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죄책감은 미자 혼자의 몫인가
2시간 19분이 되는 영화였다.
러닝타임이 긴 편에 속하는 이 영화 속에 음악이 나오지 않는다는 걸 왓챠 사용자 평의 누군가가 적어놓기 전엔 알지 못했다. 음악도 없이 주인공이 체감하는 삶의 장면들을 그대로 모아둔 '시'는 삶이라는 것이 꽤 지독하리만큼 답답할 때가 많다는 걸 느끼게 해 주었다.
영화의 스토리는 이렇게 이루어진다.
시를 좋아하는 양미자.
그리고 미자와 함께 사는 손자.
손자와 손자의 친구들에 의해 성폭행을 당한 소녀 희진.
다 피지도 못한 꽃으로 삶을 마감해버린 희진.
사건을 덮으려고만 하는 학교, 가해자 부모들, 가해자들.
그리고 유일하게 죄책감을 느끼는 인물, 양미자.
죄책감으로 쉽게 시를 써 내려가지 못한 양미자.
영화는 3인칭 시점으로 이 상황과 상황에 대처하는 여러 인물들의 모습을 따라간다.
"대체 왜"
영화가 끝나고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갈 때 제일 먼저 든 생각이었다.
"대체 왜 아무도 그 사건에 대해서 일말의 책임감,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 거지?"
이 영화도 영화 '한공주'를 봤을 때의 답답한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불편했다.
알 만큼 아는 10대 청소년인 남학생들의 일말의 죄책감 따위는 없는 표정들.
자기 자식들이 저지른 일에 대해 이야기하려 만난 가해자 아버지들의 술상.
아무한테도 알려지지 않고 합의가 될 것 같다며 자축하는 그들의 소주병.
왜 피해자의 모가 가해자의 부를 만날 때 수그리고 눈치를 보는 듯해야 하나?
왜 가해자의 부들은 마치 귀찮은 일이 생긴 듯한 태도로 이 사건을 대하나?
나만 가해자의 부들이 은근히 양미자를 무시한다고 느끼나?
왜 오직 가해자의 할머니인 양미자만 죄책감에 피해자 모의 눈을 쳐다보지 못하나?
11년 전 영화이기 때문에 감안하고 봐야 하는 부분인가 싶으면서도 전혀 그러고 싶지도 않다.
답답함을 느끼면서도 유일하게 죄책감을 느끼는 양미자의 시선대로 나는 묵묵히 영화의 내용을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양미자는 시를 쉽게 쓰지 못했다.
그녀는 시를 어떻게 써야 하는지 계속해서 묻고 다녔다.
시 수업의 선생인 시인은 그녀에게 시는 마음 깊숙이 있는 것이라고 했다.
그녀는 나무, 꽃, 과일, 강을 보면서 자신의 마음을 읽어보려고 했다.
그러나 그녀가 써낸 시는 죄책감이다.
그리고 시 한 편을 써오는 숙제를 해온 건 오직 그녀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