈부격차를 공간과 높이로 시각화한 엘리시움스러운 접근 등. 스토리텔링의 구성요소는 여러 레퍼런스의 짜깁기입니다. 하지만 윤제균 사단처럼 마냥 깔 건 아닙니다. 빠른 전개와 함께 레퍼런스들을 가볍게 터치하면서 휙휙 지나가기에, 비영어권 에스에프임에도 옐로 워싱처럼 보이지는 않거든요. 오히려 이 영화는 전작보다 더 노골적이고 직선적인 조성희 감독 스타일의 가족영화를 표방하고 있습니다.


조성희 감독은 동심에 대한 절대적인 존중을 중심에 두고 판타지스러운 영상미와 빠른 전개로 힘 있게 서사를 끌고 가는 접근을 지속해 왔습니다. 장르가 바뀌고 이런저런 설정이 붙었어도 감독의 이런 뚝심은 투자자들에 마냥 휩쓸리지 않았습니다. [탐정 홍길동]이 유사 [씬시티]의 비주얼과 추리 누아르물의 스토리 클리셰를 입힌 유사 가족 탄생기였듯, [승리호]도 결국 에스에프의 탈을 쓴 육아 판타지물이자 유사가족 드라마입니다. 소년소녀다움에 반짝거리는 가치를 부여하고, 이를 통해 과거의 상처를 치유받는 인물들의 이야기인 셈이죠.


절대적인 순수함과 귀여움을 치사량까지 투입한 꽃님이는 이 영화의 진짜 필살기입니다. 캐스팅도 잘했고 자기 역할에도 엄청 충실합니다. 각본도 배우들도 이 캐릭터와 배우를 귀여워하는 게 화면 밖으로 보일 정도예요. 물론 꽃님이와 승리호 크루들의 교감 장면은 느리고, 잦고, 늘어지긴 합니다. 하지만, 흡사 걸그룹 내 최애의 맥락 없는 개인기 예능 타임을 지켜보듯 그러려니 하고 보게 되는 것도 결국 이 꽃님이 캐릭터와 이를 다루는 영화의 진지한 애정 덕분입니다.


- 앞서 팀워크를 이야기했지만, 그 비중은 결코 평등하지 않습니다. 송중기 5, 유해진과 진선규가 2, 김태리가 1 정도예요. 막판에 밸런스를 맞추려고 사연들을 더하긴 하지만, 그때 즈음에는 이미 송중기의 신파가 펼쳐지고 있어요. 결과적으로는 송중기의 드라마에 비중 있는 조연들이 붙은 셈입니다.


- 김태리는 좀 아깝습니다. 가볍고 능청스러운 이면에 사연을 숨긴 캐릭터라는 스테레오타입을 여유 있게 소화하고 있죠. 낮은 목소리 톤도 이런 캐릭터와 잘 어울리고요. 유독 대사들도 짧은 편이고 몸짓, 눈빛 같은 디테일들도 꼼꼼히 캐릭터 구축에 살려냈습니다. 굳이 영웅문을 읽는 장면 같은 세세한 디테일도 좋았고요. 그런데 영화가 도무지, 별로 비중을 안 줍니다. 그래서 감춰진 사연이 후반에 후다닥 나올수록 캐릭터가 급 재미가 없어지는데, 앞에서의 기대 때문인지 그저 안타까울 정도에요.


진선규는 평면적이지만 이런 류의 활극에서 가장 잃을 게 없는, 꽤 좋은 캐릭터를 받았습니다. 다만, 탱커라는 건 알겠는데 배에서 하는 역할이 뭔지는 모르겠습니다. (레이에 모든 역할을 몰빵해 우주유람단이 되어버린 밀레니엄 팔콘의 디즈니 크루보다는 낫지만, 그게 자랑할 건 아니죠.) 끙끙대고 뭔가를 만지고 밀고 표정을 찡그리는데 도통 저게 뭔 역할인지 모르겠어요. 뭔가 조종사와 메카닉 같아 보이는 송중기와 김태리와 비교해, 뭔가 블루칼라 노동을 하는 진선규는 유독 맥락이 더 없어 보입니다. (자신들도 굳이 깊게 설명하고 싶지는 않았던 것 같아요. 우주선과 관련한 설정이나 묘사는 전반적으로 대사로 스리슬쩍 넘기는 이 영화에서도 가장 얼렁뚱땅입니다.)


유해진에 대해 호평이 많은데, 개인적으로는 반반이었습니다. K-2SO에 유해진 목소리를 입힌 이 로봇 캐릭터는, 크루 중 유일하게 역할이 뭔지 눈으로 명확히 보인다는 점이 특히 좋았습니다. 우주 공간의 작살 플레이라는, 눈에 확 뜨이는 액션도 인상적이었고, 실사 캐릭터들과의 시각적 어우러짐도 자연스러웠습니다. 다만, 그의 연기가 지닌 특유의 해학적인 정서는 인정하지만 이 캐릭터와 어우러지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어떤 캐릭터라도 유해진으로 깔때기 시키는 현상은 로봇 CG를 입힌 업동이에서도 여전해서, 생활연기와 캐릭터의 특수성이 충돌할 때는 ‘조금만 더 로봇 같았으면’ 하는 생각이 듭니다.


- 송중기의 태호 캐릭터는 신파의 중심에 있지만, 딱히 배우에게는 죄가 없습니다. [아사달 연대기]에서도 그는 딱히 잘못한 게 없어요. 그 캐릭터 자체가 진부했고, 영상이 들쭉날쭉 조잡했으며, 결정적으로 대사가 정말 안 좋았죠. 잘 생겨서 몰입이 안 된다거나, 연기력이 평가절하된다는 건 [승리호]에서도 고로 성립하지 않습니다. 


송중기라는 배우 자체가 구축해 온 특유의 메이저한 캐릭터/연기 스타일은 [승리호] 속 아싸여야 하는 태호와 영 잘 맞지를 않습니다. 태호라는 캐릭터는 영화에서 가장 긴 시간을 할애함에도 설정이나 전개에 무리수가 숭숭 뚫려 있습니다. 한 순간에 악의 흑막에 의해 추락한 실력파 엘리트 캐릭터라는데, 극 중에서 딱히 그 엘리트 시절의 능력이나 성격 같은 건 보이질 않아요. 즉, 이 정도의 부실한 설명만으로는 '과거를 보고 현재에 공감할 수가 없는' 한계가 있는 거죠. 송중기 특유의 삑사리 없는 연기 스타일도 태호 캐릭터에 '연기 보는 재미'를 딱히 부여하지는 못합니다. 모든 캐릭터가 예능감에 골몰하지만 이 와중에도 송중기의 캐릭터는 (애초에 예능캐 가 없기도 했거니와) 망가지기가 조심스럽습니다. 앞에서는 어쨌든 엘리트 출신이었고, 뒤에서는 부성애로 많은 것을 정당화해야 하다 보니 어쩔 수 없이 생기는 제약이죠. 딱 [런닝맨]에 놀러 온 정도의 원거리 흥겨움이에요. 먼치킨 캐릭터의 피해자처럼 보였던 [군함도]와는 다른 경우지만, [승리호]의 태호는 그 자체로도 두 시간에 담기에 과한 사연의 캐릭터였습니다. 송중기의 이미 구축된 이미지에 의존하거나 이를 적당히 비트는 정도로 소화하기는 더더욱 버거운 캐릭터였습니다. 아마 코로나가 있기 전에는 이미 유명한 송중기의 캐릭터를 중국 등에 레버리지 하기 위한 나름의 고민이 있지 않았을까... 싶긴 합니다.


- 극장에서 안 하길 다행이었다는 생각은 여전히 듭니다. 저조한 흥행이 예상되어서 는 아니고요. (한국 관객들의 관대함은 언제나 산업의 든든한 기반이었죠. [승리호]가 [신과 함께]보다 못날 이유는 하나도 없고요.) 두 시간에 담기데 각본도 설정도 캐릭터도 버거워서, 호불호가 갈릴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얼렁설렁 넘어간 부분들에 대해 마무리는 해야 하다 보니, 중반부 이후는 최소한의 개연성만 부여잡고 각 캐릭터의 사연팔이와 떡밥 회수에 헐떡댑니다. 빠른 초중반 전개에 그런가 하고 보던 이들도, 이 즈음부터는 고개를 갸웃하게 되죠. 돌이켜 보면, 딱히 [신과 함께] 등과 비교해 이 영화가 눈물바다를 강제하는 악성 신파는 아님에도, 어쨌든 후반부의 수습이 급박하다 보니 신파가 더 두드러져 보였던 거 같기도 해요.


- 네, 이 영화는 처음부터 넷플릭스의 6부작 정도의 시리즈였다면 더 좋았을 그런 콘텐츠입니다. 그렇다면 한국의 투자/제작 환경 및 단기 흥행에 대한 여러 고민들이 엮여 있는 지금의 결과물이 훨씬 나아질 수 있었을 거예요. 애초에 재료 자체가 상한 짝퉁이었던 [내추럴시티]나 근본 자체가 없던 [7광구] 등과 비교하기에는 아쉬운 작품입니다. 분명 [승리호]에는 보다 많은 풀어낼 것들이 준비되어 있었습니다. 조금 더 여유를 갖고 이야기를 풀어내고 캐릭터를 구축할 수 있었다면, 스페이스 오페라라는 서브 장르의 너드스러운 열광까지는 아니어도 충분히 즐길 만한 활극이 되었을 겁니다. 기술적 성취뿐 아니라, 외국 뷰어 입장에서 볼 때 독특한 캐릭터 구축과 '가족애'를 강조하는 스토리텔링도, 허겁지겁이 아니었다면 충분히 공감할 수 있었을 거고요. (조금 더 담백했다면 좋았을 텐데..라는 생각은 일단 접어두고..) 솔직히 아무 기대 안 되는 넷플릭스 발 [카우보이 비밥] 제작진에게, 공이든 과든 보여주고 꼭 참조해달라고 하고 싶은 작품입니다.

작가의 이전글 Love Is Here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