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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원더엄공 Mar 11. 2022

며느리도 밟히면 꿈틀 합니다.

서운한 마음, 묵혀두는 게 능사는 아닐지도.

전 편 '한여름 가족 캠핑이 우리에게 남긴 것'이어 연재합니다.


https://brunch.co.kr/@wonder-umgong/15




  “나 오늘은 좀 빨리 올라갈게, 점심 전에.”     

  일요일 아침 식사 중인 남편이 조심히 운을 떼며 말했다. 둘째를 낳은 뒤 재개한 주말부부 생활이 이미 1년 3개월째였지만, 일요일마다 남편을 떠나보내는 것은 여전히 선선히 받아들여지는 일이 아니었다. 하여 일요일 아침이면 나는 언제나 대체로 시무룩했다. 오후면 남편은 또다시 떠나고, 나는 어김없이 혼자가 될 테니까. 정확히 말하면 혼자가 되는 것은 내가 아닌 객 생활을 하는 남편이지만, 남편이 떠난 뒤 나는 늘 ‘철저하게 혼자’인 외로운 순간을 마주했다. 현관문이 철컥 굳게 닫히고, 도어락이 띠리릭 잠기는 무심한 생활의 소음이 그 순간만큼은 참으로 잔인하고도 매정하게만 느껴졌다. 방금까지 커다란 내 남자가 신발을 신고 서성이던 현관에는 적막하고 쌀랑한 기운만이 가득했다. 남겨진 자만이 오롯이 감내해야 하는 허전함, 떠나는 자는 이해할 수 없는 감정이다.


  남편이 떠나면 어린 두 아이를 돌보는 것은 바로 옆자리 짝꿍에게는 없는 나에게만 주어진 불공평한 숙제 같은 것이었다. 남은 자의 외로움이나 허전함은 차치하더라도 ‘쳇바퀴 같은 독박 육아 한 주의 재시작’을 알리는 그 순간이 반가울 리는 만무하다. 처자식 두고 일터로 떠나는 남편의 몸과 마음도 편치는 않겠지만, 평일 내내 일하랴 애들 보랴 고군분투하는 내 삶과는 달리 ‘신체의 자유와 저녁이 있는 삶’을 지내는 남편에게 때때로 유치한 질투심 따위를 느끼기도 했다. 남겨질 나의 외로움이나 고달픔은 안중에도 없이 일요일마다 서둘러 돌아갈 생각에 가득 차 있는 남편의 모습은 언제나 얄미웠다. ‘돌아가는 시간’을 두고 다투기를 몇 차례 반복한 끝에 돌아가는 기차 편을 서너 시간 미루는 것으로 합의한 남편이 ‘오늘은 좀 빨리 갈게’라고 일방적으로 선언한 것이다.


  이유인즉슨, 지난 금요일 밤 서울 사는 작은아들 네가 갑작스레 방문하겠다고 하자, 부산 사는 큰아들 네까지 와서 함께하길 바랐던 시부모님께서는 우리가 당신들의 방문 요청을 거절하여 서운해하신다는 것이었다. 자꾸만 들르라는 부모님의 성화에 출발지는 경상도요, 도착지는 경기도인 이 사람이 점심을 먹기 위해 전라도를 경유해서 간다는 소리였다.



  나는 남편의 시댁행이 정말로 탐탁지 않았다. 오늘 하루 남편이 평소보다 조금 일찍 떠난다고 하여 길어질 나의 독박 육아나 외로움 따위가 문제가 아니었다. 가장 큰 이유는 남편의 졸음운전 습관이었다. 남편은 소소한 교통사고가 잦은 편이었다. 나는 그런 남편의 장거리 운전이 늘 불안했고, 조금 불편해도 주말마다 집을 오갈 때 기차 편을 이용하는 것도 그 때문이었다. 자차로 목적지까지 대각선으로 곧장 질러가지 않고 ㄴ자로 둘러 가겠다니 운전 거리가 늘어나고 시간이 길어져 일단 불안했다. 또한 가서 밥 한 끼 먹고 자리를 뜨겠다니, 둘러 가는 시간이나 노력 대비 터무니없이 짧은 시간 머무는 비효율적인 계획도 못마땅했다. 나는 평소에도 역방향이나 비효율적 동선에 관대한 사람이 아니었다. 시간과 노력, 비용을 들여서 갔다면, 적어도 하루나 이틀쯤 넉넉히 머무를 수 있을 때 가는 편이 더 좋다고 생각했다. 더욱이 한 달만 있으면 곧 추석이었다. 마지막으로 남편의 비자발적인 방문 동기도 이해할 수 없었다. 작은아들 네가 갑자기 왔다고 큰아들 네까지 대뜸 오라는 시부모님의 일방적인 방문 요청도 싫지만, 그걸 거절했다고 서운해하시는 것은 더 싫었다. 모두 각자의 삶과 생활, 계획이라는 게 있지 않은가. 나는 남편이 부모님께 우리의 상황에 대하여 설명하고 이해를 구하길 바랐다. 의기투합하여 떠난 캠핑에서 만신창이가 된 우리의 몸과 마음, 틀어진 부부관계에 대한 고찰 없이 부르니 무조건 잠시라도 가겠다는 남편을 이해할 수 없었다.


  결국 언성이 높아졌다. 부모 집에 가겠다는 사람을 내 올가미에 가두어 못 가게 할 수도 없는 노릇이어서 남편에게 ‘가라 마라’ 할 사안은 아니었지만, 또 쿨하게 보내주고 싶지는 않았다. ‘정 그렇다면 가시든가, 근데 나로서는 정말 이해는 안 간다.’는 나에게 남편은 ‘네가 그렇게 싫다면 안 갈게, 못 간다고 말씀드릴게’라며 말했다. 그간 남편 눈에는 정녕 내가 ‘시댁이라면 그저 싫은 아내’로 밖에 보이지 않았던 걸까. 반대하는 내 마음을 도대체 왜 몰라줄까. 남편의 말은 싸움을 잠재우기는커녕 외려 내게 서운한 마음을 가득 보태주었다.

   

  나라고 아들과 손주들이 보고픈 시부모님의 마음을 모르겠는가. 시부모님의 방문 요청을 거절한 나 역시 마음이 편치는 않았고, 내 나름대로 다 셈이 있었다. 다음 주 일요일은 광복절이었고, 월요일은 대체 공휴일로 지정된 터였다. 3일간의 연휴가 생기면 주말 이틀간 시댁에 함께 다녀오고, 월요일에는 남편도 여유롭게 직장으로 복귀하리라 생각해 다음 주에 시부모님을 뵈러 갈 생각이었다. 다만 아직 중소기업에는 법적 강제력이 없는 대체 공휴일이었으니, 우리 회사의 방침을 몰라 쉬이 입밖에는 내지 못했을 뿐. 그런 내게 ‘됐다. 너 우리 집 가는 거 원래 싫어하잖아’라는 남편의 말은 가슴에 비수가 되어 꽂혔다. 남편의 ‘내가 안 가면 됐지?’와 달리 싸움은 끝나지 않았고, 결국 남편은 짐을 싸서 문을 박차고 뛰쳐나갔다.




  남편이 떠나고 아이들이 곤히 잠든 오후, 심란한 마음을 추스르려는 찰나 시아버지에게서 전화가 왔다. 방금 남편이 시댁에 다녀갔으며, 왜 같이 오지 않았느냐 나무라시는 전화였다. 주말부부의 애환과 주중 내내 남편과 다툰 우리의 상황도 모르면서 마냥 꾸짖는 시아버지가 야속했다. 평소 며느리에게 싫은 말씀을 하시는 분이 아니었기에, 나는 더욱 서운했다. 동방예의지국의 맏며느리답게 나 또한 평소 어른들 말씀에 구태여 토를 다는 편은 아니었다. 하지만 아무것도 모르고 나무라시는 소리를 가만히 듣고 있자니, 한순간 ‘고약한 며느리’가 되는 것은 도무지 억울해 참을 수가 없었다. 지렁이도 밟히면 꿈틀 하니까.


“아버님, 저희가 다 같이 가면 애 아빠가 시댁 갔다, 집에 왔다, 다시 직장으로 가야 하는데 그건 체력적으로 너무 힘들어요. 평소 졸음운전을 많이 해서 저도 불안하고요.”

“그럼 애들을 네 차에 태우고 차 2대로 오면 되지 않느냐. 잠시 왔다 가면 될 것을, 뭐가 그렇게 오기 힘드냐.”


  어린애 둘을 태우고 차 2대로 오라니, 애당초 생각조차 해본 적 없는 기발한 발상이었다. 전화를 끊고 아무리 곱씹어도 억울했다. 생신도 아니고 명절도 아닌 그저 보통의 주말이었다. 어버이날에 다녀왔고, 한 달만 있으면 곧 추석이었다. 왜 이토록 무리한 방문을 요구하는지, 못 갔다 한들 그것이 정녕 이리도 쓴소리들을 일인지 납득가지 않았다. 시아버지의 억지스러운 꾸지람은 고분고분하던 5년 차 며느리 마음에 반성은커녕 반항심만 잔뜩 불러일으켰다. 주말부부나 맞벌이의 고충, 어린 손주들과 바쁜 자식들의 컨디션 따위는 전혀 헤아리지 못한다는 서운함과 실망감은 나날이 커졌다. 다툰 남편과도 연락 없이 지낸 지 며칠 뒤, 아침 일찍 시어머니에게서 문자가 왔다. 주말에 오시겠다는 것. 서운함과 억울함에 대하여 할 말은 많지만 나름 꾹꾹 참고 있는 이 상황에 오신다니 반가울 리가 만무했다. 긴 답장을 보냈다. 남편에게도 보냈다. 지금 부모님을 맞이하는 것이 불편하니 오시지 않도록 알아서 잘 말씀드리라고 당부했다.





  아, 시랜드는 이래서 안 되는 거구나. 맘카페에 심심찮게 올라오던 며느리들의 수많은 신세 한탄들이 별안간 모두 이해되기 시작했다. 남편도, 시부모님도 그저 다 싫었다. 그날 퇴근 후 초저녁에 아이를 재우고 일찌감치 잠자리에 들었다. 휴대전화 소리도 꺼두었다. 푹 자고 일어나면 사소한 짜증이나 화는 더러 까먹거나 무뎌지는 경우도 있었다. 잔뜩 성나고 삐뚤어진 내 마음이 좀 순화되길 바랐다. 다음 날 아침, 모처럼 만에 숙면을 취한 나는 상쾌한 몸과 마음으로 눈을 떴다. 휴대전화에는 부재중 전화와 문자가 여러 통 와 있었다. 지난주 시댁 방문 요청 거절에 이어 이번 주 시부모님의 방문까지 거절한 소식을 전해 들어 노발대발하신 시아버지의 전화였다. 전화를 받으라는 시어머니의 문자와 아버지의 전화를 받지 말라는 남편의 문자도 와 있었다. 그날이 생일이던 조카에게서 걸려온 영상통화도 있었다.


  가끔 한밤중에 도시를 관통하는 태풍이 있다. 모두가 깊이 잠든 밤 중 요란한 비바람을 퍼부었던 태풍은 새벽녘 동트기 전 유유히 도시를 빠져나간다. 아침 일찍 잠에서 깨어나 암막 커튼을 활짝 열면, 얼른 한껏 들이키고픈 신선한 공기로 꽉 찬 듯한 눈부시고도 쾌청한 하늘만이 눈앞에 펼쳐진다. 일기예보는 허풍이었던가, 간밤의 태풍은 그저 꿈만 같이 아득하게 느껴진다. 휴대전화 속 남겨진 몇 건의 긴급 재난 알림을 무심히 지우고 차창 너머 마주한 ‘무사한 도시와 나’에 대해 안도 한다. ‘조용히 지나간 착한 태풍’에 대한 안도는 잠시, 거리에 나서 여기저기 흩뿌려진 흙과 꺾인 나뭇가지, 나뒹구는 간판이나 고장 난 신호등을 직접 보고서야 비로소 밤새 도시를 덮친 무시무시한 태풍의 자취를 더듬어 그 실체를 알게 될 뿐이다.


  그날 아침의 기분이 딱 그랬다. 모처럼 푹 잘 자고 일어나 가뿐한 심신으로 눈을 뜬 상쾌한 아침이었다. 휴대전화 속 부재중 전화와 문자들만이 긴급 재난 알림 마냥 실체를 알 수 없는 심상치 않은 어떤 일의 흔적만을 전해 주고 있었다. 이게 대체 뭔 일인가. 출근길에 아버님께 전화를 드렸지만 받지 않으셨다. 어머님께 ‘폰을 끈 채 자고 일어났다’ 말씀드렸더니 ‘엄마한테 죄송하다고 전해줘라’라는 말씀을 하셨다. 친정엄마의 전화나 문자는 없었는데, 조금 전 출근 길 친정에 아이를 맡길 때도 엄마는 아무 말씀 없으셨는데, 대관절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 어리둥절했다.




  이중창을 굳게 닫고 두툼한 암막 커튼 안에서 내가 안전하고 고요히 잠든 그 밤, 태풍은 친정집을 때려 부쉈다. 오라고 해도 안 와, 간다고 해도 안된다는 버르장머리 없는 며느리가 전화를 받지 않는다 생각한 시아버지는 급기야 친정에 전화를 하신 것이었다. 밤새 다 큰 애들 싸움은 어른 싸움으로 커져 있었다. 늘 입버릇처럼 내게 ‘시어른들께 잘해드리거라’ 말씀하시던 친정엄마였다. 아닌 밤중에 홍두깨 같은 일이었다. 도대체 내가 무얼 잘못했기에 친정엄마까지 자식 잘 못 키웠다는 불평을 들어야 한단 말인가. A/S라도 해달라는 걸까, 반품이라도 하겠다는 걸까. 만약 대기업 임원인 동서네 부모님이었어도 과연 그렇게 무례하게 하셨을까 생각하니 얼굴이 화끈거렸다.


  한여름 가족 캠핑 중 작은 서운함들이 쌓여서 시작된 우리 부부의 사소한 싸움은 시댁과 얽히면서 골이 깊어졌고, 양가가 얽히면서 수습이 불가한 수준이 되었다. 이제 이 싸움은 더 이상 부부 둘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아빠, 엄마, 할머니, 할아버지까지 수일째 집안에 감도는 이상기류에 한참 어린아이들도 잔뜩 풀이 죽어 이리저리 눈치를 살폈다. 나의 서운함, 부모님이 당하신 수치, 아이들의 불안한 정서를 생각하니 이 결혼을 유지하는 데에는 아무런 유익이 없었다. 대법원 사이트에서 이혼 서류를 다운로드하여 작성했다. 양쪽 모두 수긍할만한 대략적인 이혼 합의안을 정리해서 남편에게 전달했다. 시어머니에게도 답장을 했다. ‘못난 며느리 들여서 마음고생시켜드려 죄송합니다. 저희 문제이니 이제 저희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더 이상의 마찰은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주말에 돌아온 남편에게 정리한 내 마음에 대해 차분하게 전했다. 상황이 극단으로 치닫고 마음을 거두기로 결심하면, 상대에 대한 화는 의외로 금방 진정된다. 주말에 퀭한 모습으로 찾아온 남편에 대해서도, 도통 이해 불가 시부모님에 대해서도 화가 나거나 서운한 마음을 갖기보다는 ‘이 잘못된 관계로 저 사람들은 또 나름대로 얼마나 힘들까, 얼른 이 고리를 끊어서 모두를 자유롭게 해 주자’라는 생각이 간절해졌다. 원망도 없었다. 그들의 눈에 내가 나쁜 아내와 괘씸한 며느리로밖에 보이지 않는다면, 나는 그 정도일 뿐이었다. 아이들에게 싸우는 아빠 엄마의 모습을 보여주기 싫었다. 아이들과 나는 친정으로 숨어들었다.




  사실 시아버지가 그토록 노발대발하신 것은 남편의 탓이었다. 나와 다투고 잔뜩 화가 난 상태에서 시댁으로 직행한 남편은 시부모님 앞에서 앞뒤는 몽땅 잘라먹고 내가 시댁에 가지 말라고 했다고 고자질을 한 것이었다. 감히 아들이 아버지 집에 가겠다는 것을 막는 못된 며느리라니, 시아버지도 충분히 화날 만한 일이었다. 자신이 홧김에 내뱉은 한마디의 말로 집안이 초토화되자 남편의 마음은 누구보다 어려웠다. 어떻게든 대화로 풀고픈 남편이었지만, 나의 강경한 입장에 어쩔 도리가 없었다. 늦저녁 친정집 앞에 아이들이 좋아하는 간식거리가 담긴 까만 봉지하나를 덩그러니 남기고는 사라졌다.


  남편이 사라지자 이내 불안한 생각이 엄습했다. 집으로 돌아가 보았지만 차도, 사람도 없었다. 궁지에 몰리면 나는 어떻게든 빠져나가 살 궁리를 하는 사람이지만, 남편은 아니었다. 살 궁리는커녕 수렁에 빠져 한없이 자책하며 살 궁리가 아닌 죽을 궁리를 할 무른 사람같이 느껴졌다. 남편의 전화는 꺼져있었다. 가슴이 쿵쾅거렸다. 남편의 안위를 걱정하고 남편을 찾아 여기저기를 찾아 헤매는 내 마음은 참으로 이상했다. 분명 좀 전까지 헤어지자며 매몰차게 내몰았는데, 나는 걱정하고 있었다. 초조해서 가만히 있을 수 없을 정도로.


  대체 이 감정은 뭘까. 연민? 보호본능? 죄책감? 애증? 늦은 밤까지 연락이 닿지 않는 남편의 행방을 알지 못해 불안에 떨던 중, 순간 번뜩 떠올랐다. 그래, 신용카드! 남편의 공인인증서로 신용카드 이용 내역을 조회했다. 아이들에게 준 간식을 사기 전 저녁께 결제한 내역이 있었다. 00 돼지국밥, 8,000원. 평소 남편이 좋아하는 집 근처 국밥집이었다. 00 칼텍스, 50,000원. 비로소 허탈한 웃음이 나고 안심이 되었다. 돼지국밥을 든든히 먹고 주유를 만땅으로 했으니, 절대로 섣부른 행동을 할 것 같지는 않았다. 어쩌면, 그것은 사랑일지도 모를 일이었다. 아이들을 데리고 집으로 돌아와 남편을 기다렸다.


  다음 날 아침에도 남편의 전화는 꺼져있었다. 또다시 신용카드 이용내역을 조회했다. 전라남도 무안, 00 곰탕, 12,000원. 친할머니 산소에 갔구나. 상호를 검색해보니 혼자 大자를 시켜 먹은 모양이었다. 세상에 어제저녁 메뉴가 돼지국밥인데 오늘 아침은 곰탕이라니, 참 남편 다운 메뉴 선정에 웃음이 났다. 남편에게 문자를 보냈다. ‘당장 집으로 오지 않으면 용서는 없다.’ 이내 남편에게서는 전화가 걸려왔다. 남편이 나보다 고수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순간이었다. 폰 만 꺼 뒀지, 애플 워치로 문자는 다 보고 있었나 보다.




  남편은 자신의 경솔한 언행으로 부부싸움을 크게 만든 것에 대하여 양가 부모님께 사죄했다. ‘허허’ 거리는 머털 웃음이 절반이었지만, 시아버지도 친정 부모님께 전화해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 용기 있는 행동을 보여주셨다. 나 또한 시부모님의 마음을 미처 헤아리지 못한 부분에 대하여 반성하고 사과드렸다. 남편과 나는 못난 부모로 인해 그간 마음고생을 했던 가장 무고한 피해자인 아이들에게도 용서를 구했다.

     

  한여름에 우리 집을 초토화시킨 이 태풍이 지나간 뒤 많은 것이 달라졌다. 우선 나는 갈등 중에 나온 시댁 단톡방에 복귀하지 않았다. 더 이상의 강제소환도 없었다. 그저 의무적으로 시부모님께 하던 연락을 끊었다. 우리 부부와 아이들의 일거수일투족을 담고 있는 일상 사진을 주기적으로 보내던 것 또한 멈추었다. ‘힘들지’라는 질문에 더 이상 ‘괜찮아요’라고 대답하지도 않는다. 이제 나는 내 마음과 상황이 허락하는 순간, 아주 드문드문 진심을 담아 시부모님께 전화를 드린다. 주말에 놀러 다니는 일상에 대해서도 시시콜콜 공유하지 않는다. 내 딴에는 집에서 쉬고만 싶은 주말에도 아이들 생각에 피곤한 몸을 움직여 어렵사리 하는 나들이인데, ‘놀러 다닐 시간은 있고 시댁 올 시간은 없느냐’라는 오해를 사고 싶지 않으니까. 아이들의 사진도 수십 장씩 모조리 공유하지 않으며, 특별한 의미가 있는 사진만 엄선하여 몇 장 보내드린다. 아이가 상장을 받아왔다던가, 하는. 행여 어른들 걱정할세라 쉬쉬할만한 아이들의 입원 소식도 여과 없이 전한다. ‘고생이 많다’라는 인사치레에도 ‘예, 조금 힘드네요’라고 솔직하게 말한다. 우리의 일정을 고려해 시댁에 갈 만한 적절한 날을 먼저 찾아보고 시댁에 가자고 먼저 제안한다.


이제 힘들면 힘들다 슬쩍 투정하는 지렁이로 진화한 며느리 6년차.


  시대가 어떤 시대인가. 이제는 지렁이도  진화할 때가 아닐까. 지렁이에게 갑자기 발이 달린다거나 날개가 돋친다거나 하는 종의 변화까지는 아닐지라도, 적어도 들이닥칠 위험을 예측하고 몸을  숨기거나 우회하는 정도? 예상치 못한 위험을 맞이하더라도 나를 보호해  든든한 보호 장구를 찬다던가, 무자비하게 짓밟혀도 버텨낼 잔근육을 키운다던가. 하다못해 예고 없이 닥칠 불의의 사고대비해 든든한 상해보험이라도 들던가 말이다. , 그리고 남편과 나에게 생긴 가장  변화는 이것이다. 마치 전장에서 맹렬히 전사하던 이순신 장군의 절절한 외침과도 같은  말을  순간 되새기고  되새긴다. 혈투 끝에 여기저기 피투성이가  순간에도 이성의 끈을 부여잡고 정신을 차린다. 부부의 싸움을 어른들에게 알리지 말자.



버르장머리 없는 며느리는 얼마 뒤 시아버지에게 며느리 최고라는 찬사를 듣게 됩니다.

다음 편에 이어서 연재 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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