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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플앱 Feb 23. 2021

조선판 ‘82년생 김지영', 연극 '정씨여자'

[레드컬튼 개관작] 연극 '정씨여자' 리뷰


2018년 베스트셀러에 오른 소설 ‘82년생 김지영’은 뜨거운 감자였다. 이후 2019년 동명 영화 개봉 즈음에도 마찬가지였다. 여성으로서 사회적 차별에 놓인 주인공 ‘김지영’의 서사가 과연 현실적인가 하는 질문이 쏟아졌다. 한 남자의 아내이자 아이를 키우는 엄마로서 김지영이 받는 차별을 너무 과장해 그렸다는 비판도 있었다. 하지만 이런 식의 비판은 오히려 하나의 사실을 분명하게 했다. 어느 정도인가를 떠나, 사회 전반적으로 여성 일반이 남성 일반에 비해 부당한 대우를 받고 있다는 사실 말이다.




현모양처 서사를 비틀다


연극 ‘정씨여자’는 말하자면 조선 시대의 ‘김지영’ 같은 여자 얘기다. 1420년을 배경으로 하는 이 작품의 주인공은 ‘정연이’란 이름조차 지워진 ‘정씨여자’이고, 결혼한 뒤에는 ‘최씨 부인’이 된다. 연극의 큰 줄기는 무능력한 주제에 체면은 차리고 싶은 김삼과 주오가 안주거리 삼아 꺼내든 정씨여자의 서사다. 여자 ‘정연이’의 삶은 양반 남성을 화자로 구술되고, 그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실제 정연이는 무대 위에서 가부장제적으로 왜곡되는 자신의 이야기를 관객 앞에서 끊임없이 뜯어 고친다. 


김삼과 주오가 풀어놓는 정씨여자의 일대기는 기시감이 든다. 현명하고 착한 정씨여자가 몰락한 양반 최재수와 혼인하고, 프로페셔널한 내조를 발휘해 그를 벼슬에 올라 성공하도록 도왔다는 내용이다. 온달 왕자와 평강공주가 연상되는 스토리는 익숙한 해피엔딩으로 관객 앞에 무리 없이 다가온다.




'82년생 김지영'과 '1420년의 정연이' 사이


극 초중반, 유교적 전통에서 자유롭지 못한 정연이가 주체적 여성으로서 홀로서기 위해 투쟁하는 에피소드들은 통쾌하다. 정연이를 아내로 삼으려는 남성들이 그를 보쌈(이라 쓰고 납치라 읽는다)하려 집에 들이닥치지만, 정연이는 흐트러짐 없이 남성들에게 호통을 친다. 그러면서 자신을 원하는 남성 사이에서 ‘좋은 남자’를 찾고자 일종의 면접을 진행한다. 그렇게 선발된(?) 최재수와의 혼인은 조선 시대에선 이례적인 정연이의 혁명으로까지 읽힌다. 

하지만 후반부 급속한 사태 변화와 반전은 안도감에 도취된 관객에게 아릿한 슬픔으로 다가온다. ‘82년생 김지영’이 남편의 육아휴직과 새로 얻게 된 일자리에도 불구하고 끝내 ‘육아맘’을 벗어나지 못한 것처럼, 정씨여자는 평생 지키려 한 ’정연이’란 이름 석 자를 끝내 잃고 만다. ‘좋은 남자’와 별개로 가부장제적 시스템에 얽매이는 정연이의 상황은, 600년이 지난 지금과 비교해도 크게 다르지 않다.




소극장에서 빛나는 풍자와 해학의 연출


풍자와 해학을 중심에 둔 연출은 ‘정씨여자’의 핵심이다. 친구 사이인 극 중 화자 김삼과 주오는 한심하지만, 정연이의 삶을 재단할 권력이 있다. 둘은 정연이에 얽힌 여러 에피소드 속에서 또다른 권력자로 시시각각 변신한다. 혼사에 대산 권리를 지닌 부모, 공권력을 가진 사또까지. 줄곧 정연이를 주체가 아닌 대상으로 여기는 캐릭터들은 답답한 태도를 보이며 역설적으로 정연이의 인생을 드라마틱하게 한다.

무대와 객석이 그야말로 코 앞 거리인 소극장 특유의 공연 분위기는 오붓하다. 속삭이는 듯 귀 가까이에 들리는 대사는 기관총처럼 쏟아지는데도 무리 없이 전달된다. ‘ㅗ’ 자 형태의 무대와 빨간 커튼 뿐인 배경 역시 더할 나위없이 효율적으로 활용된다. 택견 자세를 활용한 대결 장면, 관아에서 숨바꼭질을 벌이는 장면 등 여섯 배우들이 무대 앞과 뒤를 재빠르게 오가는 연기들은 공연을 꽉 채우기에 부족함이 없다.




연극 <정씨여자>

원작: 반무섭
각색 및 연출: 안성헌
출연배우: 최석준, 신광현, 오연재, 박지원, 김성국, 이동환, 강한솔
제작: 극단 작은곰
공연일시: 2020년 10월 14일
공연장소: 대학로 단막극장


*연극 '정씨여자'는 연극, 뮤지컬 실황영상 OTT 서비스 레드컬튼 개관작입니다. 레드컬튼 앱 출시 후 스트리밍으로 시청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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