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하지 않는 법
이전 “어떻게 자유로워질 것인가?” 책의 제목과 비슷하게 이 책의 제목도 교보문고를 떠돌던 내 시야를 잽싸게 사로잡았다. 호기심에 책을 펼쳤다. 그 안에서 쓸모없음의 쓸모 있음을 설명하는 단락을 발견한다. 이 책이 좋아지기 시작했다.
쓸모없음의 쓸모 있음. 뭔가 말장난 같은 문장에는 내가 세상을 바라보고 싶은 방식이 담겨있다. 내 소중한 사람의 가치관이기도 한 쓸모없음의 쓸모 있음. 생산적이지 않은(=돈이 되지 않는) 일과 시간에 대한 죄책감은 누구나 한 번쯤은 느껴봤을 것 같다. 시간이 소중한 것은 맞다. 하지만 금은 아니다. 우리는 어쩌다가 스스로의 쓸모를 시간을 쪼개가며 입증해야 하는 사회에 살고 있는 것일까? 작가 제니 오델은 사람과 시간의 가치를 모두 생산성으로 환산하는 사회 속에서 ‘잠시 멈춤’의 방법으로 자신만의 현실을 지킬 수 있는 방법을 제안한다.
그가 말하는 ‘잠시 멈춤’이란 사회가 유도하는 관심의 이목에서 한 발자국 벗어나 자신만의 시공간을 회복하는 것이다. 그는 전자기기가 없는 숙소를 잠시 이용하며 사유하거나 자신이 애정 하는 장미 공원을 걸으며 새들을 관찰한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라고 판단될 수 있다. 하지만 이 행위를 통해 거대한 관심경제를 거부하는 선택권을 스스로 가진다는 점에서 본질적인 의미가 있다. 이 책 또한 과정을 중요시하는 가치관에 대해 이야기한다. 요즘 고르는 책들은 희한하게 비슷하다. 과정-중심. 결과 중심의 삶을 살다가 피폐해져버린 경험 탓일까.
결과론적으로만 생각하면 쓸모없음의 쓸모 있음을 고집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돈이 중심인 사회에는 개인이 문제들을 깨닫기 어렵고(권력층의 사회 운영 방식, 소셜미디어의 중독성, 성공한 인생에 대한 주입식 교육, 그에 따른 공허한 인생 목표 설정 등), 사회로부터 주입된 가치관으로 살게 되고, 영문도 모른 채 정신적/육체적 고난을 겪고, 보이는 문제들로부터 탈피하기 위해 유토피아를 꿈꾸지만, 유토피아도 결국엔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는 일이고, 다시 시작한 사회가 지금처럼 되지 않으리란 법은 없으니.
이 책을 읽으며 최근에 같이 읽기 시작한 “상처로 숨 쉬는 법”에서도 사유가 사라진 돈 중심의 사회를 비판하는 글의 재미가 쏠쏠하다. 조금 더 비관적이라고 느끼긴 한다. 삶은 없다고 하며, 희망적인 시선은 현실을 보지 못하게 하는 방해일 뿐이고, 사람의 통찰이라 해봤자 사람은 사회 안에 속했기 때문에 그 통찰조차 온전치 못하다고 할 정도이다. 아직 그의 책을 다 읽어본 것은 아니기 때문에 뭐라고 덧붙이기는 어렵다. 그의 철학적 시선이 조금 가혹하다고 느끼는 정도.
하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는 내용은 모든 목적이 돈으로 집결되는 사회의 그물 속에 존재하는 우리는 태어났을 때부터 교육을 통해 그 상태가 자연스럽게 삶이라고 여긴다는 것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법”의 제니 오델 또한 사람은 사회 속에 존재할 수밖에 없다고 인정했던 부분이다. 사회와 온전히 분리되기 위해서 산에 들어간다고 해도 온전한 분리가 가능할까? 불가능할 것 같다.
그래서 제니 오델은 거부라는 지속 가능한 훈련으로 사회가 유도하는 방향으로부터 다른 곳에 관심을 기울이는 능력을 키우기를 제안한다. 내가 이 책에서 가장 집중한 부분이기도 하다. 사물, 자연, 사람, 또는 그 어느 것이든, 상대를 도구적인 존재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관계적인 존재로 바라보는 것이다. 그가 새를 있는 그대로 바라봤던 것처럼 말이다. 그는 새에 대해 알아가면서 새로운 세계의 확장을 경험했다. 하등 한 동물이 아닌 인간과 같은 자연적인 존재로 바라보았다. 제니 오델의 제안은 내게 상당히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아. 보는 대로 보이는구나.’ 사회가 원하는 생각의 흐름을 그대로 따라가지 않겠다는 주체성이 마음에 들었던 걸까. 쓸모없음의 쓸모 있음이 가능해지는 세상을 꿈꾸는 사람이라서 그런가. 영감이 필요한 사람이라서 그런가. 이유는 모르겠지만 따라 해보고 싶었다.
쉬는 시간에 찍은 사진
아르바이트 쉬는 시간 30분 동안 핸드폰을 보지 않고 연남동 길거리를 걸었다. 중심 도로를 쭉 걷다 보면 흙바닥 위를 걸을 수 있는 길이 나오는데 평소라면 굳이 돌아가지 않을 그 길을 한 번 걸어보았다. 흙을 발바닥으로 느끼면서 깊게 한 발자국 씩 내디뎠고, 나무들과 풀을 세심히 바라보며 거닐었다. 나무를 가까이서 바라보니 번개 모양과 비슷한 갈라짐들이 새겨져 있었는데 마치 사람의 튼 살과도 같았다. 아. 나무도 사람도 똑같이 존재할 뿐이다. 사람이 위대하지도 나무가 열등하지도 않은 그저 살아있는 두 존재로 우리는 마주쳤다. 사람들도 나도 착각한 것 같다. 자연은 착취 물이 아닌 공존하는 존재였고, 오히려 사람이 자연에 대한 예의를 갖추어야 했다. 새로운 세계가 확장된듯한 기분이었다. 느린 속도로 그 거리를 걷는 나의 순간은 어딘가 도시와 어울리지 않아 보였다. 그러면서도 도시에서 자연을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 있음이 경이로웠다. 이런 의식적인 흐름과 연습은 큰 사회 체제에 대한 사소하지만 의미 있는 반항이다.
(핸드폰을 잠시 멀리한 사이에 나는 내 주변 물리적 공간의 존재 또한 알아차렸다. 핸드폰으로도 살아있는 사람들과 교류하는 것은 맞지만, 자연은 우리를 중독시키지 않는다. 소셜미디어에 정보는 참 많지만 맥락은 존재하지 않는다. 앞, 뒤의 내용이 없이 A라는 정보, B라는 정보, C라는 정보가 계속 새로이 탄생된다. 편리성을 무시하긴 어렵다만 때로는 알고리즘이 나보다 먼저 나를 파악했다는 느낌이 이질적이라는 점도 책을 읽으면서 새로이 느꼈다.)
“내게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것은 곧 스스로 생각할 시간을 주고 다른 체제에서 다른 무언가를 도모하기 위해 현재의 체제(관심경제)에서 빠져나오는 것을 의미한다.”
Pg. 29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