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닛짜(anicca)
당시만 해도 나는 정신과 약을 먹는다는 것에 다소 거부감이 있었다. 누군가가 알면 안 될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약을 복용한지 한 달이 되어갈 때 담마 코리아 위빠사나 명상 센터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내가 대기자로 신청해 두었던 명상코스에 한 자리가 났는데 참여 의사가 있는지 묻는 전화였다. 당장 이틀 뒤 시작하는 일정이었지만 나는 망설이지 않고 가겠다고 대답했다. 그만큼 그때의 나는 절박했다.
분명히 코스에 참여하라는 연락을 받았을 때만 해도 괜찮았는데, 그로부터 이틀간 나는 또다시 끔찍한 우울감에 휩싸여 잠에 들 수가 없었다. 세상이 무너지는 와중에 나 홀로 남은 듯한 숨이 막히는 고립감이었다.
"내가 애써 유지해오던 평정심이 와르르 무너졌다. 대체 이 기분은 뭘까? 사람들을 만나고 오니 모든 게 원상태로 돌아간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명상에 가서 내가 여태 꾹꾹 눌러온 감정들이 죄다 뒤엎어질까봐, 내가 그걸 감당하지 못할까봐 너무 무섭다. 더 이상 어떤 글을 읽어도 위안이 되지 않는다. 모두 허상으로 느껴진다."
- 명상을 떠나기 전 작성한 일기 中(2019년 4월 17일)
그렇게 이틀 밤을 꼬박 새고 센터가 위치한 전라북도 진안으로 내려가는 차 안에서 나는 하염없이 눈물만 흘렸다. 도착해서 등록 절차를 마치고 휴대폰을 제출하자 더 증폭된 고립감에 먼 산을 바라보며 엉엉 울었던 기억이 난다. 내가 할 수 있는 온갖 노력을 다 했지만 나는 여전히 실패자였고, 패배자였다. 끝이 보이지 않는 터널 한가운데에 갇힌 기분이었다.
센터에서의 하루는 분주하면서도 단순하게 흘러갔다. 새벽 4시에 기상해 밤 9시 반 소등 전까지 두 번의 식사와 한 번의 차 마시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오직 명상으로만 채워진 단순한 일정은 요동치던 내 마음을 금세 가라앉혀 주었다. 매일 저녁 마지막 단체명상 시간이 끝나면 센터의 설립자이자 명상 지도자인 고엔카의 법문을 한 시간씩 듣게 되는데, 실로 이 법문 내용은 흡인력이 대단했다. 하루 종일 이 시간만 기다릴 정도였다. 그전까지는 명상을 막연히 초월적이거나 영성적인 어떤 것이라고만 생각했는데 고엔카의 과학적 접근과 논리적인 설명은 나를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2일차였던가, 인과를 설명하기 위해 망고나무와 님나무의 비유가 언급되었다. 한 농부가 님나무 씨앗을 비옥한 땅에 심고 비료와 물을 주며 정성껏 키워 드디어 열매를 맺게 되었다. 하지만 쓰디쓴 님 열매를 맛본 농부는 실의에 젖어 하늘에 대고 외친다. “신이시여, 왜 제게 달콤한 망고를 내려주지 않으신 겁니까?” 답은 간단하다. 농부가 망고나무 씨앗이 아닌 님나무 씨앗을 심었기 때문이다.
그 순간 나는 이 자명한 인과법칙을 내 인생에 적용시키지 못하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그전까지 난 그저 상황의 피해자일 뿐이었다. 사건 뒤에 정교하게 얽혀있는 인과의 실들 사이에서 나의 역할은 전혀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나는 그저 우연히 일어난 사건의 무고한 참여자일 뿐, 그 속에서 내가 주체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나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이런 생각들이 결과적으로는 나를 더 괴롭힌 셈이다. 내가 지은 원인을 인정하고 그에 따른 결과를 받아들이는 것, 그것부터가 변화의 시작이었다. 나는 내 인생의 피해자로만 남아있을 수는 없었다. 나는 내 인생의 책임자였다.
명상 3일차, 이른 오후 어느 즈음이었던 것 같다. 그 나른한 순간에 불현듯 이런 생각이 머릿속에 빛을 밝히며 떠올랐다. “대학원을 가자. 프랑스에서 그토록 하고 싶었던 공부를 하는 거야.” 이런 결심을 하고나자 마치 이 모든 수순이 원래 계획되어 있던 것처럼 너무나 자연스럽게 느껴졌다. 객관적으로 대학원에 갈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음에도 마치 그 일이 당연하게 이루어질 것처럼 느껴졌다.
물론 수련 며칠 만에 내 모든 문제들이 단숨에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여전히 마음속 번민들은 부유물처럼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자꾸만 떠오르는 과거의 상처들은 멈출 줄 모르고 나를 할퀴었다. 위빠사나 명상의 가장 중요한 핵심은 무상(無常)과 무아(無我)의 이해를 바탕으로 떠오르는 모든 감각들을 평온하게 알아차리는 것이다. 반응하지 말고 그저 알아차리고 지켜보아야 한다. 반응하지 않는 법을 살면서 단 한 번도 연습해 본 적 없는 나로서는 이 과정이 수행이 아닌 고행으로 느껴졌다.
실로 하루에 열다섯 시간 동안 명상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다. 같은 자세로 몇 시간이고 가만히 앉아있는 건 상상초월의 고통을 야기한다. 허리는 금방이라도 터져나갈 듯하고 다리 한쪽은 피가 통하지 않아 감각이 없어진지 오래다. 움직이지도 않는데 어깨는 또 왜 그리 아픈 건지, 그야말로 온몸이 소리 없는 아우성의 연속이었다. 명상 중에는 아딧타나(Adhitthana, 강한 결심)의 마음을 하고 털 끝 하나 움직이지 않겠다는 의지로 앉아 수행해야 한다. 이는 내게는 거의 불가능해 보였다. 그러던 어느 날 명상을 하던 도중 여느 때와 같이 몸 구석구석에 퍼져 올라오는 고통에 반사적으로 자세를 바꿔 앉으려던 찰나, 무조건적인 반응을 멈추고 그 고통을 그저 지켜보기로 했다. 그러자 신기한 일이 일어났다. 분명 몸에서는 매우 고통스러운 감각들이 지속적으로 떠오르는데, 그 감각을 가만히 지켜볼수록 고통과 내가 분리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신체적 고통을 느끼고 있는 나 자신을 위에서 제3자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 같은, 마치 조용한 목격자가 되어 현상을 관망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참으로 신묘한 경험이었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우등 수련생은 아니었다. 코스 참여자들의 명상 집중도를 객관적인 수치로 환산하여 줄 세워 본다면 나는 최하위권에 맴돌고 있을 것이 분명하다. 그럼에도 위빠사나 수련 경험이 나에게 미친 영향은 어마어마했다. 본능적으로 지금의 이 경험이 훗날 내게 시련이 닥칠 때마다 극복의 레퍼런스로서 활용될 것임을 알 수 있었다. 알아차림은 생각보다 훨씬 더 강력한 수단이었다. 그리고 나는 위빠사나 수련을 통하여 피상적인 수준에서가 아니라 진정으로 내 몸과 마음에 떠오르는 모든 감각들을 부정하거나 거부하지 않는 법,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며 일체를 수용하는 법을 배울 수 있었다.
명상을 하며 마음속이 복잡해질 때마다 끊임없이 되뇌던 문구가 있다.
“내 감각은 내가 아니다.
내 감정도 내가 아니다.
고정불변한 ‘나’라는 존재는 없다.
모든 것은 아닛짜(anicca, 무상)다.
아닛짜, 아닛짜.”
11박 12일간의 수련을 마치고 홀가분한 마음으로 센터를 나서는 길, 이토록 세상이 가볍게 느껴진 적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