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 일상] 시에스타 즐기기
점심식사 이후 기분 좋은 포만감에 슬슬 산책을 나선다. 내리쬐는 태양 빛을 애써 손으로 가리며 주변을 돌아본다.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을 빼고는 모든 것이 멈춰 있는 듯한 이 순간, 모두 잠들어 있음을 피부로 감지한다. 고양이도. 강아지도. 한낮의 고요함이 나에게는 너무 낯설게 다가왔다. 아, 시에스타의 마법. 온 마을이 일시정지 모드로 들어간 상태였다. 정적이 가득 흐르는 공기를, 강렬한 태양만이 멈춤 없이 달구고 있었다. 가끔씩 휴가를 만끽하는 외국인 휴양객들만이 눈치 없이 그 사이에서 정적을 깨고 다닌다.
이 시간에는 마을 카페도 닫혀있고, 많은 가게들이 한낮에 문을 닫는다. 이곳은 가게나 식당들이 대형 체인점이 아닌 이상, 오후에 3시간가량 휴게시간을 갖는다. 보통 2~3시에 칼같이 닫고, 5~6시에 영업을 재개한다.그 사이에 많은 사람들이 일을 멈추고, 대낮의 단잠에 빠진다. 짝꿍은 어렸을 적, 시에스타 시간에 동네 친구들과 안 자고 뛰어다니며 놀다가, 동네 어르신한테 조용히 하라는 꾸지람을 들었다고 한다. 실제로도 그 시간에 시끄럽게 구는 건, 매너가 없는 행동이라고 한다.
시부모님들도 점심 식사 및 잡담 후에는 으레 '바이바이' 혹은 '스윗 드림'하시고 침실로 향하셨다. 내 짝꿍도 누가 로컬 아니랄까 봐 얄밉도록 바로 침대로 직행했다. 한국에서 자라면서 '먹고 바로 눕지 말라'를 십계명처럼 나에게 주입하신 부모님 덕에, 이렇게 난 깨어있는 세계에 홀로 남겨진다. 그들만의 '고요하고 신성한 의식'을 치르는 동안, 난 배부르고 나른한 오후를 그렇게 혼자 보냈다.
생각해 보니 짝꿍을 만나고 한동안 적응이 안 되었던 부분이 바로, 그의 허구한 날 낮잠을 자는 습관이었다. 한국에서 그는 재택근무 중에도 별 다른 일이 없으면 오후 무렵 소파에 '정갈하게' 누워 낮잠을 잤다. 나도 코로나 기간 동안 보통 짝꿍 집에서 재택근무를 하였는데, 조용해서 뒤돌아 보면 어김없이 소파에 관 속의 미라처럼 누워 있었다. 두 손을 앞으로 가지런히 모은채. '저런 게으른..' , 보고 있자니 짜증이 밀려왔다. 쉬는 시간에 조차 무언가를 하고 분주해야 직성이 풀리는 '부지런 병' 한국인과, 일할 시간에도 속 편하게 낮잠도 자고 커피도 마시며 농땡이에 익숙해 보이는 '게으름 병' 남유럽인. 이 부분에 있어서는 타협 불가였고 우리는 각자 평행선을 달렸다. 그런데 막상 그의 고향에 와 보니 짝꿍뿐 아니라 마을 전체가 게으름 병에 걸려있다. 여기서는 내가 극 열세이다. 나 홀로 거부해 봤자이다. 거기에다 저 뜨거운 태양은 나까지 잠재울 기세였다.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고 했던가. 어느 날 문득, 눈을 떠보니 벌건 대낮에 난 침대에 누워 있었고 얼굴에 쏟아지는 햇볕에 정신이 서서히 돌아왔다. 배부름과 나른함에, 혹은 적막감과 지루함에 나도 모르게 스르르 잠이 들었었나 보다. 내가 자다 깼다는 걸 깨달음과 동시에, 나의 몸은 오븐에서 갓 나온 피자 치즈처럼 녹아 흐르는 느낌이었다. 나의 몸뚱이는 말도 안 되게 가볍고 가뿐해져 있었다. 이유 없이 기분이 업되어 배시시 웃음이 나왔다. 한낮의 꿀잠은 급속 파워 충전이었구나. 이쯤에서 나는 서서히 마음을 놓아 버렸다. 점심 식사 후 간단히 소화를 시키고 침대에 편안히 누워 낮잠을 자기 시작했다. 아니, 낮잠을 '즐기기'시작했다. 완벽한 로컬처럼.
이는 생활 습관의 변화이기도 하지만, 인생에 대한 내 마음 자세의 변화이기도 하다. 전에는 낮잠을 자는 행위는 할 일 없는 자들의 게으른 행위로 나 자신에게는 용납할 수 없었다. 가끔가다 피곤해서 낮에 눈을 붙이고 일어나면, 그만큼 시간을 낭비했다는 죄책감에 '우울한'기분으로 일어나 남은 하루를 괴롭게 마무리하였다. 이제는 '죄책감'보다는, 낮잠을 즐길 줄 아는 자가 되어 몸과 마음을 충전시키고 '여유로운' 태도를 갖게 되었다. 게다가 몸이 녹을 듯 이완된 상태에서 오후 기상을 하면, 상쾌한 기분으로 하루의 2부를 시작할 수 있다. 하루가 두 단계로 나뉘어 있는 것 같다. 중간에 낮잠 자는데 시간을 사용했음에도 불구하고, 하루가 더 알차고 길어진 것 같은 마법을 경험할 수 있다.
시에스타는 '게으름 병'때문에 생긴 풍습은 물론 아니다. 이 지역 여름의 무더위를 경험해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그리스 인들은 대낮의 고요와 상반되게, 밤늦게 혹은 새벽까지 깨어 떠들썩하게 여름밤의 낭만과 유희를 마음껏 즐긴다. 저녁이면 영업 마감하는 서유럽이나 북유럽과는 달리, 그리스에서는 카페나 식당들도 늦게 까지 열려 있다. 밤이 되면 왁자지껄 북적북적 활기가 돈다. 야밤에 친구들과 모여 카페에 커피 마시러 가는 일도 심심찮다.
전 세계 하루 평균 수면 시간을 살펴보니, 그리스인의 하루 평균 총 수면 시간은 유럽에서는 짧은 편이었다. 나의 편견과 다르게, 시에스타가 없는 서유럽이나 북유럽인 보다, 그리스인은 잠을 덜 자는 것으로 확인된다. 물론, 세계에서 수면 시간이 짧기로 일등과 이등을 나란히 달리는 일본과 한국보다는 길지만 말이다.
*publichealthmaps.org 웹사이트 참조
그리스인들은 그저, 하루 활동 시간과 수면 시간을 다르게 쪼개어 생활하는 것뿐이다. 어찌 보면 졸리고 피곤한 시간에는 수면을 하고, 활동하기 좋은 시간에는 활동을 하는 효율적인 관습이라고 할 수 있겠다. 낮잠의 효과에 대해서는 이미 많이 알려져 있다. 몸의 피로를 풀어주고, 우울증 극복에 도움이 되며, 기억력과 집중력을 향상시키고, 신체 에너지와 활기를 충전시켜 준다. 시에스타 풍습은 삶의 지혜이다.
한국에 돌아와서도 난 종종 시에스타를 즐기는 여자가 되었다. 눈을 떴는데 주변은 아직 환하다. 게다가 몸은 이완되어 녹아버릴 듯 가볍고, 남은 하루를 보낼 에너지가 차올라 있는 이 맛에 한다. 고백컨데, 가끔 너무 느낀 나머지, 낮잠이 늦잠이 되어 어둑할 무렵에서야 멍한 상태에서 일어나는 참사를 겪기도 한다. 시간 조절은 그날의 컨디션과 스케줄에 따라 적당히 조절하도록 한다. 눈을 떴는데 멍하고 가라앉는 느낌이 아니라, 가볍고 맑은 정신에 충전된 느낌이 포인트다. 오늘도 활기차게 낮잠 후 일어나 모닝커피가 아닌 에프터눈 커피 한 잔을 마시며 하루의 후반부를 시작해 본다.
2023.11 , Daejeon