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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플앱 Aug 31. 2021

영원히 헤어나고 싶지 않은 미궁, 뮤지컬 '아가사'

2021년 8월의 마지막 토요일, 이제 낮에도 덥지 않던 날의관극 기록

뮤지컬 '아가사' 스틸컷 (사진제공=나인스토리)

작품의 완성도는 창작자의 몰입도에 좌우되곤 한다. 배우가 캐릭터에 완전히 몰입한 순간 연기의 진정성은 극에 달하고, 작가가 자신의 세계관에 푹 빠져 완성한 소설이야말로 독자를 매료시킬 수 있는 힘을 갖는다. 가수 윤종신은 이별 노래 가사를 쓰기 위해 일부러 아내와 자녀를 떠나 2주 간 혼자 사는 후배 집에서 작업한 적이 있다고 했다. 작품의 슬픔을 극대화하려 스스로 어둡고 고독한 인간이 되려 한 셈이다. 


뮤지컬 <아가사> 속 아가사 크리스티도 다르지 않다. 영국 추리소설의 여왕이라고 불리는 그는 살인사건을 창조하고, 분석하고, 또 해결하며 매 순간 '살인자'와 '피살자'에 몰입한다. 그리고 이 과정에는 줄곧 '보통 사람'과 '살인 설계자' 사이를 오가는 그의 고뇌가 함께한다. 1926년 12월 3일 돌연 실종된 아가사가 14일 한 호텔에서 발견되기까지, 극은 여전히 빈칸으로 남은 열하루를 '추리'의 방식으로 좇는다.


뮤지컬 '아가사' 스틸컷 (사진제공=나인스토리)

<아가사>는 실종 당사자인 아가사와 사건을 추적하는 그의 조수 레이몬드의 두 갈래로 서사를 뻗어나간다. 둘은 추리소설 작가와 독자, 스타와 팬, 멘토와 멘티의 구도를 형성하고, 궁극적으로는 각자 물음표(?)와 느낌표(!)를 대변한다. '아가사는 어디에 있는가(어떻게 되었는가)'로 시작한 극의 무게는 점점 '아가사는 왜 사라졌는가'로 옮겨간다. 덕분에 범인을 추적하던 관객이 눈물을 쏟는 지점은 사건의 '진실'이 아닌 두 사람의 '진심'이 된다.


극 중 아가사의 실종에 가장 중요한 키워드는 '티타임'이다. 아가사가 실종 직전 자신의 저택에서 지인들과 가진 티타임은 사건 해결의 거의 유일한 실마리다. 레이몬드가 아가사의 서재에서 발견한 원고 제목 역시 '미궁 속의 티타임'이다. 남편 아치볼드와 기자 폴, 편집장 뉴먼, 하녀 베스 등 티타임을 함께해 온 인물들이 원고 속에 그대로 등장한 만큼, 이들은 경찰의 용의 선상에 오른다. 아가사 곁을 지켜 온 레이몬드는 꼬마 탐정으로서 이들을 압박한다.


뮤지컬 '아가사' 스틸컷 (사진제공=나인스토리)

다른 한쪽에서는 실종 사건으로 난리가 났지만, 정작 신분을 숨긴 채 호텔에 머무는 아가사의 에피소드는 온도차가 있다. 레이몬드의 서사가 트릭을 풀기 위한 탐정물이라면, 아가사의 그것은 '여자'와 '추리소설 작가' 사이를 오가는 인물 내면에 가까워지는 심층 인터뷰라고 할 수 있다. '로이'라는 수수께끼의 남자를 통해 진행되는.


<아가사>가 가장 무거운 화두를 던지는 지점이 바로 로이와 아가사의 갈등 속에 있다. 티타임 멤버들의 이기심은 아가사에게 슬픔과 우울감을 유발하고, 호텔에서 만난 로이는 이런 아가사를 뒤흔든다. '미궁 속의 티타임' 원고에 투영된 악인들에 맞서고 그들을 처단하라고, 시종일관 아가사의 분노와 살의를 자극한다. 상상과 실재, 소설과 현실이 혼재된 세계에 살아가는 아가사의 내적 갈등이 극에 달하는 지점이다.


뮤지컬 '아가사' 스틸컷 (사진제공=나인스토리)

성경에 흔히 등장하는 사탄처럼 아가사에게 폭력과 살인을 속삭이는 로이는 극의 주제의식 그 자체다. 늘 도덕적이고 이성적이어야 하는 아가사의 분노와 증오심을 자극하는데, 이게 가끔은 해방구가 된다. 극 중 최악의 빌런이라고 할 수 있는 로이가 아이러니하게도 그녀의 구원자로까지 느껴지는 이유다. 무서운 말들을 입에 달고 사는 로이에게 흰 코트를 입힌 것도, 어쩌면 빌런이 아닌 히어로로서 그를 조명하기 위해서였는지 모른다.


"추리소설을 쓰는 건 미궁 속으로 들어가는 것과 같다." 극 중 아가사가 레이몬드에게 하는 대사이자, 뮤지컬 <아가사>가 관객에게 하는 말이기도 하다. 극을 감상하고 해석하는 건 추리소설을 쓰는 일과 다르지 않고, 관객 각자가 매번 다른 자신만의 소설을 쓸 수 있다. 이 경우는 그저 아가사의 이야기와 노래, 표정과 몸짓을 따라가기만 해도 된다. 공연이 끝난 후에도 그녀의 내면 어딘가를 헤매고 있다면 그걸로 충분하다. <아가사>의 미궁은 사건이기에 앞서 사람이니까. 그것도 더할 나위 없이 사랑스러운.



8월의 마지막 토요일, 이제 낮에도 덥지 않던 날의 관극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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