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 일상] 산토리니 아닙니다
8월에서 9월로 넘어가는 경계에 이르자 어마어마한 소나기가 쏟아 붓더니 날이 꽤 쌀쌀해졌다. 쏟아지는 소낙비 줄기는 한국의 장마비보다도 굵고 짧다. 저쪽 해안선에서 번개 줄기가 번쩍 갈라지고 우렁찬 천둥 소리가 주변을 '꽝'하고 내리치며 온 대기를 무겁게 진동시킨다. 저 묵직한 구름 뒤로 헤라 여신과 부부싸움을 하고 성질 부리고 있을 제우스의 모습이 그려진다. 예전에는 그리스는 늘 덥고 햇볕이 쨍하기만한 곳인 줄 알았다. 여름은 덥고 쨍한게 맞으나 가을이 되니 쌀쌀해지고 스산한 기운이 스멀스멀 들어오기 시작했다. 지난 번 겨울에는 온종일 히터를 틀었고 벽난로에 장작을 태우며 겨울 분위기를 만끽했다. 본토 북부 지방이나 산간 지방 등 다른 지역에는 눈소식이 들리거나 눈 덮인 한겨울 풍경이 저녁 뉴스거리로 나왔다.
'그리스'라고 하면 대게는 '아,산토리니! (혹은 포카리스웨트~)' 라는 반응이 많았다. 가끔씩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나 고대 문명의 발상지 크레타 섬을 떠올리는 이들도 있었다. 태양 빛에 반짝거리는 바닷물과 맞닿은 절벽 위에 하얀 벽과 파란 지붕이 그림 같은 집들이 장관을 이루는 산토리니는 분명 기막히게 아름다운 곳이다. 하지만 그리스의 대표 얼굴은 아니다. 그리스는 지중해의 따뜻한 나라라고 요약하기에는 너무나도 다채로운 얼굴을 갖고 있다. 발칸반도를 따라 산악지대가 발달한 그리스 본토가 있고, 서쪽으로 이오니아해, 남쪽으로 지중해, 동쪽으로 에게해 전반에 포진해 있는 크고 작은 수 천개의 섬들도 가지 각색이다. 내가 있는 이 곳 코르푸는 그리스 본토 서쪽, 이오니아 제도에 속하는 섬으로 그리스 섬 중에서도 최북단에 위치하고 있으며 메마른 에게해와 다르게 강수량도 많아 섬 전체가 푸르르다. 서쪽으로는 페리를 타고 이탈리아까지 8시간 내에 갈 수 있으며, 바다 넘어 북쪽으로는 알바니아가 맨눈으로 선명하게 보일정도로 가깝다.
코르푸 섬의 그리스어 명칭은 Κέρκυρα ( Kérkyra, 케르키라)이며 Corfu(코르푸)는 널리 통용 되는 영어 명칭이다. 섬 이름의 유래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설이 있지만 그리스 신화에 따른 스토리가 대표적이다. 바다의 신인 Poseidon(포세이돈)이 딸 부자이자 강의 신인 Asopos(아소포스)의 딸 중 Korkyra(코르퀴라)를 사랑하여 그녀를 납치해다가 이 섬으로 데려 왔고, 그녀의 이름 Korkyra에서 현재 섬의 이름이 유래되었다고 한다. 문화적으로나 역사적으로는 고대에 동로마, 중세에 베네치아, 근대에는 프랑스, 영국의 통치를 번갈아 받음에 따라 다양하고 개방적인 독특한 문화를 형성해왔다. 특히 코르푸를 비롯한 이오니아해 몇몇 섬들은 14세기부터 400년간 베네치아 공화국의 일부로 오스만 제국의 영향권 안에 있던 그리스의 타 지역과는 이질적인 역사와 문화를 형성해왔다. 지금도 코르푸 중심가에는 베네치아 풍의 건축물이 즐비하고, 이탈리아와 그리스 음식의 하이브리드 같은 코르푸 전통 음식들도 맛볼 수 있다.
코르푸 구시가지는 통째로 유네스코 세계 문화 유산이기도 하다. 굽이굽이 좁고 복잡한 골목길들을 따라 걷다보면 베네치아 영향을 받은 컬러풀한 스타일의 건축물, 신고전주의 양식, 그리스 부흥 양식, 프랑스 제국주의 양식 등의 다양한 양식의 오래된 건축물이 공존하며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고 있음을 볼 수 있다. 특히 장엄하고 시간의 흔적을 그대로 간직한 항구의 요새가 압도적이다. 베네치아 공화국이 오스만 제국에 대항하며 해상 무역 이익을 방어하는데 사용되었고, 이후에도 19세기 영국의 통치하에 재건되기까지 부분적으로 수리되어오며 지중해의 요새화된 항구의 위엄을 지켜주고 있다. 탁트인 바다, 요새, 몇 백년된 낡은 석조 건물들, 미로 같은 좁은 골목길, 건물들 사이사이 공중에 널려있는 빨래, 구식의 상점들, (여름에 치이고 치이는 관광객만 없으면) 마치 몇 백년전 과거로 시간 여행을 온 듯한 재미를 선사한다. 구시가지 쪽은 코르푸 섬에서 가장 번화한 중심부이기도 하다. 좁은 골목까지 카페 및 식당 테이블이 비집고 있고, 그 사이를 오고가는 수많은 인파로 남부 유럽 특유의 떠들썩하고 번잡스러움이 정겨우면서도 활기가 가득한 곳이다.
하지만 내가 있을 곳은 구시가지가 아닌 저 북쪽의 시골 마을이다. 과거의 화려한 건축물은 커녕 편의 시설도 제대로 없다. 일반인들이 거주하는 낡은 집들이 길따라 보이고, 정글 같은 공터, 후질근한 수퍼마켓, 마을 교회, 동네 카페가 있다. 시부모 댁에서 차타고 5분 정도 가면 가장 가까운 해변이 있다. 섬이다 보니 해안선을 따라 크고 작은 해변이 즐비하다. 그리고 섬 전반적으로 산자락에서 굽이굽이 오르막길을 따라 산등성이에 마을들이 형성되어 있고 아래로 내려다 보이는 숨막히는 오션뷰 혹은 마운틴뷰는 늘 감탄사를 자아낸다. 여름부터 초가을까지 투명하고 푸르른 바닷가에서 해수욕을 즐기고, 가을부터 봄까지는 녹음이 우거진 푸르른 산에서 하이킹이 제격이다.
언제 어디나 푸르른 섬 코르푸가 뜬금없이 내 인생에 들어온건 순전히 내 인생의 짝꿍 때문이다. 나는 그리스에 대해서는 거의 아는 것도 없었고 가본 적도 없었었다. 사실 나는 그리스 섬에서 시골생활을 하기엔 최악의 조건을 갖고 있다. 첫째, 난 수영을 못한다. 염분이 높은 바닷가에서도 기적처럼 쭉 가라앉으며, 발과 다리 주변에 돌아다니는 물고기가 무서워 그 흔한 바다 수영도 제대로 즐길 줄 모른다. 둘째, 그리스어를 모른다. 나이가 들어 배우려고 시도는 해보고 있으나 한국어와 폴란드어로 용량이 차버린 나의 뇌는 학습한 그리스어 단어 족족 DELETE 해버린다. 셋째, 도시에서만 살아본 난 시골 생활 자체가 첼린지다. 그리스 섬 생활은 한국 시골보다도 더 시골 같은 원초적인 환경에 적응해야함을 의미한다. 편의 시설, 힙한 카페, 활기 가득한 길거리, 문화 공간 등은 잊어버리고 낯선 자연과 한 마음 한 몸되어 부지런히 살아가야 할 것이다. 아직은 코르푸와 한국 사이를 왔다갔다 하는 단계이지만 지금 계획대로 그 푸르른 섬에 정착해 살아갈 모습을 상상하면 내 마음은 두려움 보다는 설레임의 기운으로 차오른다.
2023.09 , Corf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