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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원더엄공 Mar 21. 2022

시아버지의 눈물을 보았다.

며느리는 몰라요, 아무것도 몰라요.

전 편 '며느리도 밟히면 꿈틀 합니다.'에 이어서 연재 합니다.


https://brunch.co.kr/@wonder-umgong/8




  쇼핑백에서 책 한 권을 집어 꺼냈다. 팀 켈러, 결혼을 말하다. 두세 시간 뒤 이 기차가 다다르는 어느 낯선 도시에서 처음으로 마주하게 될 예비 시부모님에게 ‘제가 이 결혼을 하려는 이유는요’ 운을 떼며 잇기 시작할 말들에 대하여, 어떠한 힌트를 줄지도 모른다는 기대 에서였다. 벌써 십수 번은 거뜬히 읽었을 크고 작은 세모들로 접힌 책 귀퉁이들을 이리저리 넘겨보지만, 눈을 겨우 통과한 새까만 글자들은 도무지 머리까지 다다르지 못했다. 힌트를 얻기는커녕, 괜스레 초조한 마음만 들켜버린 듯해 서둘러 책을 덮었다. 고개를 들어 찬찬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른 토요일 아침인 까닭일까, 승객들이 수시로 들고나긴 했지만 내 옆자리를 비롯한 기차 안 여러 좌석은 아직 드문드문 비어있었다. 차창 밖으로 나를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나무들을 바라보자니 이윽고 어지럼증이 느껴졌다. ‘멀미가 날 땐 가까이 말고 멀리 봐야 해!’ 어릴 적 바퀴 달린 것만 타면 멀미를 하던 내게 엄마가 줄곧 들려주시던 말을 떠올리며 저 멀리 산등성을 내다보았다. 아름다운 8월의 신록은 푸르고도 푸르렀다.


  ‘어떤 분들이실까. 아들과 만난  겨우   만에 결혼하겠다는 나를 이상한 아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으실까.  마음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나에게 어떤 질문들을 하실까. 좋은 분들이시면 좋겠다.’


  자식의 선택을 믿으신 시부모님은 며느릿감을 만나기도 전부터 결혼을 승낙하셨다. 하여 이미 어느 정도 결혼 준비가 진행 중인 상황이었지만, 그것과 별개로 처음 시부모님을 뵈러 가는 그 길은 한없이 떨리고도 긴장이 되었다. 마치 ‘합격’과 ‘불합격’의 당락을 좌우하는 최종 면접을 앞둔 순간 같았다. 이런저런 생각과 기우는 계속해서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미처 추스르지 못한 내 마음과는 상관없이 정해진 속도로 우직하게 선로를 내달리던 기차는 그렇게 나를 새로운 세상으로 데려다주었다.




  부모님께 색싯감을 선보이는 첫 만남을 위해 남편은 당시 직장이던 대구에서 부산을 들러 함께 순천으로 가자고 했지만, 나는 남편의 제안을 거절하고 홀로 기차를 탔다. 대구에서 곧바로 본가로 가면 될 것을, 그저 나를 픽업하기 위해 둘러 가는 수고로움을 보태고 싶지 않았다. 나는 정말로 역방향이나 비효율적 동선에 관대한 사람이 아니었으며, 무엇보다 내 남편이 될 그 사람을 아껴주고 싶었다.


  정장과 구두가 담긴 쇼핑백과 커다란 선물 상자를 양손에 들고 기차에서 내렸다.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기차역 1층으로 내려가자 마중 나온 남편이 보였다. 처음으로 자신이 나고 자란 도시에서 나를 맞이하는 그는 더없이 여유롭고 자연스러워 보였다. 기차역은 아담하지만 아주 밝고 깨끗했다. 이따금 낯선 사투리 소리가 들려왔다. 남편에게 짐을 맡겨두고 화장실에 가 정장으로 갈아입었다. 쇼핑백에 고스란히 넣어 온 정장이 구겨지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거울을 보며 옷과 머리의 매무새를 정돈하고 화장을 고쳤다. 잔뜩 굳은 얼굴 근육을 이리저리 풀어보았다. 양 볼 커다란 보조개에 잔뜩 힘을 주고 입꼬리를 올려 보았다. ‘시어른들께 진심으로 잘해드려. 소중한 분들이시다.’ 커다란 구름 모양 말풍선처럼 엄마의 당부가 떠올랐다.




  뒤로 산을 끼고 있는 조용한 주택가의 언덕 비탈 자그마한 이층 집 앞에 다다랐을 때, 대문 앞에 서 있는 아담한 체구의 한 중년 여성이 보였다. 긴장 반, 설렘 반으로 심장이 빠르게 요동치자 나는 깍지 낀 남편의 손을 꽉 잡았다. 네다섯 걸음의 발치를 서로 사이에 두었을 때, 그 중년 여성은 두 팔을 가득 벌린 채 환하게 웃으며 나를 향해 다가왔다. 나를 꼭 껴안았다. 끌어안은 두 손으로 내 등을 연신 쓸어내리며 말했다.


  “아이고, 우리 식구 왔구나. 어디 있다가 이제 왔냐, 잘 왔다. 잘 왔어.”


  수십 년째 생사도 모른 채, 아니 어쩌면 존재조차 모른 채 살고 지내던 이산가족의 재회와도 같은, 다소 어리둥절하고 서먹서먹하지만 따스하고 벅찬 감정이 왈칵 몰려오던 순간이었다. 이곳에 오는 동안 기차 안에서 나를 잔뜩 긴장시킨, 오가리라 예상하던 수많은 예상 문답들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었다. 만반의 준비를 했던 자기소개나 인생에 대한 포부는 물론이요, 허를 찌르는 질문이나 심지어 남편에 대한 내 사랑을 입증하는 간단한 테스트조차 없었다. 그저 ‘편히 앉고, 많이 먹어’ 그뿐이었다. 시아버님의 훤칠한 호감형 외모는 어쩐지 우리 아빠와 닮은 듯도 했다. 말수가 많지는 않으셨지만, 인자하신 분 같았다.


  아무런 조건도 편견도 없이 나를 맞아주신 두 분이 참으로 고마웠다. 그날 나는 앞으로 누구보다 좋은 며느리가 되겠다고 결심했다. 어쩌면 시어머니가 평생 겪으셨을 딸 없는 설움을 상쇄할만한 예쁘고 착한 며느리가 되고 싶었다. 엄마와 내가 그러하듯, 드라마 주인공의 이야기를 마치 함께 아는 어떠한 지인의 일처럼 진지하게 주고받는 그런 사이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또한 자고로 며느리 사랑은 시아버지라고, 사랑스러운 며느리가 되고 싶었다. 착하고 예쁜 며느리인 동시에 듬직한 맏며느리의 역할도 잘 해내고 싶었다.




  시부모님과 나, 서로의 첫 마음만큼은 분명 더없이 순수하고 아름다웠으리라. 하지만 순수하고 아름다운 것들 대부분이 그저 멀리서 두고 바라볼 때만 그 아름다움을 지속하듯, 내 처음 마음 역시 오래가지 못했다. 들에서 꺾여 집 안 화병으로 옮겨와 제아무리 길어야 일주일이면 모든 아름다움을 소멸하는 들꽃 같았다.


  결혼 한 달 후 시댁에서 맞는 첫 설날, 시외할머니는 내게 말씀하셨다.


“아들 낳을 것이다. 너들 결혼하기 벌써 몇 달 전부터 아들 태몽을 꿨어.”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 만난 지 5개월 만에 한 결혼이었으므로 나와 남편은 당장 아이를 갖고 싶지 않았다. 몇 년은 연애하듯 알콩달콩한 신혼을 보내고 아이는 조금 느긋하게 갖기로 했는데, 벌써 아이 타령, 아니 게다가 심지어 아들 타령이라니! 얼른 손주의 자식이 보고픈 어르신의 마음이야 그렇다 쳐도, 열렬한 딸 선호 주의자인 나는 시아버지 앞에서 눈치도 없이 대뜸 웃으며 대답했다.


“할머니~~ 근데 저는 이왕이면 아들보다는 딸이 좋아요.^^”

 

  그러자 옆에서 가만히 듣고 계시던 시아버지는 단호하게 말씀하셨다.


“딸도 낳고! 아들도 낳고!”


  그로부터 정확히 일주일 뒤, 나는 정말로 임신테스트기에서 선명한 두 줄을 보았다. 임테기를 확인한 순간부터 지독한 입덧에 시달렸다. 곁에서 돌봐줄 남편이 없는 주말부부의 상황 속에 덜컥 예정에 없던 임신을 한 나야 힘들었지만, 시부모님께서 기뻐하신 것은 이루 말할 것도 없었다. 장손 며느리가 결혼 한 달 만에 임신을 했으니! ‘잘 챙겨 먹어라, 편한 옷 사서 입으라’ 계좌에 공 다섯 개짜리 금액이 수시로 찍혔다. 게다가 임신까지 미리 알아맞힌 할머님께서 틀림없이 아들일 것이라 장담하셨으니 시아버지는 아들 손주 생각에 한껏 고무되셨을 것이다.


  여덟 달 뒤, 나는 큰딸을 낳았다. 사실 딸을 바라긴 했지만 정말로 딸일지는 몰랐다. 태몽도 그랬고, 아들이 많은 집안이니 나 역시 당연히 아들일 줄 알았다. 그렇게 바라던 딸을 낳았지만 나는 온전히 기뻐하지 못했다. 시어른들은 그저 건강하게 출산함에 기뻐하셨지만, 시아버지에게 실망을 안겨 드렸다는 사실이 나를 더없이 불편하게 만들었다.     




  또 시댁과의 관계에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이상한 면이 하나 있었으니, 그것은 남편이 미우면 시부모님도 싫고, 시부모님께 서운하면 남편도 미워지는 요상한 알고리즘이 작용한다는 것이었다. 또 다른 친척들이 나를 홀대하면 시부모님과 남편이 세트로 야속하게 느껴졌다. 나의 원 가족과의 관계에서는 생겨나지 않는 감정이었다. 여태껏 살며 엄마한테 서운해서 아빠까지 싫다던가, 동생과 싸우니 언니까지 밉거나 하는 경우는 분명 없었다.


  ‘마누라가 예쁘면 처가 말뚝 보고도 절을 한다.’라는 말이 거꾸로도 성립된다는 것을 깨닫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임신, 출산, 맞벌이, 주말부부를 지속하며 정말로 하루 건너 하루 남편과 다투었는데, 그 과정에서 남편과 시댁에 대한 서운한 마음은 켜켜이 쌓여만 갔다. ‘어차피 팔은 안으로 굽는다.’라는 뾰족한 마음과 함께.




  큰아이를 낳은 지 2년쯤 지나, 둘째를 임신했다. 이번에는 철저한 계획 임신이었다. 큰아이와의 나이 터울도 고려했고, 출산할 계절도 계산했다. 몇 달 전부터 남편과 엽산도 챙겨 먹고 음식조절도 했다. 믿거나 말거나 ‘아들 갖는 법’도 열심히 뒤져 철저하게 숙지, 실행(?)했다.


  확실한 성별이 나올 때까지 어른들께는 우선 임신 소식을 전하지 않기로 했지만, 입이 근질근질한 남편은 몇 주 뒤 시아버지께 전화를 드렸다. 혹 무슨 꾸신 꿈은 없는지, 우리 집안 자기 다음 대의 항렬자가 무언지 너스레를 떨었다. 무언가를 감지하신 아버님께서는 둘째를 임신했는지 되물으셨다. 남편이 대답을 피하자 이어 불안한 듯 말씀하셨다. "주위에 보니까 대체로 터울이 커야 성별이 다르더라."


  그간 내가 느낀 것은 무언의 압박감이었지만, 장손인 남편에게는 확실한 유언의 책임감이 지어졌다. 아들을 가져야 하니 터울을 좀 두고 성급히 아이를 갖지 말라는 우회적인 당부였다. 작년에 태어난 시조카도 딸이었으니 아버님께서 슬슬 초조하신 것도 이해가 갔다. 내 개인적 취향은 ‘남매’보다는 ‘자매’ 쪽이 확실했지만, 이번에는 반드시 아들이어야 했다. 또다시 어른들께 실망을 드리고 싶지 않았다.


  초음파상으로 성별을 추측해 볼 수 있는 가장 이른 시기인 임신 12주가 되기를 목이 빠지도록 기다렸다. 각종 포털과 맘 카페를 통해 ‘각도법’을 섭렵하고 12주 차 검진에 임했다. 두 번째 임신이니 의사가 구태여 알려주지 않아도 어디가 어디인지 훤히 눈에 들어왔다. 99% 딸이 분명해 보였다. 16주 검진을 앞두고 한 달 동안 열심히 뒤지고 뒤졌다. ‘성별 반전’


  그토록 바라고 바라던 반전 따위는 없었다. 둘째 임신 소식을 전하며 ‘또 딸이에요’을 전해야 했던 내 마음은 너무도 슬펐다. 축하받을 수 없는 임신을 했다는 사실이 씁쓸하고, 충분히 환영받고 예쁨 받지 못할 둘째에게 너무도 미안했다. y 염색체를 주지 않은 남편이 원망스러웠고, 둘째 딸인 나를 임신했을 적 엄마의 마음이 이러했을까에 대하여 생각했다. 그렇게 둘째 딸을 낳았다. 초음파상으로 행여 어딘가에 가리거나 숨어있을지도 모른다 믿고프던 무언가는 어디에도 없었다.



 

 시부모님에게 잘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엄마로부터 귀에 가시가 박히도록 들은 말이었지만, 사실 나에게는 롤모델이 없었다. 나의 친할아버지, 친할머니는 아빠와 엄마가 결혼도 하기 훨씬 전에 돌아가셨으니 정작 우리 엄마도 평생 ‘며느리’가 되어 본 적은 없었다. 육 남매 중 넷째인 엄마가 묵묵히 아픈 외할머니를 돌보시는 모습, 늘 동네 어른들을 살뜰히 챙기시는 모습은 보았지만, 며느리가 시부모님께 잘한다는 것은 직접 보고 배운 바가 전혀 없었다.


  따라서 나에게 ‘어른들께 잘한다’라는 것은 그저 내가 어릴 적부터 익혀 온 ‘어른 공경’의 수준에 지나지 않았다. 어른이 먼저 수저를 드시면 뒤이어 식사를 시작하고, 어른이 식사를 마치기 전까지 먼저 식사 자리를 뜨지 않는 것, 어른이 드나드실 때면 자리에서 일어나 문 앞에서 배웅하거나 맞이하는 것, 어른을 대할 때는 올바른 존댓말을 사용하고 바른 자세로 앉는 것, 토 달지 않고 어른들의 말을 겸허히 듣는 것 같은.

 

  그래도 내 나름대로 최선은 다했다. 아무리 바빠도 일주일에 한 번은 안부 전화를 드렸고, 아이들이 태어난 이후로는 꾸준히 사진이나 동영상을 보내 드렸다. 주말에는 영상통화도 잊지 않았다. 선물을 드리거나 식사를 대접하는 등 금전적인 면에서는 인색하지 않게끔 해드렸다. 항상 ‘친정 부모님에게 보다 조금 더 쓰자.’라는 마음으로 정성껏 해 드렸다. 비록 며느리를 향한 유일한 바람이었던 아들 손주를 안겨 드리지는 못했지만, 그 외에 할 도리는 다한다고 생각했다.      




  부부싸움이 집안싸움이 되었던 그 사단 이후 내 며느리 자존감은 바닥을 찍었다. 정말로 내 부모같이 잘해드리고 싶었는데, 그저 사랑받고 인정받고 싶었던 내 마음은 아무짝에도 쓸모없이 내동댕이쳐졌다. 아무리 노력한들, 다시금 이전의 마음을 회복하기란 도무지 불가능해 보였다.


  불편하고도 어색한 며느리 노릇이 어언 4개월쯤 되어가던 무렵, 산산이 부서진 며느리의 자존감을 단번에 회복하는 일이 하나 생겼다. 10년째 지속하던 직장생활 중 내가 산업통상부 장관으로부터 표창장을 수여하게 된 것이었다. 사실 장관님께는 송구하지만, 솔직히 말하면 그 표창장이 나에게 대단한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수출에 기여했다고 하여 내 월급이 느는 것은 전혀 아니었으니까. 그저 월급 받고 착실하게 직장생활을 하며 사장님의 지갑을 두둑이 채워드린 일에 지나지 않았던 그 일이, 시아버지에게는 무척이나 자랑스럽고 감격스러운 일이 되었다.


  ‘기념 볼펜도 한 자루 없더라’ 무심코 남편에게 찍어 보낸 표창장 사진을 전해 받은 시아버지는 당장 축하 전화를 주셨고, 아무래도 감격스러운지 밤에 잠들기 전에는 재차 문자를 보내 축하해주셨다. ‘누구네 며느리가 장관상을 수여했습니다.’ 다니시던 교회에는 광고가 나가고 감사 헌금까지 하셨다. 며칠 뒤 아버님의 SNS 프로필 사진에는 내 이름 석자가 달린 표창장이 당당히 올라왔다. 서툰 솜씨로 보탠 문구와 함께. ‘우리 며느리 최고’ 그렇게 나는 시아버지의 자랑이 되었다.


우리 며느리 아이들 기르면서 대단하다, 어쩌면 나는 이 말 한마디가 갈급했던걸까.




  처음에는 마냥 쑥스럽고 민망했다. 정말로 내가 돈을 번 것도 아니고, 엄청 대단한 일도 아닌데 뭔가 대단한 공을 세운 것처럼 뻥튀기가 되는 것 같았다. 그런데 그렇게 하루 이틀, 아버님이 보내신 문자를 읽고 또 읽으며, 아버님의 프로필 사진을 보고 또 보자니 기분이 나름 꽤 괜찮아지는 것이 아닌가. 어릴 적 뻔한 레퍼토리로 써서 제출한 독후감이 어정쩡한 레벨의 상장을 받았을 때. 내게 주는 의미는 미미했지만, 상장이라 쓰인 얄팍한 종이 한 장을 내밀었을 때 칭찬 일색이던 아빠 엄마의 모습을 보며 내 안에 샘솟던 아주 작은 무언가가 꿈틀대는 것을 느꼈다.




  그로부터 한 달 뒤, 시아버지의 생신이 돌아왔다. 시어머니의 생신은 섣달그믐 날이고, 시아버지의 생신은 그 일주일 전이라 여태 단 한 번도 생신 당일에 찾아뵌 적이 없었다. 일주일만 있으면 설날이니 먹고살기 바쁜 자식들이 연이어 시댁행을 하는 것은 여의치 않았으니까. 결혼 전 자식들이 타지에서 직장생활을 하던 때에도 마찬가지였고, 결혼 한 이후에도 마찬가지였다. 아버님의 생신은 늘 시부모님 두 분만 함께 조촐하게 보내오셨다.


  늘 그래 왔듯 모두가 일주일이 지난 뒤 몰아서 축하해 드릴줄 알았던 시아버지의 생신을 앞두고 나는 남편에게 말했다. ‘올해는 아버님 생신 전날에 가서 당일에 축하해 드리자. 마침 월요일이니 휴가를 하루만 써도 될 것 같아. 이제 애들도 제법 컸으니 그다음 주에 또 가도 괜찮을 거야.’ 지나치는 것이 늘 당연했던 아버님의 생신에 큰 아쉬움을 담은 적이 없던 남편은 내 쪽에서 먼저 제안한 시댁행이 여러모로 의아한 눈치였다. 괜스레 멋쩍은 나도 다시금 몇 마디 덧붙였다. ‘사실 결혼 처음부터 내내 마음에 걸렸어. 주말부부로 맞벌이한다고, 임신하고 육아한다고 평일 중간에 떡하니 끼어있는 생신은 한 번도 챙겨드리지 못했지만, 이번엔 꼭 당일에 가서 축하해 드리고 싶어’          


  결혼 6년 차, 네 식구가 되어서야 처음으로 당일에 아버님의 생신을 축하해 드리러 갔다. 준비한 선물과 딸아이가 그린 그림이 담긴 카드, 커다란 케이크를 사서 갔다. 언덕 비탈 작은 텃밭을 끼고 있는 그 이층 집으로.  




  어머님은 정말로 상다리가 부러지도록 진수성찬을 차려 놓으셨다. 거실에 차려진 둥그런 상 주위로 삼대가 나란히 둘러앉았다. 아버님, 어머님, 아들, 며느리 손녀딸들. 푸짐하게 한 상 가득 차려진 밥상 한가운데 겨우 공간을 마련해 케이크를 올리고 촛불을 켰다. 거실 불을 끄고 다 함께 힘껏 손뼉 치며 노래를 했다. ‘생신 축하합니다. 생신 축하합니다. 사랑하는 할아버지~ 생신 축하합니다.’



  ‘후’ 촛불 끄는 놀이에 신이 난 아이들을 위해 세 번을 신나게 연창 했다. 아이들 모습이 마냥 귀여웠다. 아이들을 보는 즐거움에 아버님을 자세히 살피지 않았다. 그렇게 무심코 띠릭-하고 거실 스위치를 켰는데, 그제야 보였다. 어느새 촉촉이 젖은 시아버지의 눈가가, 눈물을 훔치시는 아버지의 모습이. 목멘 목소리로 띄엄띄엄 말을 이으셨다. ‘고맙다.. 고맙다.. 아들, 며느리, 손주들과 맞는 첫 생일이 무척 행복하구나..’ 어머님은 내 손을 연신 쓰다듬으며 말씀하셨다. ‘와 줘서 고맙다.. 항상 둘만 보내던 생일이 적적했는데.. 애들 데리고 힘든 걸음 해줘서 정말 고마워...’     




  아, 나는 무심한 며느리였다. 그간 내 딴에는 잘한다고 노력했지만, 나도 힘든데 이 정도면 내 할 도리는 충분히 다한다고 그렇게 자만했지만 나는 너무도 무심하고 나쁜 며느리였다. 딸같이 다정한 며느리가 된다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었다. 사실 나는 내 부모에게조차 다정다감한 딸이 아니니까. 두 아이의 엄마가 된 이제야 겨우 철이 들까 말까 하는 중이지만, 나는 자라면서 세 남매 중 아빠 엄마의 마음을 가장 많이 할퀴고 아프게 한 딸이 분명했다.


  서로에게 크고 작은 상처를 주고받던 그 긴긴 세월 속에는 언제나 늘 이해받지 못한 여린 진심이 있었고 상처받은 나를 지키기 위한 보호본능과도 같은, 가시 돋친 수많은 말들이 있었다. 나의 오만함을 깨닫고 나의 나약함을 인정하고서야 내 눈을 막고 있던 콩깍지 같은 것이 걷히기 시작했다. 시아버지 시어머니가 정녕 원했던 것은 형식적인 도리와 효도가 아니었다. 아들을 낳아 종갓집의 대를 잇는 것 또한 아니었다. 어쩌면 그분들이 나에게 바랐던 것은, 사소하게 오가는 일상의 다정한 인사와 기쁜 소식들, 혹은 그저 생일이면 도란도란 모여 정겨운 얼굴을 마주하며 함께 밥을 먹는 시간. 정말로 작고도 소박한 행복일 뿐이었다.


  시아버지의 눈물을 보고서야 나는 다시금 좋은 며느리가 되고 싶다는 마음을 회복했다. 이제는 정말 최고의 며느리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아버지의 남은 평생 생신 케이크만큼은 반드시 내가 사드릴 것이다. 내게 따스하게 내어주시던 시부모님의 품이 아프거나 외롭지 않도록 잘해드리고 싶다. 시댁에서 돌아오는 길, 이제는 넷이 되어 함께인 차 안에서 창밖을 내다보았다. 8월의 푸르른 신록이 눈부시던 6년 전의 그 산. 2월의 산은 차디찬 겨울을 지내며 이미 푸른 잎을 모두 떨구었지만, 내 눈에는 훤히 보였다. 조용히 숨죽이며 연둣빛 새싹을 틔울 새봄을 준비하고 있는 사랑스러운 모습이. 열렬한 응원을 가득 담아 하염없이 그 산을 바라보았다.





전 편 '며느리도 밟히면 꿈틀 합니다.'에 달아주신 많은 댓글들 하나하나 모두 읽어보았습니다.

공감과 위로, 응원부터 자존감 없는 며느리의 노예근성이라는 비난까지도요!

일일이 댓글을 달지 못했지만 계속해서 쓸 힘을 주셔서 진심으로 고맙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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