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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nika Jan 15. 2024

와인은 물컵에 마셔야 제맛이지

[그리스 일상] 나의 그리스식 시골 밥상 2


 나는 와인을 좋아한다. 여름 더위가 묵직하게 공기를 데우면, 시원하게 칠링 된 크리스피하고 시트러스 한 향이 감도는 화이트 와인을 찾는다. 추운 겨울이 도시를 감싸면, 묵직한 바디감에 스파이시한 노트와 오크 향이 입에 그윽하게 머무는 레드 와인을 즐긴다. 잘 빠진 와인잔과 디켄터에 담긴 아름다운 벨벳 색상의 비주얼에 취하고, 코를 간지럽히는 알코올 머금은 포도향에 취하며, 입안에 머금고 있으면 입안에 퍼지는 다채로운 맛에 취한다. 목 넘김의 순간까지도 혀와 목구멍에 흐르는 모든 감각을 놓치지 않는다. 미각과 후각적인 자극뿐만 아니라 와인 잔 앞에서만 느낄 수 있는 이 특유의 감성과 복잡 미묘한 센세이션을 즐긴다. 도시 생활에서 나에게 와인은, 몸에 흐르는 감각적인 센세이션과 함께 정신적으로도 은근한 흥분감과 희락을 서서히 퍼뜨려 주는 지극히도 개인적이고 유희적인 존재이다. 




 그리스 시골 생활에서 와인은 거의 일상과 같이하는 친근한 존재가 되었다. 우리네 시골에서 사발에 따라 반주로 마시는 막걸리와 같이 그리스 시골 밥상에서는 와인이 있어 줘야 식사의 완성이라 할 수 있겠다. 알고 보니 와인은 투박함 그 자체다. 잘 빠지고 우아한 와인잔 따위는 없다. 집에 굴러다니는 아무 병에 와인을 담아 테이블 중앙에 세팅해 놓고, 부엌 찬장에 늘 준비되어 있는 물컵처럼 생긴 유리잔에 따라 마신다. 와인을 따라다니는 수식어 페어링, 디캔팅, 와인글라스나 우아한 제스처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꿀꺽 크게 한 모금 목구멍으로 쫙 넘기고 나면 입맛이 살아나고 식사 자리에 흥이 오른다. 향긋하면서도 알싸한 포도 향이 혀를 자극한다. 서로의 언어를 몰라 평소에 언어적 의사소통이 잘 안 되는 나와 시아버지는 와인컵을 부딪치며 눈빛 소통만으로도 서로를 이해한다는 듯 연신 짠(!)을 해댄다. 이로써 감정적 통로가 연결되고 우리는 깊은 연대를 다지곤 한다.


그리스에서는 전통적으로도 와인잔이 스템과 베이스가 없는, 그냥 컵 같은 모양이라고 한다. 아담한 사이즈의 귀여운 이케아 물컵 같아 보이기도 한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와인을 물에 희석시켜 마시는 게 격 있는 풍습이었다고 한다. 관점의 차이에 따라 와인을 물에 탄 게 아니라, 마실 물을 정화시키기 위해 물에 와인을 좀 섞었다는 설도 있다. 하지만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복잡 미묘하고 섬세한 미식 문화로서의 와인과는 차이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와인 제조용 프레스

 시아버지께서는 매해 9월이면 자라난 포도를 따다 일 년 내내 마실 양을 제조하신다. 일반적으로 와인은 포도 품종, 수확 연도, 자란 지역과 지역 안에서도 각기 다른 테루아 및 저장 방식에 따라 천차만별로 달라지는 매우 민감한 존재이다. 내 그리스식 밥상의 와인은 집 마당, 이웃집 마당 혹은 여기저기 스스로 자라고 있는 길거리 테루아에서 자란 로컬 종 포도가 사용된다. 


와인 만드는 날이 되면, 80세가 넘으신 아버님께서는 앞마당에 자리를 펴고 손수 구식 분쇄기를 돌려가며 영혼과 함께 포도를 달달달 갈아내신다. 분쇄된 포도를 다시 100년이 넘은 전통식 나무통 프레스로 압착하여 즙으로 짜내고 발효 통에 담아낸다. 내내 신이 난 고양이들이 주변에 얼씬 거리고, 포도 향에 취한 꿀벌 무리가 계속 다이빙 기세로 윙윙거린다. 집 강아지도 한 번씩 와서 주변을 감독한다. 한 땀 한 땀 정성을 다한 와인에 대한 아버님의 와인 부심이 대단하다. 집을 방문하는 손님들에게도 한두 병씩 꼭 손에 들려 보내신다. 


그러고 보니 나도 다른 집을 방문하면 그 집에서 들려 보낸 와인병을 들고 돌아오기 일쑤다. 그리스 섬 생활 내내 마신 와인 대부분은 누군가가 집에서 직접 만든 홈메이드 와인이었다. 서로 와인 병을 쥐어주는 구수하고 정겨운 정나미가 묻어난다. 전문 와이너리에서 제조한 상업적 와인들도 무수히 존재하지만 내 시골 생활 속으로는 파고들진 못했다. 이곳에서의 와인은 사계절의 리듬에 따라 9월이면 여무는 포도를 수확하여 일 년 내내 즐길 수 있는 형태로 저장해 놓은 자연의 산물이다. 이를 매일의 일상에서 가족, 친구, 마을 사람들과 서로 같이 나누고 마시며 정을 나누고 연결감을 느낀다. 


아버님의 '집마당 샤토' 와인은 그리스 코르푸에서 아직 무더움이 가시지 않은 9월 초가을의 감성을 불러일으킨다. 그 맛과 향이 나에게 선사하는 센세이션으로는 매해가 빈티지 와인이며 그랑크뤼 라벨이다. 자연의 리듬에 따라 담긴 투박함과 군더더기 없는 심플함은 음식 재료 본연의 맛과 신선함이 뛰어난 그리스 섬 특유의 오가닉 한 밥상과 한 몸처럼 어울린다. 비옥한 집 앞 토양에서 뜨거운 태양을 머금고 자란 포도에서 근사한 홈메이드 유기농 내추럴 와인과 오늘도 나의 그리스 시골 일상은 더욱 풍요로워진다. 



2023.09, Corf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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