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맞는 책들
종이 책, 종이 신문, 헌 옷, 인형들에게 그러지 마세요
그제까지 며칠 내내 비가 내렸다. 그간 대기가 텁텁하였던 터라 내린 비가 그저 반가웠다. 물받이는 제대로 작동하는지, 어디 따로 문제 있는 곳은 없는지 살펴보는데, 연짱이에게서 전화가.
"이미 늦은 시간인데, 어린이, 왜 무슨 일 있어? 엄마 지금 나갈까?"
"엄마, 대문 밖으로 나와 봐."
"??"
연짱이는 진중한 편이어서, 아이가 무슨 말을 하면 언제나 이유가 있다. 꼬꼬마 시절부터 그러하여서, 두 말 하지 않고 나가 보았는데.
"엄마, 이 책들 봐. 누가 비 내리는 날 책을 산처럼 버렸어. 위에 놓여있던 책들은 이미 다 젖었어."
"이게 뭐야. 재활용 쓰레기라고 하면 책이 너무 불쌍하다. 좋은 날 놔두고 뭐가 얼마나 급하다고 비도 많이 내리는 날 책을 버렸을까."
책은 중학교 영어 문법서부터 교양서까지 다양하였고, 권수도 많았다. 내 집 앞에 놓여 있었고, 옆 집, 앞 집 사는 사람들을 떠올려 보면, 어느 집에서 나왔는지 그 출처를 짐작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해당 도서들을 고르고 구입하여 손 안에 받아보았을 때는 매끄러운 새 책의 감촉에 아주 잠깐이라도 마음 설레이는 순간 있었을텐데. 도대체 이 책들이 무엇을 그리 잘못하였다고 궂은 비 굵게 내리는 날 이토록 아무렇게나 버렸을까.
"어린이, 일단 다 들고 집으로 들어가자. 우리가 말하는 동안에도 책들은 착실하게 젖고 있으니까."
연짱이와 둘이서 우산을 포기하고 굵은 비 그대로 맞으며, 두 번 씩 최대한 안고 들어와 거실에 펼쳐놓은 책들은 참담하였다. 소금물에 절여진 배추 포기처럼 푹 젖어 풀 죽은 책들을 보는 것이 마음 아팠다.
"엄마, 영어 어휘집은 완전 새 책이야. 게다가 초급, 중급, 고급 세트야. 그런 아이 없기를 바라지만, 누가 다 풀고 버린 문제집하고 참고서 주워서 공부했다고, 대학 합격 수기에도 나오지 않아? 그런 아이들도 있는데. 이건 나한테도 쓸모 있겠어."
"와, 어린이, 보여? 어린왕자 하드 커버야. 무슨, 자유론도 있다. 존 스튜어트 밀. 철학책도 몇 권 있네. 재미는 없어도 교양 인문서여서 도서관에서 빌려서 읽는 책들인데, 다 버렸어."
"마음이 너무 아파, 엄마. 누군가의 집에서는 애지중지 대접받았을 책들일 수도 있는데. 이렇게나 책 전체가 다 젖어 있으면 말리는 것도 어렵고, 다 말려도 쭈글쭈글해져서 페이지 넘기기도 어려워지는데. 그냥 갖고 있다가 어디 기부라도 하지. 그것도 귀찮으면, 폐지 수거하시는 분들 많은데, 맑은 날 내놓기라고 하든가."
나는 물활론자는 아니지만, 각 사물에게는 그에 맞는 대우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편인데, 종이로 만든 책을 이처럼 비 맞게 두는 건 책에게는 사형선고나 다름없지 않을까. 그러니까, 너의 쓸모는 이제 끝났고, 너는 불쏘시개도 못 된다는 선고. 어찌 이리 폭력적일 수 있을까. 나의 브런치 이웃분 중에는 플로깅을 하시는 귀한 분도 계신데, 그 분이 보시면 참 통탄하시지 않을까, 싶다.
아이와 함께 책마다 최대한 물을 짜내고, 젖은 책갈피 사이 사이에 다시 휴지를 켜켜이 끼워두고, 집에서 그나마 무거운 사과, 오렌지 담긴 박스로 젖은 책들을 눌러두었다가, 하루 쯤 지나 냉동실에 넣어두었다. 주글거리는 페이지를 최대한 줄여보려는 궁여지책이랄까.
"엄마, 책에서 마늘 냄새 날 것 같아. 이 책 읽는 누군가는 왜 책에서 마늘향이 나지, 그러겠어."
"어쩌겠어. 책 때문에 이미 냉동실에 보관 중인 먹을거리를 버릴 수는 없잖아. 필요한 누군가에게 제대로 가서 읽히기만 하면 좋겠다."
비 내리는 날, 종이 책은, 종이 신문은, 종이 박스는, 그리고 옷은 버리지 마세요. 종이 책에게, 종이 신문에게, 종이 박스에게, 옷에게, 최소한 비 내리는 날에는 그러지 말아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