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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원더엄공 Mar 30. 2022

배부르고 등 따스우면 행복한 줄 알라고요?

30대 영끌족 입니다.

    2020년 10월 8일, 오전 근무 내내 휴대전화를 힐긋거렸다. 점심시간이 되도록 기다리던 연락이 없자 슬그머니 불안한 마음이 일기 시작했다. 기대에서 불안으로 마음이 슬 옮겨 가려는 찰나, 용기를 내어 전화를 집어 들었다. ‘기대 반, 걱정 반’이라는 표현이 딱 적확했다.


  “응, 엄공아!”

  “야아- 오전 내내 마음 졸이다가 소식이 없어 전화해본다. 어떻게 됐어, 됐어? 됐어?”

  “아아, 응, 됐어! 됐다고 여기저기 알리기가 민망해서 먼저 연락 못 했어.”

  “와, 축하해! 왜 연락 안 해줬어- 난 또 연락이 없길래 계속 걱정했잖아.

   정말 잘됐다. 동은? 층수는?”

  “응. 잘됐지. 고마워! 동호수도 좋아.

   지하철역 바로 옆은 아니라도 평지 쪽이고, 층수도 꽤 높고.”

  “아휴, 그간 얼마나 마음 졸였어. 정말 다행이다. 잘됐다. 잘됐어. 너무 좋다!”


  결혼 4년 차, 만기 때마다 이사를 반복해 벌써 세 번째 전셋집에서 사는 친구였다. 친구는 수년째 도전한 신혼부부 특공에서 고배를 마셔 아득한 내 집 마련에 낙담하던 중이었으며, 전세 만기가 돌아올 때마다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반복되는 이사와 전세금 인상으로 몸도 마음도 몹시 지쳐있었다. 또한 7년의 신혼부부 특공 지원기한마저 이제 얼마 남지 않은 상황이어서 이번 청약에 걸었던 친구의 기대는 어느 때보다 크고도 절박했다.




  간절히 바라면 이루어진다고 했던가. 만약 친구의 당첨에 누군가의 간절한 바람이 작용했다면 아마 약 1할 정도는 내 공도 있었으리라 당당히 말할 만큼 나 또한 진심으로 친구의 당첨을 기원했다.


   친구가 당첨된 S 건설사의 아파트는 4천 세대가 넘는 대단지로, 시청·법원·경찰청·교육청 등 각종 관공서가 밀집한 지역구의 중심에 위치한다. 시내 어디로든 이동이 편리할 뿐 아니라 우수한 학군지 이기도 해서 한마디로 지역 시민이라면 누구나 탐낼만한 아파트였다. 특공 경쟁률은 9대 1, 일반분양 평균 경쟁률은 약 120대 1.


  친구의 사정을 누구보다 잘 알았던 만큼 나는 누구보다 친구의 당첨을 기뻐했다. 으뜸가는 대장급 아파트의 국민 평형(34평)을 당당히 거머쥐었으니, 급기야 친구가 아주 자랑스러울 정도였다. 점심 티 타임 내내 직장동료들에게 친구의 핫한 당첨 소식을 마구 떠벌렸다. ‘와아, 좋겠다’라는 부러움이 마치 나를 향한 것처럼 괜스레 으쓱해지기도 했다. 접시가 아니면 사무실 모니터라도 깨어 먹을 법한 여자 셋의 수다로 즐거운 점심시간이었다.




  점심시간이 끝나고 오후 근무를 시작하기 위해 책상 위를 정리했다. 점심 직전까지 손에 쥐고 있던 서류들이 이리저리 널브러져 있었다. 흩어진 서류들을 하나둘 그러모으던 중, 문뜩 시선이 서류 아래 가리어 있던 책상 투명 유리에 꽂혔다. 그 아래 끼워진 딸아이의 그림이 눈에 든 순간, 나는 그만 맥이 턱 풀렸다. 손에 쥔 서류들을 아무렇게나 툭 내려놓고는 털썩 자리에 앉았다. 점심시간에 마시다 반쯤 남은 커피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좀 전까지 입안 전체에 몽글몽글 감돌던 따뜻한 라테 특유의 부드러움은 온데간데없었다. 차갑게 식은 커피의 맛은 쓰고도 아주 떨떠름했다.


  큰아이가 이미 네 살이었다. 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에는 나 또한 내가 학창 시절을 보낸 해당 학군지로의 이사를 오래전부터 바랐다. 하지만 매정한 세상은 작디작은 개미 한 쌍이 나날이 고군분투하며 차곡차곡 쌈짓돈 마련할 시간 따위를 기다려 주지 않았다. 초등학교 입학까지는 앞으로 3년이 더 남았지만, 부동산 시장은 이미 비정상적으로 과열되고 있었으니 벌써 몇 년 전부터 점찍어둔 아파트들은 불과 1년 만에 값이 두 배로 치솟은 상태였다. 부랴부랴 서둘러 상투인들 잡을라치면 매도인이 쌜쭉 마음을 바꿔 매도 희망가를 올리거나 매물을 거두어들여 어그러진 계약이 몇 주 째 벌써 서너 건이었다. 초등학교 입학 전은 물론이요, 앞으로 아이가 중학생이나 고등학생이 되어도 영영 그 동네에 입성할 수 없을 것만 같았다.




  그 친구와 나는 같은 해 두 달 차이로 결혼을 했다. 그다음 해 한 달 차이로 첫째 아이를 낳았고, 또 그로부터 2년 여가 흘러 석 달 차이로 둘째 아이를 낳았다. 비슷한 시기에 결혼하여 임신, 출산을 경험하고 아이를 키우면서 끈끈한 동지애로 결혼 전보다 더욱 가까워진 사이였다. 친구네 부부의 아버지는 각각 전업투자자와 대기업 임원, 어머니는 각각 교수와 초등학교 교사로 자라난 가정환경은 서로 아주 달랐지만, 그것에 딱히 이질감을 느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저 서로 다른 점이 하나 있다면 그 친구는 임신과 동시에 일을 그만두고 전업맘이 되었고 나는 워킹맘이라는 정도였다. 이따금 영유아기에 직접 아이를 키우는 것과 출산 후에도 경력을 유지하는 것의 장단점을 나누며 때로는 서로를 부러워하기도 하고 때로는 서로를 위로하기도 하였으니, ‘전업주부’와 ‘직장인’이라는 신분 차이로 인한 시기나 질투 같은 이물감 역시 조금도 없었다.


  적어도, 그날 전까지는.     




  서로 같고도 다른 당시의 상황을 ‘신혼부부 특공’에 대입하여 요약하자면 이렇다. 당첨의 당락을 좌우했다고 볼 수 있는 ‘결혼 4년 차와 2자녀’라는 조건은 같았다. 내가 지원할 수 있었더라면 친구와 나의 가점은 동점일 터였다. 하지만 한 집은 맞벌이, 한 집은 외벌이였으니 특공의 소득요건인 ‘가구의 소득’에는 차이가 있었다. 맞벌이라 하여 외벌이 소득의 2배까지 소득요건을 늘려주는 것이 아니어서 우리 부부는 소득 초과로 신혼부부 특공에 지원할 수 없었다.


  결혼 전부터 그것을 몰랐던 바는 아니었다. 따라서 애당초 특공을 포기하고 신혼집을 매매했지만, 어찌 된 것인지 우리 집값은 부동산 호황과 아무런 상관없다는 듯이 수년째 제자리만 굳세게 지키고 있을 뿐이었다. 주택담보대출 LTV 70%를 꽉 채워서 산 우리의 신혼집은 끽해야 2억 후반, 분양가 6억 인 친구네 집은 조합원 매물의 거래가가 10억을 웃돌고 있었다. 당첨된 순간 4억은 거저 번 셈이었다. 대장 딱지를 달고 있는 아파트가 입주 때까지 꾸준히 가격이 상승할 것을 고려한다면, 향후 2~3년 후 자산 격차는 최소 9-10억은 될 것이었다.


  두 사람의 합산 소득이 외벌이 소득보다 ‘조금’ 많다 하여 더 윤택하거나 여유로운 삶을 사는 것은 분명 아니었다. 그들에게는 부모로부터 지원받은 빚 없는 전세금과 자차가 있었고, 우리에게는 다달이 고정으로 나가는 주택담보대출과 차량 할부금, 아이의 양육비가 있었다. 또한 수시로 ‘부모님 카드 찬스’를 누리는 그들과 달리 우리에게는 오히려 ‘자식 카드 찬스’를 제공해야 하는 경우가 훨씬 많았다. 많이 벌어도 많이 버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없어서 둘이 더욱 합심하여 아등바등 버는 중이었다.




  장거리 달리기 중 바로 옆 트랙에서 줄곧 나와 함께 나란히 뛰고 있다고 생각했던 동료는 실은 나보다 이미 두세 바퀴를 앞서며 뛰는 중이었고, 앞으로 달리면 달릴수록 둘 간의 격차는 자꾸만 크게 벌어질 터였다. 그날에서야 그것을 처음으로 깨달았다. 여태껏 출발점은 단 한 번도 공정한 적이 없었으며 앞으로도 영원히 그러할 것이었다. 제아무리 젖 먹던 힘을 다해 힘껏 달리고 내달려도 나는 늘 한참 뒤처져 트랙 위를 겉돌며 의미 없는 제자리걸음 질을 할 뿐이었다.


  일이 도무지 손에 잡히지 않았다. 채 백일이 안 된 둘째를 떼어놓고 복직 한지가 두 달째, 도대체 이게 다 무슨 소용 인가 싶었다. 애써 키보드 위에 얹은 손가락 끝은 자꾸만 찌릿찌릿해지고 오후 내내 콧잔등이 시큰거렸다. 해가 저만치 툭 떨어져 어스름이 내려앉은 이른 저녁 시간, 퇴근길 차 안에서 남편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제야 꾹 참았던 눈물이 왕하고 터졌다. “민이가 드디어 특공에 당첨됐어. 정말 잘됐지! 참 기쁜데, 이상하게 나 너무 슬퍼... 엉엉엉... 나 정말 누구보다 열심히 살아왔다고 생각했는데, 한 번도 남 가진 것이 부러워서 내가 못나 보인 적이 없었는데.. 지금은 너무 허무하고 속상해.., 흑흑흑 ”




  맹세코 그저 남이 잘되어서 아픈 배는 아니었다. 여태 남 잘되는 것보다 내가 잘되는 것에 관심이 많은 나였다. 내겐 없고 타인에게는 있는 인프라 따위에 크게 미련 둔 적 없었고, 나에게 주어진 자연스러운 환경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작고 당연한 것들을 그저 묵묵히 해내며 열심히 살아왔다. 시험 기간 아르바이트를 하러 가면서 한 번도 도서관에 틀어박혀 공부하는 친구에게 위협을 느낀 적은 없었다. 휴학하고 스스로 번 자비로 어학연수를 하면서 든든한 부모의 지원으로 여유로운 유학 생활을 하는 친구들을 부러워하지 않았다. 중소기업에서 일하면서 번듯한 대기업에 다니는 이들에게 위축되지도 않았다. 양가 도움 없이 결혼 준비는 물론, 이후 모든 경제생활을 유지하면서 바랄 수 없는 경제적 지원 따위에 박탈감을 느낀 적 또한 없었다. 조금 못한 상황에서도 노력의 결과는 늘 그들의 것과 비슷하거나 오히려 조금 더 나아 보였으니까.


  그런 내가, 어쩌면 그간 애써 모른 척 외면하고팠던 가혹한 현실을 처음 정면으로 마주한 날이었다. 냉혹한 현실 앞에 처절하게 굴복했다. 아등바등 살아온 내가 한없이 가여웠다. 누구보다 열심히 살아왔다고 자부했건만, 그 모든 세월이 한 줌 재가되어 순식간에 사라져 버리는 듯한 상실감을 견딜 수가 없었다. 돈 때문도 맞지만 비단 돈 때문만은 아니었다. 어쩌면 내가 쌓아왔다고 믿었던 그간의 노력은 애초부터 존재할 수 없는 허상이었을지도 모른다는 허탈함에 혼란스럽기까지 했다.




  맞벌이로 주말부부로 왕왕 남편과 다툴 때면 어른들은 종종 내게 말씀하셨다. 당신들의 젊은 시절에 지금의 우리처럼만 풍족하게 먹고살았다면 당신들은 아무런 걱정이 없었겠다고, 배만 곯지 않으면 되니 적당히 아끼며 외벌이로 살라고. 한마디로 '배부르고 등 따스운 것으로 만족하고 행복하게 여기라는 것'이었다.


  나는 그 말이 사무치도록 미웠다. 그 말은 내가 당당히 바랄 수 있는 행복의 범위를 아주 좁은 1차원 적인 것으로 제한하며 내 인생의 모든 번뇌를 '안주하지 못하는 탐욕이 초래하는 부작용' 따위로 치부한다. 오늘보다 나은 내일을 위해 너무 애쓰지 말고 적당히 허기나 채우고 누일 자리가 있음에 만족하라는 말은 어찌나 폭력적이고도 잔인한가. 마치 나의 작은 희망조차 무참히 앗아가고 가여운 동력마저 무력화시키는 무자비한 총성 소리 같았다.


  배부르고  따스운 정도는 도무지 나의 행복의 대전제가   없었다. 물론 안분 자족, 무소유, 미니멀 라이프 모두  좋지만, ‘가질  있지만 갖지 않는  ‘가질  없어서 포기하고 적당히 위안하는  현저히 결이 다르니까. 나에게는 따스운 밥이나 안락한 집으로는 온전히 채워지지 않는 분명한 나만의 행복 기준치가 존재하고, 타인에 의해 강제로 나의 행복 분기점을 낮추고 싶지 않았다. 나아가 나보다 못한 처지에 놓인 사람의 불행에 빗대어 상대적인 행복을 얻거나 반대로 나보다 앞선 사람의 행복에 빗대어 불행해지고 싶지도 않다.




  사실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내 마음가짐에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런데 별안간 이 모든 충격이 하루아침 친구의 특공 당첨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대관절 집이란 게 무엇이기에 나는 이리도 휘둘리는가에 대하여 나는 곰곰이 생각했다.  '집'이라는 항목에서 내가 설정한 행복 기준치는 도대체 어느 선인가. 조물주 위에 건물주라는 말 따위를 신봉하거나 하루아침 별안간 부동산 알부자가 되는 허황된 꿈을 꾼 적은 없는데, 행여 나를 이토록 슬프게 하는 것은 정녕 가질 수 없는 것에 대한 탐욕에 의한 것인가에 대하여도 반추해보았다.


  어릴 적부터 현재까지 내가 살았던 집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갔다. 나의 담력을 키워주었던 푸세식 화장실이 딸린 반지하 월세방부터 허름한 산동네 주택을 우연히 낙찰받아 부모님이 결혼 15 만에 마련하신  자가주택까지, 4번의 남의 집과 3번의 우리 집에서 살아온 순간을 더듬더듬 되새겼다. 지지리도 가난하게 시작한 부모님의 삶에 평생 로또와 같은 ‘인생 한방 분명 없었다. 하지만 그간 우리 가족이 스쳐 지나온 많은 집들에는 평생 부모님이 흘리신 정직한 땀방울이 고스란히 스며 있었음을 깨달았다.  세월 동안 부모님은 결코 타인과 자신을 비교하거나 자신의 불행을 탓하느라 세월을 허비하지 않았다. 아주 작고 나약한 힘일지언정  힘을 다해 애면글면 성실한 삶을 일구셨다. 그렇게 우직한 노력을 통해 야금야금 가족의 굴을 넓히는 삶을 몸소 보여주셨다. 단칸방에서   ,   칸으로. 월세방에서 전세로, 자가로. 반지하에서 지상으로, 단층 집에서 2 집으로.


  부모님이 몸소 보여주신 것은 단순히 ‘재산을 증식하는 삶’에 그치지 않았다. 현재 주택 1층에 거주하며 2층에서 나오는 아주 적은 월세 수입으로 생활비에 보태고 계신 부모님은 넉넉지 않은 형편에도 늘 자신보다 약한 이들을 살뜰하게 보살피신다. 나에게 몇 달째 월세를 밀린 세입자에 대한 넋두리를 늘어놓으면서도 막상 그것을 독촉하는 법이 없다. 만삭 시절 남편의 갑작스러운 구안와사로 몇 달째 밀린 월세에 집주인으로부터 매몰차게 내몰렸던 엄마는 이런저런 삶의 무게로 힘들어하는 세입자들의 사정을 헤아릴 줄 아는 집주인이 되었다. 오히려 힘내라고 뜨끈한 삼계탕을 만들어 올려주는 넉넉한 집주인이 되었다. 그마저도 밀린 월세에 집주인 마주치기가 부담스러울세라 문 앞에 슬그머니 두고 내려오는.




  그제야 내 감정에 대하여 선명해지고 나만의 행복 분기점에 대하여 보다 명징해졌다. 단순히 아이의 학군이나 남들보다 좋은 집에 살고자 하는 집착은 아니었다. 갖지 못한 것에 대한 탐욕으로 인해 스스로를 채찍질하며 몰아세우거나 불행을 자처하는 것은 더욱 아니었다. 나는 내가 보고 배운 바, 노력이 결코 무용하지 않다는 것을 세상과 나에게 보란 듯이 증명해 보이고 싶다. 성실하고도 선한 부자가 되고 싶다. 그저 입에 풀칠이나 하며 내 몸 하나 건사할 정도 말고, 스스로 충분한 행복을 누리면서도 내 것이 차고 넘쳐 타인과도 더불어 넉넉히 나누는 삶을 살고 싶다. 노쇠한 나의 부모에게 인색하지 않게, 어린 내 자녀들의 가능성을 제한하지 않으면서, 소외된 이웃들을 두루두루 살피면서. 물론 물질이 없어도 선한 마음을 가질 수는 있겠지만, 나는 내 것 다 퍼주고도 행복할 수 있는 위인은 분명 아니니까.


  바라는 바가 확실해지니 다시금 나아갈 힘을 얻었다. 비록 바위를 치는 계란이 될지언정 나는 앞으로도 애쓰기를 멈추지 않을 것이다. 또한 한방에 앞질러 가는 이들을 하염없이 바라보며 슬퍼하느라 나의 걸음을 멈추지도 않을 것이다. 삶이라는 긴긴 경주에 저마다 도달하는 종착역은 모두에게 다를 테니까. 분명한 내 지향점만 바라보며 묵묵히 내게 주어진 이 경주를 끝까지 꿋꿋이 이어 달릴 테다. 남들과 비교하지도 현실에 적당히 타협하거나 안주하지도 않으면서 나만의 꾸준한 노력을 이어갈 때, 세상 누구에게나 동등하게 주어진 유일한 조건인 '시간'만큼은 노력을 배신하는 법이 없으니까. 결핍을 든든한 동력의 원천으로 삼아 열심히 태워 움직일 것이다. 한 발짝, 한 발짝. 그렇게 어제보다 나은 오늘의 내가, 오늘보다 나은 내일은 내가 될 것이다. 내가 적극적으로 나의 행복을 추구하며 조금씩 이루어 낼 때, 비로소 주변인의 행복에도 진정으로 손뼉 쳐줄 수 있는 건강한 내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 이튿날, 우리는 적금을 깨고 비상금까지 탈탈 털어 모아 현금 전 재산과 가진 돈의 2배가 넘는 대출을 보태 지하철 1분 컷 초역세권 브랜드 신축 아파트 분양권을 매수했다. 그야말로 빚투, 전형적인 30대 영끌족의 반열에 뛰어든 셈. 일각에서는 집값 폭등의 주범을 3040 빚투 세력으로 지목했으나, 누가 감히 자신의 행복을 포기하지 않는, 자신의 노력을 처참히 무력화시키는 현실에 저항하는 개미들의 빚투를 탐욕스럽다 비난할 수 있을까.


  아파트는 무럭무럭 자라 어느덧 입주를 몇 개월 앞두고 있다. 잘한 투자인지 아닌지 아직은 속단할 수 없지만, 먼 훗날 내가 부동산의 여왕이 되는 음흉한 상상을 해 본다. 아니, 어느 날 갑자기 여왕개미가 되어서 떵떵거리는 일장춘몽일랑 말고, 그저 행복한 부자 일개미가 되기를 꿈꾸어 본다. 성실하고 정직하게 땀 흘리는 나의 하루하루를 기꺼이 응원하며 차곡차곡 곡식을 쌓고 조금씩 나의 방을 넓혀가는 실속 있는 개미. 그러다 어느 날 소외된 이웃, 갈 곳 없는 나그네를 만나면 기꺼이 내 먹을 것을 퍼다 주고 내 방 한 칸 내어줄 수 있는 부자 개미. 그래. 그 정도면, 나는 충분히 차고 넘치도록 행복할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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