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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경용 11시간전

"오일팔에 어머니가 오신다~"

부모님 추억을 하는 나이 고희가 지난다~

~어머니를 생각하면 신우대 회초리든 모습에 무서워서 방구석으로 도망가던 내가 있다

겁나게 공포스런표정으로

그런데 어머니는 웃고 계신다

정말 화가 났을까? 할 정도로 ~

"이 눔의 새끼야~!"

반복적인 그 말에 더깊이 숨으려고 애를 써보지만

아무리 초가집 흙집이라 해도 도망할 곳은 없는데

자꾸만  세 살 작은 몸을 움츠리고 구석으로 들어간다

이런 이야기하면 어떻게 세 살 인디 기억하냐 한다

다 기억난다  그래서 남들도 다 기억할 거라고 믿는다

더기억을 되살리는 건 네 살 뒷집 봉매떡 네 딸이 나를 때리고 못살게 굴어서 엄마가 심어놓은

쭉나무에 올라감으로 피할 수가 있었다 세 살에 나무에 올라갔다~

나도 지금의아한 사실이다 믿거나 말거나

사촌형이 6살 먹어서 우리 집에 놀러 와서 말게(말려) 주었다 고마웠다

봉매떡(댁)네 그 딸 험상궂게 생게 묵었다

지금도 남자덜 괴롭히며 살아가려나~

백말띠 억세었던 기억이 난다


오일팔에 관해서는 말하기는 그렇다

왜냐하면 특별히 체험한 것도 당시 내가 어떤 특별한 임무도 담당한 것이 없기 때문이기도 할 것 같다

또한 그 시절에는 지역적 한계성으로ㅡ전라도 광주의 일로 치부되는 분위속에서

사태에 대한 어떠한 사항에 대해서

속내의 이야기를 나눌 수도 없었던 것 같다

단편적인 기억들은 좀 있긴 하다

여기서는 어머니께 집중하고자 한다


그때 나는 가까운 군부대에서 위병조장으로

무하고 있었다

"정문 근무자는 즉시 도로전면에 바리케이드를

설치하라!!!~"

연대상 황실에서 지령이 하달되고

곧바로 나는 조원들과 호남선 1번 국도를 바리케이드로 봉쇄해 버렸다

연병장에서는 한창 예비군 동원훈련이 진행되던 중이었다

가까운 목포에 사는 사람들은

저녁 훈련이 끝나면 동원 막사를

이탈해서 집에도 다녀오기도 하고

앞에 즐비하게 늘어선 가게에서는 밤늦게까지

술퍼 먹는 예비군들로 문전성시를

이루던 때가 그때였던 것으로 알고 있다

부대기간요원들은 그 사람들을 얼르고 달래서

동원막사로 들여보내느라 애를 먹기도 했던

시기였었다

심상치 않았다 조짐이~

바리케이드 전에 오가는 버스는 유리창이 없었고

뚱땅거림으로 버스몸체는 폐차장에 던져진 수준들이었다

"전**물러가라 울라울라~"

그때는 대학생들로 알고 있었다

지금 보니까 일반인들도 많았는데

부대 내에 있고 보니 그렇게만 보였고

알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진실이 차단된 지역적 한계에

팩트가 실종되고

유언비어가 난무하던 시절이었다

40여 리 우리 집에서도

농사일밖에 모르시던 부모님도

유언비어의 뉴스에 노출되고 말았다

"지비 아들 있는 부대원들이 몰살당해서 중등포저수지가 피바다가 되었다고 허요~~"

그 소식을 들어버린

어머니 한시가급하다

큰아들이 어찌 됐을까?

40리 길을 걷기 시작하셨다

이거 별거 아니다

이모님네 둘째 누님 목포 상리 조합에 댕기는 총각한테 중매할 때는 육십 리 걸으셨다

그리고는 그 결혼 성사 시키셨다

울 엄마 장허시다~

나는 도로 위에서 경계근무에 투입되었다

오가는 차량에서 한밤중 고양이눈처럼 튀어나온

무기들 볼 때면 오금이 저려왔지만~

나 도무 장하고 근무하던 터라서

정당방위적 차원의 조치는  할 수가 있겠다는

마음은 있었다

그러면서도 "우리 지역에서 이런 일이"  라는

생각이 컸었다~

바리케이드가 쳐 저 있으니 웬만한 차들은 돌아가기도 한다

아직은 뭔가 찜찜한 기분의 폭풍전야의 고요함이

감도는 긴장이 적막처럼 흐르는

그러한 시간들이 오후로 가는데~

쩌기 원지산 잔등으로 누가 걸어오신다~

가까이 오시는 형체는 분명 울 엄마다~

고무신을 손에 들었다~

한 짝이 찢어져서 찰싹거려서

차라리 들고 맨발이 편했다고 하신다

"뭔 일로 여까지 오셨어?"

"너희 부대가 없어져브렀다고 안 하냐~"

이럴 때는 부대 가까운 곳에 집이 있으면 불편하다

한달음에 오실만한 거리에 내가 있으니 이렇게 오시고 말았다

여산 훈련받을 때는

아프셔서 소대원 중 맨 마지막으로 그니까 10주 차부터 면회가 시작되는데

16주에 오셔서 통닭에다가 잘 먹여주고 가셨다

소대원 중 맨 마지막은 간신히 아니었다

딱한 명 아예 면회안온 친구가 있었다

종태는 가족이 아무도 없을까?

했을 정도로 한 번도 면회 와서 정문옆면회소에

가서 특식을 먹어보지 못했었다

그리고 휴일에는 소대원들  

떨어진 통일화만 꿰매 주고는 수고값으로 건빵만 봉씩 받아 넣고는 연병장구석으로 가곤 했었다

그러니까 나는 그보다는 훨씬 나았는데도

부모님이 너무하신다는 야속함에ㅡ

나는 하도 면회 안 오시기에 광주건하한테

부탁해서 연회오시라는 부탁의 편지를 대신 전해주도록 해서 오셨다

나중에 아프셔서 빨리 오시지도 못하신 어머니 생각하면 내가 정말 미웠다

엄마의 실정을 헤아리지도 못한불효의 용서를 구하지도 못했는데 하늘로 가셨다

얼른 처가댁으로 보내드리고 하룻밤을 묵으시고

다음날 또 걸어가셨다~

결국은 연대장님 지시로 바리케이드는 해제되고

시민군들은 목포로 진입하고 오일팔은 무르익어

역사의 한 페이지를 쓰고 말았다

"달리기 1등이라니요?"

국민학교동회가 한창 무르익을 때~

5학년 달리기 시간이 되었다

머리에 질끈 청군 머리띠를 하고

출발선에 섰다

뭐 4~6등은 따놓은 당상이다

그렇게 마음먹고 있음이 난 편했다

소질이 없다 달리기는~

출발총이 땅~

"다다닥 달려 나가는 여섯 명의 청계북초등학교

5학년 1반 건아들이 달리기 시작합니다

많은 응원 바랍니다~"

이렇게 내가 중계방송을 했었으면~한다

오 십미 터지 나면 코너구간이다

앞에 1등이 넘어져브렀다

2.3.4.5등이 다 넘어진다

도미노처럼~

엉겁결에 1등을 해브렀다

결승테프 앞에서 엉거주춤했더니

진행선생님이 "얼른 테이프 끓어아!~"

하신다

1등부터 3등까지는 시상대 앞에 앉힌다

어정쩡한 행동으로 시상석에 앉았다

공책 3권이 1등 상품~

우와~세상에 해가 내일은 서쪽에서 뜰일이다

울 엄마  좋아한 기색 전혀 없으신다

껄쩍찌건한 표정을 보이신다

정당한 레이스가 아니었음을 나에게 굳이 각인시켜 주시려 떨떠름한 그런 표정 안 지으셔도

난 다 알고 있다

다들 자빠져서 내가 그놈들 등짝을 밟고 1등

했다는 사닐을~어쨌든 1등 꼭 한 번 해봤었다

그리고는 기마전시간 나는 말을

우리 팀은 작전을 세워 먼저 공격을 하지 않고

살살 주위를 맴돌다가 어느 정도 힘을 빼고는

덤벼 들기로 했다

그렇게 나는 말의 임무에 충실한 기마전으로 되고 있었다

그런데 느닷없이 사각지대에서 나타난 상대의 말이 나의 콧등을 치면서 잡아땡가는 바람에

그대로 낙마하고는

코에서는 뜨끈한 것이  흘러내렸다

피였다~

코피 나면 진거는 확실하다

하얀 행커치가 코를 감싼다

놀래서 앞을 보니~

울 엄마 전광석화 같은 동작으로

학부형석에서 참관하시다가 나의 일거수일투족 급박한 말전쟁을 지켜보시던 중

큰아들 코피 낙마로 달려오셨다

코피 위에 눈물이 번져나갔다

나와 엄마가 코피에 눈물을 섞어놓았다

얼마가 지난 뒤

학교행사로 학예회가 있다고

학부형초대를 해서

나도 엄 마를 오시라고 했다

선생님이 내가 책 읽는 시간이 있어서 특별히

엄마를 오시라고 한 것이다

"나~못 간다~"

나는 힘 빠진 모습으로

학교로 갔는데

갑자기 비가 오는 바람에 관계자가 불참하는 관계로

학예회는 연기가 되어서 비를 맞으며

집으로 조기귀가했다

"학교 갔다 왔어~" 하고는

정제문을 들어서는데 맛있는 냄새가 난다

"이것 뭐요?"

"학교 갖고 가려고 계란지짐 헌다~"

"학예회 빵꼬나븟어!~"

내 눈이 촉촉해진다~

"니 생일만 떡 먹겠다~"

68년 전국을휩쓰른 가뭄~

우리 동네 논들 대부분 모를 심지 못했다

우리는 술한논에서 겨우 나락 닷되 정도 도구통에 찧는 엄마의 수고로 쌀 두 되를

수확했다 1년의 수확이 쌀 두 되~

내 생일 음력 9월 9일 중구날이다

 난~땡이라고도 한다

그것으로 생일떡을 해주셨다

그해 수확물의 전부를 떡으로

먹어버린 꼴이 된 나의 마음은 어땠을까?

떡 먹으니 마냥 즐겁고 기쁘기만 했을까?

시루펜을 뜯어먹는 동생들이 세명이나 되었다

막둥이동생은 아직 우리 집으로

오기 전이었다

마을사람 모두는

승달산 사자봉 높은 곳으로

기우제를 지내러 갔었다

외할아버지 깡쇠 치는 솜씨는 동네의 굿판을

리드했고 보름날 아침이면 상모를

돌리면서 윗방매까지도

"뱀 짓자~

구렁이 짓자~"

정제문에는 어김없이

立春大吉이라는 글자기 적힌 종이를 붙여주셨다

동생들의 생일떡까지 독차지해 버린

 내가

 올해 칠순을 만났다~

이제 어머니의 기억은 여기서 멈추고~

아버지를 추억함으로 서 글을 마치려 한다

"아버지 간방~"

아버지는 네 살쯤 됐을 때 군인에 가셨다

군인 가셔서 내 생년은 1년 늦게 올려젔다

아마도 출생을 수합하여 올려주시던 마을

이창님이 연도를 잘못 이야기했거나

호병계에서 착오가 생기는 일은

그 시절 다반사였었다~

아버지는 원주에서 근무하신 걸로 알고 있다

그때의 사진들이 집을 새로 지으면서

분실됐는지  러닝셔츠바람에 군모를 쓰시고

네 명이서 찍은 사진이 도통

찾을 길이 없어 아쉽다

엄마가 아버지 휴가 오신다고 알려주고 보면은

아랫마을 밭어구에 나타나신 씩씩한 아버지~~

손에는 목수가방이 들려젔다

그 안에는 미군건빵만 한가득~~

열두 봉까지는 세어보았다

먹어보니 우유맛이 났었다~

얼마나 맛있었는지 모른다

건빵 한 봉지 손에 들려주시고

가방을 어깨에 메시고 휴가 오셨다~

이제는 두 분 모두 세상에 안 계시지만

나를 향한 사랑은 늘~

비춰주고 계심을 본다

세상사는 날까지 믿음생활 잘하다가

훗날 만날 것을 고대해 본다~♡






5. 아부지간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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