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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nika Jan 29. 2024

아버님은 카페 죽돌이셨다

[그리스 일상]  카페니오와 카페 문화


마을 중심부이자 언덕길 중심부 길목에는 우리가 가끔 커피 한잔하러 가는 카페가 있다. 보통, 아침 모닝커피 타임이나 늦은 오후에 산책 겸 쉬엄쉬엄 걸어간다. 가면 늘 가게주인이자, 바리스타이자, 웨이터인 드미트리스가 특유의 호탕한 목소리로 반겨준다. 우리 단골 메뉴인 큰 카푸치노 한 잔, 작은 카푸치노 한 잔을 내려주며 안부를 묻고 시시콜콜 대화를 시작한다. 우리뿐만이 아니라 다른 손님들, 지나가는 사람, 오고 가는 사람들과도 잡담과 웃음이 오고 간다. 그 와중에 틈을 타서 미니 스쿠터를 타고 커피 배달도 나간다. 한 손엔 커피 테이크아웃 포장, 한 손엔 스쿠터 핸들을 잡고 번개같이 몰고 나간다. 내가 가지지 못한 능력, 멀티 태스크의 귀재이다, 그는. 그런 그가 바쁘면 가끔 안 해주는 게 있다, 커피값 결제. 그냥 나중에 알아서 달란다. 오랜 친구들처럼 거래도 느슨하다. 


카페에 앉아 있으면 지나가는 여행객뿐만 아니라 주변에 사는 동네 주민들과도 계속 마주친다. 가족 단위의 테이블, 부부가 앉아 있는 테이블, 동네 어르신 무리가 담소를 나누는 테이블, 외국인 관광객들이 이국적인 정취를 즐기며 쉬어가는 테이블 등 다양한 사람들이 보인다. 가끔은 동네 고양이도 테이블 의자에 자리 잡고 늘어져 있다. 세련되지 못하지만 정겨움이 흐르고, 커피 냄새보다는 사람 냄새가 진한 곳이다. 




그리스 생활에서 카페는 빼놓을 수 없는 요소이다. 지금은 스타벅스 같은 체인점 커피숍이나 트렌디하고 힙한 카페들도 많아졌지만, 전통적으로는 'καφενεíο( 카페니오)'가 그리스인들의 일상을 차지해 왔다. 전통적인 카페니오는 그리스의 모든 마을, 섬, 도시 등 지역에 상관없이 그리스인들의 삶에 아주 가깝게 스며들어 있다. 단순히 커피를 마시는 장소를 넘어서 사회생활의 장이자 일상의 오락과 여가의 장소였던 것이다. 카페니오는 남녀노소 없이 모이는 장소이기는 하지만 전통적으로 고객은 남성층이 압도적이었다. 전통적인 사회에서 이들은 카페니오에 모여 그릭커피(Elleniko)나 우조(Ouzo), 치푸로(Tsipouro) 등의 그리스식 포도 증류주를 한 샷씩 마시며 카드 게임, 타블리(Τάβλι ; 그리스식 백가몬 Greek Backgammon)등의 보드게임을 하고, 수다를 떨며, 삼삼오오 많은 토론과 열띤 대화를 나누며 여가 시간을 보냈다. 


내 짝꿍의 아버지도 그 무리 중 한 분이셨다. 매일 직장에서 퇴근하고 나면 동네 카페니오로 '출근'하여 많은 시간을 보내셨었다고 한다. 카페니오는 아버님의 아지트이자 놀이터이고, 그는 그곳의 '죽돌이'였다. 수시로 마주치는 마을 친구, 사촌의 팔촌까지 삼사오오 앉아서 정치 토론에 열을 올리고, 타블리게임을 하는 그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나의 짝꿍도 어렸을 때 카페니오에서 어른들과 아버님에게 타블리 게임을 배웠다. 그곳에 앉아 있으면 떠들썩하고 활기찬 분위기에 압도되었다고 한다. 어릴 적 느낌에 카페니오를 '삶이 가득 차 있는 곳'으로 회상하고 있다.  


그리스식 백가몬(Greek Backgammon)으로 알려진 '타블리'. 두 명의 플레이어가 주사위를 던져 룰에 따라 각자의 말을 움직여 먼저 모두 소진시키는 자가 승리한다



지금도 마을 모퉁이마다 있는 전통적인 카페니오를 보면 대부분 백발에 나이 드신 분들이 모여 도란도란 앉아 계시는 모습을 자주 본다. 같이 세월을 지내온 오랜 동무처럼 여전히 그곳에 있지만 예전에 비하면 약간 빛바랜 옛날 사진처럼 희미해져 가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이젠 '카페니오' 하면 왠지 촌스럽고 예스러운 뉘앙스를 풍기기도 한다. 그렇다고 일반적인 '요즘 스타일'의 카페와 카페니오의 경계가 뚜렷이 그어져 있는 건 아니다. 카페는 여전히 나이 든 세대, 젊은 세대 구분할 것 없이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낮에도 밤에도 얘기 나누며 시간을 같이 보내는 곳이다. 남자들끼리 카페에 앉아 수다 떨며 앉아있는 장면도 흔하게 볼 수 있다. 세대가 바뀌어 카페의 스타일과 분위기는 다를지언정 사람들의 활기로 가득 찬 지금의 카페들도 카페니오의 연장선이다. 




우리 한민족의 카페 사랑도 남다르다. 하지만 그리스와는 결이 다르다. 나도 한국에서는 자주 카페를 찾는 일인이지만, 커피 향이 가득한 공간에서 고음질 스피커로 흘러나오는 재즈 음악을 들으며 멍때리기 위해 간다. 많은 이들은 노트북으로 각자 작업에 몰두하는 공간을 찾아 카페를 찾는다. 아니면 삼삼오오 식후 커피 한 잔과 달달한 디저트를 먹기 위해 간다. 여자들끼리 수다와 디저트를 즐기며 위해 카페를 찾는 경우는 많지만, 남자들끼리 만나서 카페로 놀러 가는 경우는 드물다. 카페에 갔는데 거기서 본인의 아버님이나 할아버지와 마주칠 경우는 더더욱 드물다. 


한국에서 카페는 보통 낮의 공간이며 개인적인 영역이다. 밤의 공간과 사회생활의 영역은 따로 호프집이나 고깃집이 책임져 준다. 반면에, 그리스에서 카페는 낮과 밤이 공존하는 공간이자, 모든 세대와 남녀노소가 연결되는 사회적인 공간이다. 


여담이지만, 내가 20년 전에 살았던 폴란드의 한 시골 마을에는 카페를 찾아볼 수가 없었다. 궁금해서 당시 마을 주민인 폴란드 친구에게 물었다. 

"여기엔 왜 카페가 없어?" 

"커피를 집에서 마시면 공짜인데 왜 나가서 커피를 돈 내고 마셔야 돼?" 

"...."

물론 지금은 사정이 많이 달라져 폴란드에서도 카페는 일상적인 장소이다. 커피값이 아까워서 카페는 안 간다는 집단 정서도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딱히 그렇다 할 만한 카페 문화는 형성되어 있지 않다. 내가 기억하기로, 그들의 활기는 (나의 활기 또한 마찬가지로) 밤이 어둠을 몰고 올 무렵, 집 부엌에서 보드카와 함께 돌아왔다. 





우리 동네 드미트리스의 카페도 일반 카페와 카페니오의 경계가 무의미해지는 곳이다. 세대 간의 경계도 허물어져 있으며, 찾아오는 모든 이들의 경계도 느슨해지는 곳이다. 오늘은 짝꿍과 시부모님과 같이 오후 커피를 하러 드미트리스의 카페에 왔다. 뜨거운 태양을 피해 야외 그늘 자리에 자리를 잡고 앉아 있으니 왠지 카푸치노가 아닌 그릭 커피가 마시고 싶어졌다. 순간 나는 마음은 통하지만, 언어적 말은 안 통하는 아버님에게 타블리 한 판 두자고 도전장을 내밀었다. 


카페에 구비된 타블리판으로 나와 아버님은 어머님과 나의 짝꿍을 관객으로 두고 타블리를 두기 시작했다. 주변 테이블의 동네 사람들도 우리의 게임을 구경하며 관객이 점점 늘어났다. 응원의 분위기가 달아오르기 시작했고, 주사위를 던지고 말을 움직일 때마다 흥분감과 실망감이 교차했다. 주사위를 던지는 아버님의 손목은 참 현란하시기도 하다. 


당연한 얘기지만, 애초부터 타블리 왕초보인 나는 관객들의 흥분에 호응 못하고 초반에 참패를 당했다. 하지만 오늘따라 진한 그릭 커피의 맛은 더 진하고 깊었고, 경험해 보지 못한 것에 대한 향수를 느낀다는 게 어떤 것인지 알 것만 같았다. 



2023.09 , Corf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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