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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원더엄공 May 15. 2022

돈 때문은 맞지만 돈 때문만은 아닌 이야기

어른의 성장통

  대학 생활 중 세 학기를 해외 교환학생으로 보냈다. 두 학기는 중국에서, 학 학기는 필리핀에서. 두 번째 교환학생 프로그램을 마치고 필리핀에서 귀국한 날은 스물네 살의 마지막 날이었다. 유학 경비 마련을 위해 앞서 일 년을 휴학한 까닭에 당시 나는 동기들보다 이미 일 년이 뒤처진 상태였으나 또 한 학기의 휴학을 앞두고 있었다. 두 번의 가을학기를 외국에서 보낸 까닭에 미처 이수하지 못한 가을학기 편성 전공필수과목 6학점 때문.


  스물다섯, 10년이 지난 지금에야 돌이켜보면 더없이 싱그럽고 어여쁠 때였지만 당시에는 그걸 몰랐다. 20대가 꺾이면 캠퍼스의 젊음이나 낭만과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복학하여 출석 순번 1, 2순위쯤으로 이름을 불리는 고학번 신분으로 대학 강의실에 앉아있자면 군필자로 여겨질지도 모를 노릇이었다. 학과 여자 동기들은 물론이고, 함께 교환학생을 지낸 타과 동생들도 이미 졸업을 앞두고 있거나 본격적인 공무원 시험 준비를 위해 기숙학원 같은 곳에 등록했다고 했다. 나는 또다시 한 학기를 휴학하고 가을학기에 복학하여 졸업 요건을 채우면 스물여섯에 졸업을 하게 될 터였다. 여자 나이 스물여섯, 참 애매한 나이였다. 석사를 졸업하는 경우는 다르지만 겨우 학사나 졸업하는 경우라면 더욱 그랬다. 이력서를 쓰면 ‘자동 필터로 걸러지는 나이’라고들 했다.


  또다시 휴학하게 되므로 남들 걸음걸이에 뒤처지는 것에 대한 불안감이나 타인의 편협한 시선으로부터도 완전히 자유롭지는 못했다. 하지만 나에게는 공백이나 지각에 대한 분명한 이유가 있으니까 그것으로 위안했다. 대학 강의실이나 취업시장 그 어디에서도 또렷한 존재감을 드러내는 매력적인 꽃은 아니더라도 콘크리트를 뚫고 피어난 민들레 정도는 될 수 있을지도 몰랐다. 누구도 예상치 못한 곳에 작지만 단단하게 뿌리내린 아주 작고 소박한 꽃. 무심코 지나는 누군가 한명쯤은 잠시 걸음을 멈추고 나의 존재를 알아봐 줄 수도 있겠지. 나는 오히려 뜻하지 않게 생긴 공백에 꽤 고무적이었다. 이참에 나도 전략적으로 남들 하는 ‘취업 준비’라는 걸 해볼 참이었다. 당장 어학성적 업데이트도 해야 했고, 자격증도 더 따야 했다. 기업체들의 채용공고와 취업사이트를 뒤지며 바늘구멍 같은 취업의 난문을 어떻게 통과할 것인가 궁리했다. 아르바이트는 하지 않았다. 성인이 되어 ‘돈벌이’를 하지 않은 유일한 시기였다. 당장 쓸 시간당 몇천 원의 돈을 벌지 않고 미래를 위해 오롯이 집중하는 시간이 좋았다. 불안하면서도 안락하고 초조하면서도 설레는 맛이 있었다. 하지만 ‘본격 취업 준비’라는 명목 하에 나에게 허락된 이 달콤 짜릿한 무노동의 생활은 딱 일주일만에 막을 내리게 되었다.


12년 전 싸이월드에 올린 사진-그러고보니 나는 꽤 오래전부터 의아한 곳에 피어난 꽃에 관심이 많았구나.

     

  우리 집의 아침은 언제나 일찍 시작되었다. 미장이인 아빠는 어슴푸레한 새벽이면 일터로 향하는 일을 평생 반복했다. 공사판에는 주 5일제가 없으므로 월요일에서 토요일을 매일같이 일했다. 번듯한 휴가도 물론 없었다. 한파에 가끔 뭐든 꽁꽁 얼어 물리적으로 공사가 불가한 날에는 일단 일하러 갔다가 공을 치고 돌아오는 경우가 있는데, 일요일과 어쩌다 걸려든 그런 날이 아빠가 쉬는 날이었다. 다른 가족들의 하루도 자연히 아빠의 출근 시간을 기준으로 시작되었다. 내가 취준생이 되기로 한 당시에도 곧 예순을 내다보던 아빠는 언제나 그래 왔듯 꼭두새벽이면 공사판으로 향했다.


  평생 남의 일을 하다 처음으로 작은 식당을 인수하여 가게를 운영하던 엄마도 새벽부터 분주했다. 아픈 곳보다 안 아픈 곳을 손에 꼽는 게 쉬울 만큼 성치 않은 몸으로 그날 장사에 쓸 값싸고 신선한 재료를 구하겠다며 새벽마다 버스를 타고 재래시장에 나가셨다. 맛깔난 정식을 하루 몇 끼 팔아야 남는 것은 팔고 남은 반찬 몇 가지와 약간의 보람뿐이었는데도 그 일에 참 진심이었다. 또한 3교대를 하던 간호사인 언니는 그야말로 밤낮을 오가며 생활전선에 몸을 아주 푹 담그고 있었으니, 아침 일찍 출근 아니면 막 퇴근해 잠잘 채비를 하고 있었다. 타고나기가 허약체질인 언니는 불규칙한 수면 패턴으로 얼굴이 누렇게 떠 있는 날이 많았는데, 안쓰러우면서도 어떨 때는 그마저 위대해 보인다고 느꼈다.


  한마디로 말해 서울에서 대학 생활을 하던 막둥이만 빼면 동거 가족 중 제일 어리고 건강한 나만 생업에서 자발적으로 열외인 상태였다. 아침 일찍 가족들이 떠난 집에 취준생 혼자 남아 사이클을 돌리며 힘차게 하루를 시작하고자 할 때면 막 가게에 도착한 엄마에게서 어김없이 전화가 걸려왔다. 주로 빨래나 설거지 같은 각종 집안일의 주문으로 전화의 용건은 대체로 간단했지만, 짤막한 전화 한 통의 이면에는 분명 묵직한 무언의 압박이 존재했다. 처음에는 별생각 없이 빨래를 개고 세탁기를 돌렸다. 며칠 반질반질 집 청소까지 해두니 귀가한 엄마가 짐짓 흡족해하시는 듯도 하였다. 하지만 나흘째 연이어 이런 전화를 받았더니 순간 노이로제에 걸릴 것만 같았다. 가족 구성원이라면 물론 누구든 할 수 있는 것이 집안일이지만 그것이 자연스레 내 담당이 되는 것만큼은 영 달갑지 않았다. 이대로 있다가는 취업 성공은커녕 머잖아 주부습진을 얻거나 본의 아니게 내공 9단의 살림 고수가 될 노릇이었다. 이후 내가 ‘엄마. 내가 그때 빨래 널기 싫어서 취직한 거야’라고 말하면 엄마는 결코 그런 적 없다며 난색을 했지만, 정말로 사실이다. 마치 무심코 날아든 작은 돌에 얻어맞은 개구리만 그 돌질의 존재를 아는 격이랄까.     




  어쩌면 퍽 순진했던 부모님은 국립대 나온 딸이 해외 어학연수씩이나 다녀왔으니 당장 번듯한 일류기업에 들어가리라 기대하셨을 테다. 하지만 나는 그전까지 사기업에 취업하는 나의 미래를 그려 본 적이 전혀 없었다. 학창 시절 내가 역사책에서 가장 존경하는 인물은 피 한 방울 없이 나라를 지켜낸 고려의 외교관 서희였으며, 현대사에서 가장 존경하는 인물은 최장수 주중대사를 지낸 김하중 전 통일부 장관이었다. 학창 시절 내 장래 희망은 외교관이었고, 정치외교학과에 진학한 대학생이 되어서는 해외에서 자국민의 안녕을 위해 일하는 영사직 공무원이 되고 싶었다.


  중국 유학 시절 한인교회에서 만난 영사 분과 가까이 교류할 기회가 있었다. 꿈꾸는 일을 이미 업으로 삼는 이를 가까이서 만나고 교류하는 기회란 그야말로 행운 같은 것이리라. 이런저런 자문을 하던 나에게 그는 아주 굵고 짧은 처방을 내주었다. 속세와 단절하고 딱 2년만 엉덩이로 버틸 것. 죽이 되든 밥이 되든 2년이면 결론이 난다고 하였다. 그런데 어쩌나, 나에게는 바로 그 2년이 없었다. 시한부라는 것이 아니라, 정확히는 2년을 버틸 돈이 없었다.


  스물다섯, 이제 적지 않은 나이였으니 꿀 수 없는 꿈일랑 하루빨리 포기할 때였다. 현실에 타협해 적절한 밥벌이를 해야 했다. 나는 구체적으로 그려 본 적 없는 취업전선에 뛰어들기 위해 이제 막 잠깐 멈춰 나아갈 방향을 탐색하면서 신발 끈을 단단히 동여매는 참이었다. 그런 나를 위해 본격적인 취업을 위한 아주 잠시의 내 시간도 허락되지 않느냐는 대꾸는, 차마 할 수 없었다. 어리광 섞인 나의 돌질이 부모 가슴에 피멍을 들게 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고작 눈칫밥(?) 며칠 만에 빠르게 전략을 수정했다. 당장 일할 수 있는 중소기업에 취업하여 스펙 대신 경력을 쌓기로 했다. 어차피 가을학기에는 복학할 테니 딱 한 학기만 일하는 자체 인턴인 셈이었다.      




     

  취업난이라고들 하나 중소기업의 취업 문턱은 그다지 높지 않았다. 몇 군데 적당한 곳을 찾아 입사 지원을 했고, 하루 만에 여러 회사의 면접 요청을 받았다. 면접 시간이 겹쳐 로드뷰로 각 회사를 찾아보았다. 그중 건물이 가장 큰 회사를 선택해 첫 면접을 보았다. 작은 회사들의 발전 가능성이나 전망 따위를 일일이 파악할 도리가 없었으므로 내린 선택이었다. 월급은 떼이지 않으려면 어느 정도 규모는 있어야 했다.


  그럭저럭 무난하게 첫 입사 면접을 보았다. 그날은 내가 따뜻한 나라에서 돌아온 지 꼭 엿새째였고, 본격적인 겨울이 시작된다는 소한이었다. 면접을 마치고 회사의 1층 유리문을 밀고 나오는 순간 쌩 하는 찬바람이 긴장 풀린 온몸을 휘감아 한껏 움츠러들면서 뒷목이 뻑뻑해졌다. 동남아에서 막 돌아온 나에게 겨울 맛 좀 제대로 보라는 듯이 혹독한 추위였다. 혼곤하게 취한 한여름 밤의 꿈에서 이제는 그만 정신 차리고 깨어나라는 듯 매섭고 날카로운 겨울바람이 연신 내 뺨을 내리쳤다. 잰걸음으로 버스정류장으로 향했다. 오들오들 떨며 한참을 기다려서야 나타난 버스에 몸을 실었다. 엄마의 식당으로 갈 참이었다.


  출퇴근 시간 발 디딜 틈 없이 붐비는 버스이지만 평일 낮에는 여유롭게 좌석 하나를 차지할 수 있었다. 밖은 추운데 버스 안은 안락 했다. 울 목도리를 칭칭 두른 채 창으로 쏟아지는 오후의 햇볕을 쬐고 있자니 마치 내 모습이 꼭 일광욕하는 목도리도마뱀 같았다. 이성을 유인하거나 적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과시의 도구인 멋진 목도리를 지녔으나 웬만한 사육환경에서는 평생 자신의 목도리를 펼치는 경우가 없다는 목도리도마뱀. 내 한낱 꿈은 상실한 목도리도마뱀 목도리의 어떤 기능들처럼 존재조차 잊히게 되겠지. 이제 내 목도리는 오직 생존을 위한 체온조절이라는 최소한의 기능만을 유지하게 될 터였다. 괜스레 콧등이 시큰하고 눈알이 시렸다. 내 안과 밖의 온도 차가 너무도 큰 탓일까, 코끝에 이슬이 맺히고 안구에 결로가 생기는 듯했다. 코를 훌쩍 들이 삼키고는 슥슥 문질렀다. 고질적인 비후성 비염 때문일 뿐이었다고 아직도 믿고 싶다. 휴대전화를 꺼내 예쁜 표정을 짓고 셀카를 찍었다. 왠지 오래 남겨 두고픈 순간이었다.


  먹고사느라 꿈을 포기하는 이가 어디 나 하나뿐인가. 저 시크한 버스 기사님의 꿈은 무어였을까. 길 건너편 도로에서 공사 중인 인부의 꿈은 뭐였을까. 육 남매의 장녀로 홀어머니를 도와 간신히 국민학교를 졸업하고 공순이가 되었던 우리 엄마도 바라던 피아노와 영어를 배울 수 있었더라면, 근사한 자신의 꿈이란 걸 ‘가져는’ 볼 수는 있었을까. 어른이 되는 당연한 통과 의례일지도 몰랐다. 누구 하나 알아주지 않는 어른의 선택을 하는 내가 대견했다. 겨우 스물다섯이던 그날의 나는 남은 인생에서 가장 젊은 날이면서도 동시에 살아온 날 중 가장 어른인 순간을 지나고 있었다. 한 시간을 훌쩍 넘겨 엄마 가게 근처 버스정류장에 막 다다랐을 때, 다음 주부터 출근하라는 회사의 연락을 받았다. 뜬구름 잡는 순진한 꿈 타령은 그 버스 안에 고스란히 남겨 둔 채 휑하니 내렸다. 이윽고, 나는 당당히 엄마표 왕돈가스 정식 한 그릇을 뚝딱 해치울(자격을 가질) 수 있었다.     




  취직한 회사는 전 직원 채 스무 명이 되지 않는 중소기업이었다. 직원들의 평균 근속연한이 길고 이직률이 낮았다. 나만 빼고 서로 집안의 숟가락 수도 훤한 사이들 같았다. 인력 고착화가 오랜 공동체인 만큼 자연히 신입을 배척하는, 소위 말하는 텃세가 있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나쁜 사람은 없었다. 살갑고 다정하게 품어주지는 않았어도 딱히 모나게 굴지 않고 제 할 일만 착실히 하면 턱없이 비인격적으로 대하는 이는 없었다. 오래 일할 마음은 아니었던지라 적절한 선에서 타인에게 맞추면서 내 마음을 지키려고 노력했다. 미움 살 짓은 피하면서도 부러 잘 보이려 애쓰느라 나를 소진시키지 않는 것이 관건이었다.


  입사 당시 전임자의 공석으로 업무는 뒤죽박죽이 되어 있었지만, 마땅히 그 일들을 제대로 가르치며 인계해줄 사람이 없었다. 황무지 같은 콘크리트를 뚫고 피어나고픈 꽃 한 송이가 되고자 한다면 매우 적절한 환경이었다 하겠다. 똥과 된장도 구분하지 못하는 무의 상태에서 정말 맨땅에 헤딩하듯 주먹구구식으로 일을 익혔는데, 결과적으로 이것은 내게 큰 행운이었다. 자신의 유창한 모국어를 뽐내는 듯 속사포로 업계 전문 용어가 섞인 중국어를 마구 쏟아내는 거래처 담당자와의 전화에서 한껏 긴장하여 기초적인 단어인 ‘상품’을 뜻하는 중국어 ‘货’조차 알아듣지 못해 되물었을 때 다른 사람을 바꾸라며 무시당했지만 ‘나밖에 없으니까 나와 대화해.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단어는 영어로 알려줘’라고 말했다. SOS를 청할 사람이 없었기에 일을 빠르게 배워나갔다.


  또 내가 맡은 일은 ‘수입’ 즉 ‘매입’이었는데, 이 일이 적성에 아주 꼭 들어맞았다. 매입이란 모름지기 좋은 물건을 남들보다 싸게 사서 적시에 가져오는 것이 관건. 타고난 것인지 후천적으로 발달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남들보다 싸게 사는 것이라면 꽤 오래 몸에 밴 재주가 있었다. 심지어 중국 유학 시절 말하기 대회에 참가했을 적 나의 연설 제목은 ‘나의 가격 절충 법’이었다. 넉넉지 않은 환경 탓이었겠지만 늘 피곤할 정도로 가격을 비교하고 깎고 절충하던 내 습성이 이 회사에 와서 진정 빛을 발했다. 굴러들어 온 신입이 매입 단가를 낮추고 회사의 이윤이 늘어나자 사장의 예쁨을 독차지했음은 말할 것도 없다. 이후 사장은 ‘계급장 다 떼고 돈 많이 버는 이가 이 회사의 사장이다.’라는 명언을 남겼다.


  ‘가을학기에 복학해야 해서 그만두어야 하겠습니다.’ 했더니 수업을 듣고 오라고 배려를 받았다. 다음 해 졸업 요건을 모두 채우고 대기업 공시에 도전할까 하던 찰나에는 연봉을 30% 인상받았고, 그다음 해에는 또다시 25% 인상받았다. 회사로서는 파격적인(?) 대우였다. 중소기업 청년 소득세 감면까지 받으니 박 터지는 대기업 문턱을 겨우 통과해 높은 월세를 감당하며 타지 생활을 하는 것보다 낫겠다는 계산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반년 정도 일할 요량으로 구한 첫 직장에 나는 쭉 눌러앉게 되었다. 스물다섯에 입사한 나는 이제 서른다섯이 되었고, 풋내 나던 대학생은 어느새 늠름한 애 둘 맘이 되었다.




  연봉이 매년 파격적으로 오른 것은 당연히 아니다. 초반에 급격히 올랐고, 머잖아 정체기가 왔으며 현재의 연봉은 3년째 동결 중이다. 최근 몇 년간 가파른 최저임금 상승세를 고려하면 그 연차에 고작 그거 받냐는 말을 들을 법도 하다. ‘또 동결’인 연봉계약서에 사인을 할 때면 현타가 강하게 오긴 하지만, 이제 서른다섯이 된 나는 내 몸값을 조금 에누리하므로 얻게 되는 당당한 을의 위치를 어느 정도 즐길 줄도 알게 되었다.

 

  이 회사에 뼈를 묻겠다는 비장한 각오라던가 물에 물 탄 듯 술에 술 탄 듯 얇고 길게 연명하는 직장생활의 노하우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꿈을 포기해야 했던 이유도 돈이었고, 반년 정도 일할 요량이던 나를 눌러 앉힌 것 또한 분명 돈이었다. 어린아이들을 떼어놓고 맞벌이 주말부부의 고달픈 삶을 감내하고 일터로 나가는 것도 분명 돈 때문임을 부정할 수는 없지만, 어느새 나는 통장에 찍히는 액수의 크고 작음보다 더욱 중요한 것이 있음을 아는 나이가 되었다. 나는 동결된 연봉에 적절한 노동을 제공하는 여유를 누린다. 익숙한 대부분의 업무를 자발적이고도 능숙하게 처리하되, 일처리 속도나 몰입도를 노련하게 조절하여 내 에너지를 적당히 비축한다. 일에 잠식되어 내가 모조리 소진되지 않도록 의식적으로 나를 아끼는 방법을 터득했다. 퇴근시간까지 매듭짓지 못할 일은 미련 없이 털고 일어나 칼퇴를 한다. 그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으며 산뜻하고 당당하게 외친다. “수고하셨습니다.” 오늘의 나에게, 내가 아닌 수많은 나들에게.


  어른의 밥벌이는 분명  때문이지만, 지난하고 끝없는  과정을 오직 돈만 보고서는 지속할 수는 없다는 것을, 서른다섯의 나는 이제야 안다. 세상에 그대로인 것은 정말  월급뿐인 씁쓸한 현실에도 어김없이 출근 도장을 찍어야 하는 오늘의 내가 가여워 눈물짓지 않는다. 이제 나는 현실에서 이탈하지 않는 작고 소박한 꿈을   알게 되었고,  속에서도 나를 사랑하며 지켜가는 법을 하나  배우고 있으니까. 매일 오가는 같은 길 위에서도 기꺼이 새로이 피어난 작고 소박한 을 발견하는 즐거움을 누릴 수 있게 되었으니까. 그렇게 오늘도, 여전히, 작고 귀여운 돈벌이를 위하여 오늘의 걸음을 내딛을 뿐이다. 걷다보면 계절은 어김없이 변하고 이따금 새로운 계절이 선사하는 낯선 바람에 움츠러들 때도 있겠지만, 나는 더이상 그것에 압도 당하지 않을 것이다. 뜨겁거나 차가울 뿐인 바람은 기실 언젠가는 지나갈 것이며, 나는 이제 결코 나의 호시절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


  나는 더이상 모두가 주목하는 화려한 꽃이 되지 못함에 서글퍼하거나 부디 콘크리트를 뚫고 피어난 민들레한 송이라도 되기를 소망하지 않는다. 이제 나는 들에 산에 콘크리트에 아무 데나 여기저기 내가 원하는 곳에 꽃씨를 뿌리는 사람이 되고 싶다. 제철에 맞는 꽃이 알맞게 피어오르면 금상첨화지만, 때아닌 꽃이 뒤늦게 피어도 좋고 안 피어도 상관없다. 스물다섯의 내가 그토록 바랐으나 누구에게서도 듣지 못했던 그 말을 할 줄 아는 어른이 되고 싶다. 돈 때문은 맞지만 돈 때문만이어서는 안 된다고, 세상에 중요한 건 돈보다 훨씬 많다고. 겁부터 먹고 포기하지 말라고, 도전으로도 충분하다고, 설령 돈 때문에 놓은 것이 있다해도 부디 슬픔에 잠식되지 말라고, 무엇이 되어도 너 자체로 충분히 괜찮다고, 돈 때문만이 아닌 너의 결정을 나는 영원히 응원한다고.



스물다섯의 나로, 돌아갈 수는 없어서 쓰는 나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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