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당한 비건, 그 첫 번째 이야기
<당당한 비건> : 시즌 1의 메인 키워드이자 주제는 ‘당당한 비건’입니다. 친구이자 소비자, 시민 등 다양한 주체로 살아가는 비건 지향인들이 삶의 주도권을 잡기 위해 가져야 할 ‘당당함'을 고민합니다.
“애들아 여기 어때? 빨리 정하자 그래야 준비하고 나가지.”
‘00이네 숯불 닭갈비’, ‘00네 낙지집', ‘돼지구이 전문 00식당’
간만에 친구들과 만나기 위해 카톡으로 약속 장소를 정하던 중, 한 친구가 식당 주소를 연이어 보냈다. 전부 논비건 식당이었다. 전에 채식한다고 얘기는 했지만 그새 친구들이 까먹었는지,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식당이 단 한 군데도 없었다. 서울에 사는 게 아니니 비건 식당은 꿈도 못 꿀 거라 예상은 했지만, 옵션조차 기대할 수 없는 닭갈비 식당과 낙지집과 돼지구이 집이라… 화면 너머 빠르게 올라오는 친구들의 채팅을 한동안 멍하니 바라봤다. 알 수 없는 메스꺼움과 함께 복통이 느껴졌다. 결국 그날 나는 급체를 했고, 식당에 관한 이야기는 꺼내보지도 못한 채 다음 약속을 기약해야 했다.
이런 내 소극적인 태도를 두고 고민에 빠진 것은, 최근 엄마와 함께 대형마트에 가서부터였다. 그곳은 길게 늘어선 냉동식품 코너가 3군데나 있고, 코스트*처럼 업소용 제품을 판매하기도 하는, 꽤 큰 매장이었다. 이런 곳이라면 필히 비건 식품이 있을 거라는 생각에 신나서 냉동 코너로 달려갔다. ‘최근 L사에서 비건 떡갈비를 출시했다는데 나왔으려나?’, ‘식물성 짜장면이랑 떡볶이는 당연히 있겠지?’
그런데 놀랍게도, 없었다! 모 대기업의 식물성 만두를 제외하고는 정말 하나도, 아무것도 없었다. 허탈한 나는 곁에 있던 엄마에게 말했다.
“아니 여기는 이렇게 매장이 큰데 왜 비건 제품이 하나도 없어?”
“직원한테 물어봐. 네가 말을 해야 그 사람들이 필요성을 느끼지.”
하지만 나는 그날 직원에게 비건 제품을 들여달라고 말하지 못했다.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친구로서 비건 옵션이 가능한 식당을 찾아보자고 말하면 될 일이었다. 소비자로서 비건 제품은 따로 없냐고 물으면 될 일이었다. 정당하게 요구할 수 있는 것들이었다. 그런데 왜 나는 그렇게 하지 않았을까? 이 물음은 나를 오랫동안 괴롭혔다. 그러니까, 비건 지향 4년 차인데도 여전히 나는 두려웠던 것이다. 친구들이 피곤한 질문들을 늘어놓을까 봐. 마트 직원이 내 질문을 이해하지 못하고 “예? 그게 뭐예요?”라고 하거나, 혹여나 “그런 건 여기 없어요"라는 말을 할까 봐.
생각해보면, 나는 비건을 지향하지 않았을 때도 무언갈 요구한 적이 거의 없었다. 그러니까 나는, 기업이 아주 좋아하는 ‘쉬운 소비자'였다. 생각하지 않는, 요구하지 않는, 비판하지 않는, 순순한 소비자 말이다. 물론 비건을 지향하면서 생긴 심리적 장벽도 있을 것이다. 단지 나약해서가 아니라, 비주류에 속한 사람으로서 겪어왔던 은근한 차별 탓도 있을 터.
고백하자면, 나는 그런 차별을 어느 정도 당연하게 생각했던 것 같다. 정확히는 어쩔 수 없었다고 생각했다. ‘어쨌든 이 사회는 육식 중심주의니까…’라고 변명하듯 되뇌면서 말이다. 생각해보면 나는 내 상황이나 조건을 탓하기만 할 뿐, 그것을 개선하기 위한 어떤 노력을 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이런 나의 수동적인 모습을 내가 뻔히 아는데, 도저히 당당해질 수가 없었다.
하지만 브랜디가 “당당한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라고 말했을 때, 더 이상 지금에 머물러 있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의 사회구조에 안주하면서 잔뜩 입술을 내민 채 툴툴 대기만 하는 건 나에게도, 주변에도 도움이 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래서 힘들고 저래서 힘들어요'라는 말에서 그치고 싶지 않았다. 당사자로서, 공동체에 속한 시민으로서 해야 할 말을 하는, 떳떳한 이가 되고 싶어졌다.
시즌 1의 메인 키워드이자 주제는 ‘당당 비건’이다. 친구이자 소비자, 시민 등 다양한 주체로 살아가는 비건 지향인들이 삶의 주도권을 잡기 위해 가져야 할 ‘당당함'을 고민하고자 한다.
어깨를 쫙 펴고, 당당한 비건으로 살아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눈치 보지 말고 요구해야 할까? 더 좋은 방법은 없을까? 긴 이야기를 시작하기에 앞서 마음을 정돈해본다. 당당하지 못했던 나를 꺼내놓되, 질책하지 않기. 솔직한 생각과 그때의 감정을 털어놓기. 그런 다음 괜찮아질 거라고, 그럼에도 같이 나아가자고 어깨동무해줄 동료가 되리라 마음먹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